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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잊어버린 세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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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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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사람은 누구나 돈이 많으면 가난한 사람을 쉽게 생각하고, 학문이 깊으면 무식한 사람을 무시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법과 상식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이 많거나 큰 권력을 가졌거나 학문이 깊은 이들은 교회 안에서 조차도 갑질을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자와 학자와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거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특수 분야의 전문가 쯤 되면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교역자를 내려다보고 직분자들을 존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위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쉽게 생각하고 대하는 것은 사회나 교회나 큰 차이가 없고 심지어 교역자들이나 직분자들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당회장이 부목사나 전도사에게 갑질하고, 장로나 권사가 집사에게 갑질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갑질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로서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사라지지 않는 이런 인간의 교만과 갑질이 정치와 문화 일반에서 시대정신을 주도하는 것을 마치 말세가 되어 심각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수준을 오해한 순진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인간의 수준과 시대정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신앙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가장 먼저 드러나게 되는 특징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교만하고 소위 갑질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서만 갑질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갑질을 합니다. 갑질의 행태도 다양하여 물질과 권력으로 갑질을 할뿐 아니라 학문과 신앙으로도 갑질을 합니다. 갑질을 직접 하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 하는 갑질도 있습니다. 과도한 욕심과 낭비가 바로 간접적인 갑질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은 욕심과 낭비가 다른 사람에 대한 갑질인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욕심과 낭비는 곧 살인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아주 나쁜 형태의 갑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한 뜻을 확대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죄의 본질을 교만이라고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죄의 본질을 자기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교만과 자기 사랑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같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자기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류는 교만과 자기 사랑의 특징 때문에 고통과 갈등과 전쟁과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합니다. 일단 큰소리를 치고 돈과 권력으로 거드름을 피워야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겁을 내고 하려고 한 일이 성사됩니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국회의원도 경찰도 검찰도 교수도 목사도 승려도 신부도 굽실대고 맥을 못 춥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돈처럼 매력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속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으로 누리는 재미는 마약과 같아서 그것을 탐닉하는 사람을 망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과 권력으로 대접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인간의 오해와 착각 중에 이것보다 더 확실한 오해와 착각이 없습니다. 사람의 교만은 절대로 그 사람에게 득이 되지 않습니다. 교만하게 행동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높여주고 인정해 줄줄 알지만 성경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교만에 반대되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덕을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만을 부리고 거드름을 피우면 알아주고 겸손하면 실제로 무시를 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겸손하기가 힘든 이유는 겸손하면 무시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심리적으로 자기방어기제인 본능에 의해서 돈과 권력이 없고 힘이 없으면서도 교만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는 달리 교만은 절대 득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염려하는 것처럼 겸손은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런티 하시는 사실입니다(약 4:6).

교만과 자기 사랑의 공통된 특징이 자기가 자기 안에 갇히는 것인데 여기서 갇힌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외부와의 소통이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것과의 접촉과 소통을 통해 생명을 유지합니다. 생물학적 생명이나 사회적 생명이나 영적 생명이나 모든 생명은 예외 없이 다른 것과 소통을 통해 생명이 활성화 됩니다. 피부도 공기와 소통해야 살고, 세포도 다른 세포와 소통해야 삽니다. 다른 세포와 소통 없이 철저히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세포는 암세포입니다. 암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암도 죽습니다. 암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교만은 암세포와 같습니다.

교회도 하나님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도 하나님과 소통하고 세상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소통이 없는 생명체는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물학적 생명은 죽는 것이 실제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만, 영적 죽음은 일상에서 잘 느끼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되어서 죽은 것이지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죽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지만, 온갖 욕망과 허위의식으로 살면서도 자기가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련미와 교양과 예의 같은 것으로 교만을 숨기고 경건한 척하면서 살아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삶을 경계합니다. 그 경계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의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훈련하십니다. 즉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도록 가르치고 훈련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실제적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그 가르침과 훈련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 때 교만하여 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걱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제사나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기 위한 것입니다. 광야 생활의 대표적인 것이 만나를 먹은 것인데,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존을 위해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이었습니다. 기름진 음식이 아나라 생존을 위해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첫째 자신들의 노력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광야에서 생존할 수 없었습니다. 농사도 목축도 어업도 상업도 불가능했습니다.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았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 없이 생존할 수 없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이 어디에서 살든지 이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정신이고 그것이 곧 교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치시기로 하셨습니다. 광야는 그 사실을 배우기 위한 학습장입니다. 이론으로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닙니다. 위험한 땅, 독사가 있고 전갈이 있고 물이 없고 간조한 땅, 농사도 목축도 할 수 없는 땅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물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바위에서 솟게 하셨고 음식은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없이 교만하게 사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살아 있는 생명의 근거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가 질서 있게 활동하는 것은 내재적 원리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직접 통치에 의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가능한 것도 우리 안에 그 원동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벼가 우리 몸속에서 자라지 못합니다. 사과나무가 내 몸속에서 자라지 못합니다. 모두 다 밖에서 자라서 열매를 맺고 우리가 그것을 먹음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지구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이 없으면 지구도 없습니다. 태양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도 우주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주도 하나님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여 존재하고 생존합니다. 둘째는 만나가 생존에 필요한 충분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은 만나가 생존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려는 것은 최소한의 생존 조건에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나는 생존을 위한 충분조건입니다. 모세는 그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시고, 결국 그들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사실은 낮춤과 시험과 복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과의 단절이기에 죽음이고 낮춤은 겸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므로 사는 것입니다. 복을 주려 하신 그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나가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말씀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하는 것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즉 생존의 밑바닥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시험입니다. 그 시험은 태우는 불과 같습니다. 그 불을 통과하면 필요 없는 것들은 타 버립니다. 여기서 필요 없는 것은 자기가 뭔가를 할 수 있다거나 이룰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하나님만 신뢰할 때 사람은 생명의 복을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기에 이 말씀들이 다 맞는 말씀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왠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최소한의 생존 조건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시는 것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왕이면 생존의 충분조건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복 받고 형통하고 부자 되고 건강하고 출세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현대 그리스도인 중에는 아예 복음 자체를 그런 복음으로 만들어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은 부하고 풍족하게 되면 하나님을 잊게 되는 현저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이것은 죄를 범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수준 때문에 맞게 되는 상황입니다.

지금 이곳 미국에서 살고 있는 교포들이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의 형편이 은금이 증식되고 먹어 배부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국이나 이민 사회 형편이 이렇게 좋아진 것이 복이기도 하지만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지적에 의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쉬운 형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부하고 풍족하게 되어도 하나님께 감사할 것 같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간단하고 쉬운 문제라면 하나님께서 걱정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인간이 부하고 풍족하게 되면 하나님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걱정은 단 한번도 괜한 걱정으로 머문 적이 없이 언제나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부러 가난하게 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농사짓고 목축하고 장사하여 돈을 벌면 부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부자 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시거나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다만 그 복이 하나님을 잊게 하면 화가 되기 때문에 경계하신 것입니다. 신자는 반드시 부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가난하게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물질이 풍족해질 때에 거기에 집착하고 거기에 의존하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가난하고 어려우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물질이 풍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필요를 잊고 물질을 의지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잘 감지하지 못하는 영적 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배하시게 되고 물질이 많아져서 물질을 의지하게 되면 물질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 경우 물질이 나를 지배하는데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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