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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함량 미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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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7-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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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했던 사람들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 22:6),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한 고백을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날카로운 칼이나 갈고 닦은 화살이나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사용하신다는 확신을 가졌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자로 쓰신다는 확신을 가지기도 했지만 인간적 현실에서는 자신을 재기불능의 실패자로 자인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한 때는 처절한 절망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외치고 선포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과 자부심을 가지고 기쁘게 감당하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로 잘 감당합니다. 그럴 때는 자신의 존재감도 특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도 죽음보다 두려운 상황에 자신이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자신이 실패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어쩌면 이사야의 경험은 우리 모두의 경험이고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 또한 역사에 대하여 확신과 절망이 교차되는 경험을 인식적 지식으로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바쁘게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끊임없이 쫓기며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과잉이라는 말이 담론이 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쁘고 쫓기며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쁘고 쫓기며 살아도 가끔 조용한 시간에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가 갑자가 죽거나, 병들거나, 목회나 직장 생활이 힘들어 지치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어려움이나 시련 앞에 역부족을 절감하게 될 때 허무와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심지어 자녀들이 다 출가하고 빈 둥지 증후군 같은 것으로 삶의 허무를 느낀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담론이 되고 있는 일상의 과잉도 허무를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전에는 바쁘게 사는 것이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상의 과잉이 허무에 빠지게 한다고 하니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일상의 과잉으로 바쁘게 쫓기며 살다가 허무에 빠져서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악순환입니다.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러 바쁘게 살았는데 바쁘게 사는 것이 삶을 허무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의 과잉으로부터 벗어나 여행도 다니고 연극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즐기며 사는 것으로 스타일을 바꿔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삶에도 허무를 상쇄시킬 충분한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허무로부터 탈출하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대충 하며 살기로 하는 것입니다. 사업도 직장생활도 교회생활도 목회도 대충 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경향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름의 효과를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런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꾸준히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한꺼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한 번 은혜 받거나 체험을 하면 모든 것이 만사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불완전 하지만 성경을 통해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바울 같은 분을 만나고 그분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그분들처럼 고백할 수 있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도 스스로 실패의 고백을 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패의 자인,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사야의 경우 자신이 실패했음을 고백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유보하고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사 49:4). 마치 욥이 납득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판단을 받아보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욥 31:35).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늘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기뻐하실 일에 참여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직장일, 교회 봉사, 인간관계에서의 서로의 의무와 국민의 의무는 즐거움으로서가 아니라 억지로라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의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고 천국에서 받게 될 상급의 개념 또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선행이 상급을 받을 이유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사실을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임을 깨달았으나 어느 순간에 우리가 거의 쉽게 눈치 채지 못하게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의 진술과 예언을 하게 됩니다. 신학자들이 ‘종의 노래’라고 이름 붙인 성경 중 이사야 53:4절은 고난 받는 종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는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방식으로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실패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룰을 바꾸셨습니다. 죽은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려는 사탄은 절대로 하나님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확증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로서는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사야는 세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실패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판단이고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세력을 부활로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와 생명공동체가 되므로 사망을 이긴 승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우리가 사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땅을 딛고 서 있는 것보다 더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확실한 사실입니다. 창조 세계의 모든 것과 구속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에 우리는 지력 함량 미달임에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력 함량 미달에 대한 정직한 자각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철저한 겸손의 고백에서 그것이 세상 모든 지식의 총합보다 소중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생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아는 성경적인 지식이라는 면에서 무지가 참 지식이 되는 역설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사 49: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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