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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 방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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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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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특별계시인 성경은 하나님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어떤 형태나 모양을 취하든지 그 계시가 사랑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곧 하나님의 존재 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 즉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임을 매우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임을 보여주는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존재 방식 역시 사랑이어야 함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본래 인간에게는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을 죄를 지어 타락한 인간이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할 때 오해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기독교 윤리와 관계해서 강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즉 인간 행위에 대하여 이론적인 윤리를 강조하고 원칙을 중요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나와 다른 인격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랑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윤리를 발전시켰습니다. 철학적 윤리에는 사회윤리가 없었습니다. 사회에 관한 관심은 순전히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가르침은 사랑인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되어있습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배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윤리적 대상이 아니고 경배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윤리적 형태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을 윤리적 형태로 표현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오해는 아가페라고 하는 그 사랑의 개념의 독특함과 심오함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을 아가페(ἀγάπη)라고 하는데, 이 아가페는 성경에만 있는 아주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리스 철학에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개념의 아가페라는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구분할 때 흔히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에로스는 남녀 간의 이성적 사랑이고 필레오는 우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스 철학이나 문학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아가페가 없어서 대부분의 사랑을 에로스로 표현합니다. 플라톤은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나 학문을 사랑하는 것이나 진리를 사랑하는 것도 에로스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70명의 학자가 참가하여 번역하였다고 하여 70인 역이라고 합니다. 그때 학자들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그 단어와 같은 뜻의 그리스어 단어를 찾을 수가 없어서 매우 난감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어 단어 중에는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서 결국 아가페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서 번역했다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필레오(φιλέω)나 에로스(ἔρως)로 번역할 수 없어서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동사를 가지고 아가페(ἀγάπη)라는 새 단어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가파오는 맞이하다, 즐겁게 하다, 접대하다, 사랑하다, 존경하다, 좋아하다, 마음에 들다 등의 뜻이 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을 담아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아가페라는 새 단어를 만든 것입니다.

사실 한국어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하나뿐인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영어에서도 사랑은 모두 love라고 하는데, 이런 언어를 가지고 성경의 사랑인 아가페를 번역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에서는 에로스와 아가페를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에로스(εθος)는 아모레(amore)라고 번역하였고, 아가페(αγαπη)는 카리타스(karita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불어에서도 다르게 번역을 했다고 하는 데 우리말이나 영어에서는 그런 구별이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사랑에 대한 많은 오해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에로스나 필레오를 모두 사랑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아가페를 에로스나 필레오로 생각하고 이해하게 되는 폐단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아가페를 에로스나 필레오 같은 단어와 구별하여 번역한 라틴어권이나 불어권에서도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을 오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아가페의 사랑은 본래 인간에게 없었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역사와 율법과 예언과 시가 등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가르침의 핵심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이 그 사랑이 얼마나 심오하고 인간에게 낯선 개념인가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가장 많은 오해 중의 하나가 사랑을 저절로 우러나는 감정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사랑스러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도 응답으로 원수가 저절로 사랑스러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아가페 사랑의 대상을 제시할 때는 저절로 사랑스러워지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저절로 사랑스러워지는 대상을 사랑하라고 할 때도 저절로 사랑스러워지는 사랑인 ‘에로스’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저절로 안 되는 ‘아가페’로 명령하였습니다. 즉 성경은 부부간의 사랑을 명할 때도 아가페로 사랑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사랑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어떤 명령이든지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을 명령하지 않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대상으로서 성경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원수라는 사실이 그 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원수가 사랑스러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원수가 사랑스러워지는 응답을 받았다고 간증하기도 합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원수가 사랑스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도 응답으로 원수가 사랑스러워질 수 있어도 사랑스러워진 원수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원수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스러워진 원수는 더는 원수가 아닙니다. 이것을 혼동해서 원수를 사랑했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원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애인을 사랑한 것입니다. 원수가 사랑스러워지게 해달라고 한 기도의 응답도 큰 은혜이지만, 성경은 원수를 사랑스러운 애인으로 만들어서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그냥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아가페 사랑의 이해와 실천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에로스는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아가페는 사랑스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로스는 영어로 “… 때문에”(because of) 하는 사랑이고, 아가페는 “…임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하는 사랑입니다. 미운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가페이고,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은 에로스입니다. 아가페는 전혀 내키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것을 명령합니다. 그냥 두어도 저절로 잘하는 것을 성경은 절대로 명령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아가페와 에로스를 혼동하기도 하지만 그 둘은 매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에로스의 특징은 그 성격이 아주 이기적이고, 아가페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입니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미인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미인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가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니까 구태여 사랑하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은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기적인 행위에는 자신에게 속는 함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좋아하지만, 자기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미인을 사랑하는 것이 잠시 자기감정을 기쁘게 할지 몰라도 그 아름다움이 지속해서 기쁨을 주지는 못합니다. 미인을 사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것은 이기적이고 이기적인 모든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해당하는 일입니다. 이를테면 학자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존경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미인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우리말에 “美人薄命”이라는 말이 있는데, 薄命이라는 말은 불행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누가 진짜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지 못하고 결혼을 했다가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미인을 사랑하는 사랑에는 가짜가 많습니다. 미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감정이 스스로를 속이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몹시 나쁜 깡패도 미인을 사랑하고, 도적놈도 미인을 사랑하고, 또한 똑똑한 사람도 어수룩한 사람도 모두 미인을 사랑하지만, 얼굴이 좀 못생긴 사람은 아무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얼굴이 못생겼거나 스펙이 형편 없어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 임에도 불구하고”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진짜 사랑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얼굴이 못생긴 사람은 잘생긴 사람보다 사람을 잘못 선택할 위험성이 비교적 낮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펙이 화려하거나 아름다운 미인보다 스펙이 화려하지 못하고 얼굴이 좀 못생긴 사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고 보면 얼굴이 좀 못생긴 것이나 학벌이 높지 않은 것도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임에도 불구하고”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가페의 이런 사랑의 의미가 얼마나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로마서 5: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면 미워 죽겠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구원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에로스만 가지고 계셨더라면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스러울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너무 미운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스럽게 만들어 가십니다. 여기에 아가페의 오묘한 사랑의 질서가 숨어 있습니다. 아가페로 시작한 사랑은 바람직한 에로스로 나아갈 수 있지만, 에로스로 시작한 사랑이 아가페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와 구속과 섭리와 통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근거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고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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