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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독점적 이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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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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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가정과 가족의 가치를 가장 심각하게 훼손하고 세속화시킨 장본인은 마르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마르크스의 가정과 가족에 관한 생각은 엥겔스의 "가족의 기원"의 사상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세상에 내놓아 세기의 이념과 사상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두 사상가가 공산당 선언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야심 찬 혁명 엔진을 가동하면서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의기투합할 때 약속이라도 한 듯이 혁명 완수를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고지를 가정과 가족으로 지목한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를테면 공산주의 혁명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정복해야 할 고지를 가정과 가족으로 지목한 것은 실로 소름을 돋게 하는 예리한 통찰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 등 이럴 테면 기존의 모든 것을 해체해야 합니다. 공산주의 혁명은 종전의 정치와 경제가 저질러 온 만행에 가까운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착취와 인권 유린이 도를 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을 쉽게 낙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에 가장 부담스러운 걸림돌이 종교 즉 기독교였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공산주의 자체를 종교화하는 것으로 정복할 수 있지만, 기존의 가정과 가족관계를 그냥 두고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상가는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유물론 사상과 철학의 토대에서 기존의 가정과 가족에 대하여 다른 해석을 하였습니다.

엥겔스는 기존의 가정과 가족을 부르주아적 가치관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전제하에 부르주아적 가족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불평등이라는 물질적 기초에 의존하고 있으며, 후자는 단지 침식제공에 대한 대가로서 재산양도의 법적 상속자를 출산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대가를 근간으로 한 시민 계급적 결혼과 부부가 다 같이 임금노동을 통해서 착취당하는 평등한 조건에서 노동자계급을 양성하는 "진정한 성적 사랑" 을 비교하면서, 가정과 가족을 매춘의 한 형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설명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지만, 그러나 이것은 나름 진화론적 인류학에 기초한 가족에 대한 공산주의의 유물론적 설명으로 많은 지식인에게 어필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가족관은 이상적 사회주의를 벗어나서 사회과학적 사회주의의 토대를 나름 공고히 한 이론적 공적이기도 합니다. 가족에 대한 엥겔스의 이러한 설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전통 안에서 공식적 가족 정책의 바탕을 이루었습니다. 옛 소련의 공산주의는 이러한 정책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여성을 생산적 노동에 투입하고 탁아시설의 사회적 배려를 강조하며 일하는 어머니를 찬양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레닌은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남성이 가사 일을 여성과 나누어서 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성해방론자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쿠바의 경우 약간은 발전한 공산주의 가족관으로 남편이 아내와 동등하게 가사와 육아를 분담하도록 가족법의 규정을 바꾸었습니다. 지금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해체되었고 그 위성 국가들도 공산주의를 포기하였지만, 공산당 선언의 가족소멸 주장과 가정의 해체가 새로운 형태의 전략으로 집요하게 추진되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과거의 공산주의보다 더 치명적으로 가정과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들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동성애, 트랜스 잰더, 워키즘, 소수자 인권 보호, 비판적 인종이론, 환경 종말론 등 온갖 분야에 마르크스주의가 진지를 구축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가정과 가족의 해체입니다. 그러한 활동의 구체적 결과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대 젊은이 중에 결혼을 기피하고 자녀 갖는 것을 포기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도 가정과 가족을 해체하려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정작 결혼과 자녀를 포기하는 당사자들인 젊은이들은 그런 선택이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한 자유로운 개인적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의도한 대로 사람들은 정복되고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정복당하고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몽 아롱이 지적한 대로 마르크스의 사상과 철학은 지식인의 아편이 되었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약을 멀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마약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지식인의 아편인 마르크스주의는 미국의 대학과 지식인들을 거의 중독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서방의 거의 모든 나라가 같은 상황입니다. 이와 같은 무신론 사상을 간파하여 대응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지만 아울러 병행해야 할 일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가정의 독점적 이상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누구도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이상을 향하여 가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이상을 어느 정도 성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의 이상을 성취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자기의 이상을 완전하게 성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상이란 인간의 욕망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이 절제되지 않고는 결코 성취될 수 없습니다. 이상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점이고, 또한 그러한 능력 면에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은, 인간이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대개 과학 실증주의와 함께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미래를 낙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도의 개선과 인간 의식의 발전을 통하여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그들의 낙관론은 논리적 사고를 하는 지식인들에게 매우 인상 깊게 어필하게 됩니다. 창조 계와 인간 사회가 철저하게 어떤 법칙에 의해서만 진행된다고 믿는 이들은 좋은 제도와 인간 의식의 진보를 통하여 인간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 즉 정치 경제 등 인간 문화 전반에 걸쳐 보다 나은 개선은 전적으로 인간 능력에 달렸다고 믿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설득력 있게 작용하지만, 비성경적인 인간관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에게 그 자신이 자신에게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소망은 자신 밖으로부터 주어져야 합니다. 한창 인간 이성의 능력이 과대평가되던 때 독일의 그 시대를 풍자하는 재미있는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채를 잡아끌어 올려 스스로를 물에서 건져내려고 하는 그림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건져 낼 수 없습니다. 나 아닌 누군가가 건져주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진보주의는 물에 빠진 자신을 스스로 건져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물에 빠진 인간을 나 아닌 타자(他者), 즉 하나님이 건져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가정과 가족관계에 대한 이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많은 가정의 실패한 모습을 통하여 가정의 이상에 가르칩니다. 이것은 비단 가정이나 가족관계뿐 아니라 전반적인 인간관계를 위한 것입니다. 오거스틴은, 가정은 삼위 일체적 가치 체계에 기초해 있다고 하였으며 로마가 몰락한 것을 가정이 몰락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성욕은 합법적 부부 관계 안에서만 충족되어야 하는데 로마인들은 그것을 무시하였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결혼은 인류를 존속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며,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우신 것인데 쾌락과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 로마의 가정은 몰락하였고 결국 로마도 몰락하게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세워진 가정은 가족 간의 권위와 복종의 조화로운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주장하는 권위를 지녀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내를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로마의 남자들은 아내와 자녀를 지배의 대상으로만 여겼습니다. 성경은 남편이 아내와 자녀를 다스리게 하였지만, 그것은 폭군처럼 다스리라는 뜻이 아니고 보살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듯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러한 가정의 이상은 그 어떤 공동체를 통해서도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가정에만 허락하신 독점적 이상입니다.. 어느 누구도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이상을 향하여 가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이상을 어느 정도 성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이상을 성취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자기의 이상을 완전하게 성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상이란 인간의 욕망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이 절제되지 않고는 결코 성취될 수 없습니다. 이상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고, 또한 그러한 능력 면에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은, 인간이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대개 과학 실증주의와 함께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미래를 낙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도의 개선과 인간 의식의 발전을 통하여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그들의 낙관론은 논리적 사고를 하는 지식인들에게 매우 인상 깊게 어필하게 됩니다. 창조 계와 인간 사회가 철저하게 어떤 법칙에 의해서만 진행된다고 믿는 이들은 좋은 제도와 인간 의식의 진보를 통하여 인간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 즉 정치 경제 등 인간 문화 전반에 걸쳐 보다 나은 개선은 전적으로 인간 능력에 달렸다고 믿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설득력 있게 작용하지만 비 성경적인 인간관에서 비롯되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에게 그 자신이 자신에게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소망은 자신 밖으로부터 주어져야 합니다. 한창 인간 이성의 능력이 과대평가되던 때 독일의 그 시대를 풍자하는 재미있는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채를 잡아끌어 올려 스스로를 물에서 건져내려고 하는 그림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건져 낼 수 없습니다. 나 아닌 누군가가 건져주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진보주의는 물에 빠진 자신을 스스로 건져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물에 빠진 인간을 나 아닌 타자(他者), 즉 하나님이 건져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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