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이방 종교와 기독교5 > 아멘넷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신화와 이방 종교와 기독교5

페이지 정보

황상하2023-02-26

본문

황상하많은 교회에서 목사는 예배를 시작하기 직전에 강단으로 올라갑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맨 앞에 목사가 걸어가면 예배 순서를 맡은 장로가 뒤를 따르고 그 뒤를 이어 성가대가 줄지어 입장합니다. 목사와 성가대가 입장하는 동안 회중들이 일어서는 교회도 있습니다. 목사가 강대상에 올라서면 회중이 앉기도 하고 선체로 예배를 시작하기도 합니다. 강단 위에 있는 의자는 목사나 기도 순서를 맡은 이들이 잠시 앉아서 기다리거나 대기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맡은 이들이 왜 강단 위에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지 그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기가 여간 궁색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예배당 안의 강단은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고 회중이 듣기에 최적화된 시설로 자리매김이 되었지만, 최초 강대상의 의미는 회중의 가장 높은 자리라는 의미였습니다. 처음 예배당이 지어졌을 때 앞 중앙에 제단을 놓았고 그 뒤에 감독의 의자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예배당 안에 유대교 회당 낭독 대를 본뜬 낭독 대와 감독의 의자를 교회 강단으로 바꾸어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강대상은 시간이 갈수록 회중에서 성직자를 분리하는 거룩하고 구별된 높은 자리로 변하였습니다. 중세 말기에는 예배당 안의 이런 의미의 강대상이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의식 중심의 미사가 행해지던 강대상을 성직자의 설교를 강조하는, 교회 건물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시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루터교 교회는 강대상을 제단 앞으로 옮겼고 개혁교회는 제단을 성찬 테이블로 대체하고 강대상을 강조하였습니다. 강대상은 언제나 개신교 교회의 중심이었습니다. 개신교회가 강대상을 말씀 중심의 상징이라고 의미부여를 하지만 강대상의 부작용은 성직자를 비성경적 우월한 위치로 올려놓았습니다. 강대상을 뜻하는 라틴어 암보(Ambo)는 “언덕의 꼭대기”라는 뜻이 있는 Ambon에서 따온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 강대상은 높이 올려져 있어서 계단을 사용하여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같이 강대상이 놓인 위치의 높음은 처음부터 말씀 선포의 유용성보다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가 "교회가 살아 있다면 그것은 강대상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죽었다면 그것은 강대상이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지만, 현실적으로 강대상은 교회를 말씀 중심으로 세우기보다 설교자를 회중과 분리해 구별된 자리로 올려놓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이런 분석과 비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선용하기보다 악용하는 일이 많으므로 잘못될 가능성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교회가 활용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이교적이고 비성경적인 부분이나 영향은 지나치다고 느낄 만큼 비판하고 조심하고 개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뜻이 계시를 통해 드러나고 그를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행하시는 일을 알게 된 인간이 죄인 임을 알고 놀라게 되고 감격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한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고 정의롭고 자비롭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됨과 동시에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한 없는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며 기뻐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배에는 두려움과 기쁨이 융합된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또한, 예배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축제의 성격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드리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그 예배의 구체적 표현은 회중 상호 간의 거룩한 교제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임과 동시에 서로에 대한 역동적 교제로 실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배의 내용을 생각할 때 전통적인 예배당 건축 구조와 예배 내용과 형식은 진정한 예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예배당의 회중석이 강대상을 향하여 한쪽으로 고정된 것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회중이 그 방향을 향하여 앉는 것이 하나님께 향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회중석을 향하여 성가대가 배치된 것은 앞의 설명과 모순을 일으킵니다. 문제는 어떤 고정된 방향이나 장소를 하나님께 향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생각하게 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콘스탄틴이 짓기 시작한 예배당 건물은 강대상의 위치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이 되도록 건축 설계를 하였는데 이는 태양신 숭배의 이교 관습을 교회에 도입한 것이고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이교적으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그 전통을 이어받은 현대 교회당의 회중석은 어쩌면 마주 보는 친밀한 교제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당의 회중석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신약 예배의 역동성에 최적화된 것이 아니라 연극 공연에 최적화된 형태인 셈입니다. 이러한 예배당 구조와 예배 형태는 회중을 예배를 관람하는 구경꾼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회중석(Pew)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포디움(Podium)에서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밑바닥에서 위로 올려진 좌석 또는 '발코니'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회중석은 기독교 역사의 처음 천 년 동안에는 교회 건물에 있지 않았습니다. 초기 바실리카에서는 회중이 예배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서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동방정교 교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서서 예배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와서 영국 교회에서 등받이가 없는 벤치가 교구 건물들에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벤치는 돌로 만들어졌고 벽을 향해 놓였다가 나중에 건물 중앙 쪽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렇게 하여 교회당 중앙에 '네이브'(nave)라고 하는 회중석이 생긴 것입니다. 처음에는 벤치가 강대상을 가운데 놓고 반원형으로 배치되었다가 후에는 바닥에 고정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회중석은 15세기에 와서 일반화되었지만 처음 나타난 것은 14세기였습니다.

18세기에는 상자형 교회 좌석(box pew)이 유행하였습니다. 지금도 뉴잉글랜드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상자형 교회 좌석을 볼 수 있습니다. 상자형 좌석은 개인 전용이기 때문에 작은 방처럼 꾸미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상자형 좌석을 쿠션과 카펫과 여러 액세서리로 꾸몄습니다. 그것을 가정 단위로 팔았기 때문에 개인의 소유가 되었고 그것을 소유한 소유자들의 능력에 따라 화려하고 안락하게 꾸며졌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거기다가 커튼, 쿠션, 손을 올려놓을 수 있는 두툼한 의자, 난로, 심지어는 애완견을 위한 특수 칸막이 등으로 장식하기도 하였습니다. 상자형 좌석 소유자들은 자신의 좌석을 자물쇠로 채워두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상자형 교회 좌석의 옆이 높은 벽으로 되어 있거나 칸막이가 높아서 강대상은 회중이 바라볼 수 있게끔 더 높이 올려졌습니다. 그래서 '와인글래스'(wineglass)강대상이 식민지 시대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나치게 장식된 상자형 회중석은 성직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고 나서 열린 좌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상자형 회중석도 역시 회중의 친밀한 교제를 방해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사회현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신화와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신화와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은 사회와 문화와 정치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문화와 정치적 여과 과정을 거친 신화나 이방 종교는 한층 더 쉽게 교회에 침투하게 되고 교회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들은 미국을 가난해도 계급은 없는 자유의 땅으로 굳게 믿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믿는 이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미국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자유와 평등이 강조되고 어떤 면에서는 보장되기도 하는 사회인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의 건국에 기독교의 정신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노예해방과 여성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인권을 강조한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미국을 이런 면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미국이 흑인 노예는 해방했어도 ‘백인 쓰레기’는 거세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의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는 말이 미국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정체성을 상당할 정도로 통찰한 것은 사실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요 경제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가 파악한 대로 미국에는 유럽과 비교했을 때 사회주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원인을 좀바르트는 “미국은 유럽보다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느 사상가나 사회학자나 정치 경제 전문가보다 현실을 정직하고 예리하게 통찰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은사를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 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 원리로 통찰하면 미국은 ‘가난해도 계급은 없다’라는 말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미국은 과거 사회주의 국가보다 더 사회주의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에 사회주의가 득세하려면 계급이 필요합니다. 옛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부르주아 계급, 귀족 계급과 같은 계급의 자양분이 풍부한 토양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미국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득세하는 것은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계급적 인프라가 형성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미국은 결코 가난은 있어도 계급은 없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한 경향이 점점 심화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냉철하게 파악하고 진단해야 합니다. 미국이 기독교 정신에 의해 건국되었다면 그 책임은 기독교가 져야 합니다. 가난은 있어도 계급은 없다는 미국에서 뼈에 각인되도록 차별을 당해온 이들은 좀처럼 사회주의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청교도들이 지배적이었던 뉴잉글랜드 지역 예배당 안에도 계급은 굳건히 자리를 굳히고 있었습니다. 예배당 안의 개인 소유의 상자형 회중석은 미국 사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계급을 포기하지 않았는지를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신화와 이방 종교와 정치 경제 문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융합하고 세력을 확대하여 교회를 잠시하고 있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아멘넷 오피니언 목록

게시물 검색


아멘넷 시각게시물 관리광고안내
후원안내
ⓒ 아멘넷(USAamen.net)
카톡 아이디 : usaamen
(917) 684-0562 / USAamen@gmail.com
상단으로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