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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이방 종교와 기독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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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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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3세기 이전의 기독교는 안식일을 지켰고 일요일도 존중하였습니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틴 황제가 칙령을 내려 일요일을 로마 제국 전체의 공적인 축일로 삼은 것은 이교도들이 그 날을 태양의 날로 존중하고 있는 동시에 그리스도인들도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틴의 주된 관심은 이교와 기독교 사이의 충돌하는 이해(利害)를 연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감독들도 기독교와 이교도가 같은 날을 존중하고 지킨다면 이교도들이 명분상으로라도 기독교를 채택하는 일이 촉진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교회의 권세와 영광이 더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전에는 누려보지 못했던 권력의 맛에 고무되어 황제에게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이 어느 정도 신성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안식일을 하나님의 거룩한 날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그같은 조치에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황제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서 황제 중심의 로마 기독교화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만약 콘스탄틴의 신앙이 바르고 진실하였더라면 기독교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콘스탄틴의 기독교로의 개종이 많은 사람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교회가 그만큼 이교화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콘스탄틴은 죽을 때까지 태양신 숭배에 집착하였다는 증거들이 많습니다. 그 자신이 일요일을 태양의 날로 불렀고 태양신 숭배를 기독교 신앙과 융합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태양신과 기독교가 너무나도 잘 조화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 둘을 융합시키는 것을 나름 소명으로 여겼을 법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태양숭배와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 있었는가는, 로마의 성베드로대성당에서 발굴된 정복되지 않은 태양의 형상을 한 그리스도의 모자이크가 잘 설명 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콘스탄틴은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여전히 이교 제사장의 총수라는 뜻의 폰티페스 맥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타이틀을 고수했습니다. 15세기에 오게 되면 그와 똑같은 타이틀이 로마 카톨릭 교황의 영예로운 직함이 됩니다. 주후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틴은 그의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헌정하였을 때 그곳을 온통 이방 신전들에서 취한 보물로 화려하게 장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곡식을 보호하고 병을 고치기 위한 목적으로 이교 마술을 사용하도록 장려하였습니다. 콘스탄틴이라는 한 인간의 가치관과 왜곡된 신앙이 교회 형성에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황제 콘스탄틴은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많은 역사적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사도들의 교회를 건축했을 때 십이사도의 기념비들을 세웠는데 그 12개의 기념비가 한 개의 무덤을 중앙에 두고 에워싸는 형식으로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은 바로 콘스탄틴 자신을 위해 예비한 무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자신을 13번째 사도인 동시에 사도들의 우두머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는 이교의 죽은 자 숭배를 교회에 도입하고 그 자신이 죽은 자를 숭배였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숭배를 받는 죽은 자 중 중요한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동방정교에서는 실제로 콘스탄틴이 성인으로 추앙받으며 13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사자 숭배뿐만이 아니라 물건과 장소가 신성하다는 개념을 이교와 유대교에서 끌어왔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자의 유품 판매가 성행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콘스탄틴 때문입니다. 또한, 콘스탄틴은 이교 성지의 모델에 기초를 둔 거룩한 장소의 개념을 기독교 신앙에 도입한 사람입니다. 그의 그러한 영향으로 6세기에 오면 교회가 팔레스타인의 땅을 신성한 땅 즉 성지(Holy Land)로 만들게 됩니다. 콘스탄틴이 죽자 교회는 그를 '신격 존재'로 공포하였습니다. 이것은 콘스탄틴 이전에 죽은 모든 이교 황제들을 위한 관습이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를 이교의 신으로 공포한 것은 로마의 원로원이었습니다. 로마의 최고 기관인 원로원이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같이 콘스탄틴의 영향력과 그를 둘러싼 이교와 기독교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의 정치인들에 의해 중세 교회는 초대교회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콘스탄틴의 어머니인 헬레나(Helena)라는 여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헬레나는 그야말로 사자의 유품에 가장 중독된 사람입니다. 326년에 그녀는 팔레스타인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327년에 그녀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못 박는 데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십자가와 못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온 나무 조각들에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사상은 콘스탄틴이 조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콘스탄틴은 이교의 마술 사상에 사로잡힌 인물이었습니다.

327년에 있었던 헬레나의 예루살렘 여행에 이어서 콘스탄틴은 로마 제국 전역에 처음으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교회 건물 중 어떤 것은 공적 자금으로 건축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 건물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교회 건물을 짓는 데 있어서 온갖 이교의 방법이 다 동원되었습니다. 예배당 안에 많은 성인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이는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전에 신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요즘 말로 표현하면 패러디한 것입니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성인들을 기리며 예배하고 식사를 나누던 묘지들 위에 최초의 교회 건물들을 건축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예배당이 성인들의 시신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수많은 거대한 예배당이 성인들이나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배당 건물에 온갖 이교의 관습과 제도와 신앙의 형태가 도입되고 이교의 예술품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성인들은 신과 같은 능력을 지녔다고 믿었는데, 이 또한,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전에 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고 믿은 것을 그대로 따라 한 것입니다. 죽은 성자에게 기도하는 교회의 풍습은 이러한 배경에서 온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상을 전적으로 받아들였고 교회가 그렇게 이교화 하자 그리스도인이 죽은 성자에게 기도하는 전통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성지로 가장 유명한 곳이 바티칸 언덕 베드로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곳에 세워진 성베드로대성당입니다. 성 바울 대성당은 바울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곳에 세워졌고,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는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곳에 세워졌으며, 베들레헴의 예수 출생교회는 예수님이 탄생한 동굴로 여겨지는 곳에 세워졌습니다. 콘스탄틴은 로마에 아홉 개의 교회 건물을 건축했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과 콘스탄티노플에도 여러 개의 건물을 세웠습니다. 교회 건물들은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되었을 뿐 아니라 거룩한 장소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정결 의식을 거쳐야 했습니다. 4세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씻을 수 있도록 구약의 성전처럼 밖의 뜰에 세면대를 세워 놓았습니다.

콘스탄틴의 통치 아래에서 지어진 교회 건축물들은 로마의 바실리카(basilica) 모델을 본뜬 것인데, 바실리카는 그리스의 이교 신전들을 모방하여 설계된 로마의 일반적인 정부청사 건물이었습니다. 바실리카는 오늘날의 중고등학교 강당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공연을 구경하는 수동적이고 고분고분한 관객들에게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콘스탄틴은 그러한 용도의 바실리카의 모델을 예배당 건축 모델로 선택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태양신 숭배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 모델을 선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실리카는 연설가가 청중을 향했을 때 햇빛이 그에게 비취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들처럼 기독교 바실리카들도 외관 앞의 정면이 동쪽을 향하도록 지어졌습니다. 기독교 바실리카의 내부는 로마 행정관과 사무관들이 사용하던 로마 바실리카의 정확한 복사판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바실리카에는 성직자가 올라가서 의식을 집전하는 우뚝 솟은 단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단에는 여러 개의 계단이 부착되어 있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분리하는 가로막 또는 스크린이 있습니다.

그 외에 교회 건물 안에 그리고 교회 신앙의 규범들에는 이교에서 가져온 물건과 형식과 제도와 정신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교회가 초기에 이교와 세상적 방법들을 도입하였다고 하여 무조건 부정적으로 배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교적 정신으로 그런 것들을 복음으로 개혁하고 하나님 나라에 맞게 고쳐 사용할 수 있지만, 교회는 이교와 세상적 영향에 대해 무리하게 합리화하려 하지 말고 정직하게 평가하고 판단하여 주님께서 세우려고 하셨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모든 지혜와 충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눅 20:17,1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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