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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믿음, 두 가지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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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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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보수적인 기독교는 청교도들의 장점을 치켜세우려는 노력에 눈물겹도록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경건한 청교도들의 신앙을 계승 하려는 노력은 장려할 일이지만 그런 노력 자체를 기독교의 핵심 명제로 삼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참 경건은 개인은 물론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청교도 신앙을 추앙하는데 집착하는 동안 개인과 사회는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복음이 되어 교회를 잠식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였습니다. 미국의 기독교가 자유 민주주의 나라를 세우고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원주민들에 대한 폭력과 노예 제도에 대해 지지하거나 합리화 하고 묵인하였습니다. 미국의 초기 개척자들이 청착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살해하고 몰아내는 일과 노예제가 정착되어 수많은 인권 유린이 자행된 사실들이 왜곡되고 미화되기까지 하는 과정에서 청교도들의 역할은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하였습니다. 미국이 독립 후 거의 한세기가 지나서야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노예제도의 폐지도 성경이 가르치는 순수한 윤리적 가르침에 의한 것이기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유와 공업이 발달한 북부에서 노예제도가 남부처럼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 후로도 한세기를 더 지나는 동안 미국 지배계급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는 사라지지 않았고 1960년대까지 사적 형벌인 린치가 공공연히 자행되었습니다. 사적 형벌 관행은 사법적 제도 안에까지 고질적으로 남아 있어 법정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들의 반 이상은 억울한 경우였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사법 제도에는 배심원 제도가 있어서 국민이 사법적 판결에 참여할 수 있는데 억울하게 사형 언도를 받은 이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교회, 특히 청교도들의 순수한 신앙이 미국 건국의 과정에서 정치 교육 문화 등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면은 지대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교회의 순순한 신앙은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기시작하였습니다. 할리우드가 정의로운 카우보이와 미개하고 악한 아메리카 원주민들간의 싸움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고, 또한 게으르고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흑인과 정의로운 보안관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아메리칸 드림을 선전하여 미국인들과 세계 인들을 현혹하였습니다. 이것이 200여 년이 넘게 미국을 지배해 온 이데올로기입니다.

세계로부터 수많은 이들이 이러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민 물결을 이루어 미국으로 몰려왔지만 그들 역시 미국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일조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민자들은 어떤 면에서 자신들을 떠나게 한 고국의 희생자들로 본토를 떠나 미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민이란 것은 미지의 세계로의 도전이기도 하지만 조국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집단적인 투쟁을 단념한다는 것을 뜻하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와 자수성가로 맞바꾸었습니다. 제3세계에서 "개인적 성공"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던 이민자들이 그것을 가능한 현실로 경험하게 되자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역할을 기꺼이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지나치리만치 미국 시민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교회와 이민자들은 바로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하나님 나라와 멀어지는 아메리칸 드림의 이데올로기인 것을 감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아메리칸 드림과 복음이 약속하는 하나님 나라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 결과가 대학과 언론과 정치와 기업과 문화 예술까지를 모두 신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내어 준 것입니다. 미국의 교회와 자유민주주의가 아메리칸 드림 이데올로기에 취해 있는 동안 적들은 미국을 거의 잠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가정과 교회를 해체하려는 작업이 구체적 교육 내용으로 가르쳐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명령으로 세우신 거룩한 혼인의 제도가 부정되고 남녀의 구별이 철폐되고 동성결혼이 합법화 되고 낙태와 성전환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럽에 비해 미국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덜 받았지만 신흥국 미국의 지배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과학이 사회 명운을 결정한다는 잘못되고 단순한 신조가 나타났습니다.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게 된 것 역시 과학이 미국 이데올로기의 두드러진 특성중 하나 입니다.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게 된 것은 인문사회과학을 순수 과학으로, 순수 경제학을 정치경제학으로, 유전자 과학을 인류학과 사회학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인류학과 사회학의 이 불행한 변이(變異)는 당대 미국의 이데올로기와 나치 이데올로기간의 또다른 긴밀한 접점을 형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흔히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의 전 역사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에 의해 조장된 것입니다. 과학을 바라보는 이같은 기묘한 시각에서 비롯된 또하나의 학문적 변이는 "빅뱅" 이론 같은 우주론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착입니다. 계몽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융화시키려는 미국인들의 물리학은 우주 전체에 대한 과학이 아니라 연구 대상으로 꼽을 수 있는 우주의 어떤 특정한 측면에 관한 과학이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미국식 사고 체계는 근대적 과학 전통이 아니라 신앙과 이성의 화해를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른 신학에서 빗나간 이러한 태도는 청교도들의 순수한 신앙과 경건을 왜곡된 믿음 즉 미국식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켰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을 이데올로기로 왜곡시킨 것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정직한 구약의 선지자들의 삶은 실존적으로 치열하였습니다. 그들 중에서 실존적으로 예레미야를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 주전 587년 이전 40년간 선지자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제국들의 각축이 심각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의 국력은 점점 쇠퇴하고 있었고, 바벨론이 신흥 제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애굽이 제국으로서 패권을 잡을 기회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지정학적으로 세 제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생존이 위태로웠던 때에 예레미야는 활동하였습니다. 나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그 위기의 때, 주전 609년에 유다의 존패를 좌우할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애굽의 군대와 싸우던 요시야 왕이 전사했습니다. 요시야는 유다 역사에서 보기 드문 개혁적인 왕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을 지지하면서 그와 함께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왔는데 요시야의 죽음으로 절망적이 되었습니다. 요시야가 애굽과의 전쟁에서 죽은 이후 유다 왕들은 애굽 제국이나 바벨론 제국의 왕에 의해 지명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유다 백성들의 자부심에 처참한 손상을 입혔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위태롭고 정체성이 혼란스럽고 불안한 때에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지혜롭고 리더십이 강하고 존경받는 왕이 통치를 하든지, 또는 왕을 중심으로 한 고위 정치인들의 집단 지성을 통해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시야 왕 이후에 유다에는 백성이 믿고 따를 만한 왕이 없었고, 국제 정세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신있게 제시하며 백성을 이끌어갈 만한 왕족이나 귀족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지자 예레미야와 하나냐가 공개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2년 안에 유다의 어려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준다고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잡혀간 이들이 다 돌아오게 될 것이고 그들이 빼앗아 간 모든 성전 기구도 돌려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렘 28:4). 유다 백성들은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하나냐의 메시지를 듣고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거짓 선지자라고 비판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렘 28:15). 두 선지자가 서로 상충하는 메시지를 선포 하였고 서로 상반된 정치적 견해를 보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고 하나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선포하였습니다. 유다 왕과 귀족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냐 선지자의 메시지를 좋아하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때에 백성을 위로하려는 하나냐도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오는 때에 위로의 메시지를 선호하는 백성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성은 국내외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자신들에게는 그런 난국을 헤쳐나갈 힘이 없는 상황이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하나냐의 설교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인지상정인데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계속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미워하고 비난하며 위협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레미야는 철저하게 왕따를 당하였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유다 백성들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해서 그들의 마음을 더 불안하고 심란하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거짓 선지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의 거짓 가르침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두 가지 종교 이데올로기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열광적인 신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 건축의 규모와 종교적 위압감이 압도적이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웅장하고 거룩한 성전 안에 들어가면 마치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으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이나 유럽의 크고 웅장한 성당에 들어간 여행객들이 숙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과 같은 느낌일 것입니다. 현대 대형 교회 예배당내서도 열정적으로 복음찬송을 부르고 율동과 워십 댄스를 곁들이는 짙은 감성적 분위기에 휩싸이거나 심야 집회에서 주여 삼창을 외치는 기도회에 참석하면 영혼이 업그래이드 되는 듯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집회에서 경험하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인 카타르시스일 수 있습니다. 깊은 영적 분위기가 아니고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라고 하여도 그런 경험을 무조건 매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교회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인기 스타나 인기 그룹들의 노래와 쑈에 몰입하여 환호하며 즐기는 현상과 비슷한 효과를 교회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무조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한순간일 뿐입니다. 그런 경험은 현실로 돌아가 이전투구로 돌아가는 세상을 거스를 힘을 발휘하게 못합니다. 교회에서 감성적으로 그런 경험에 중독된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울화가 치밀게 하는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문제 의식 없이 지냅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울화가 치미는 젊은이들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더 나쁜 것은 불법과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보고도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는 경우입니다. 심지어 목회자들 중에도 별 의식이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님 나라와는 별 상관없는 유치한 문제들에 빠져서 낭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은 무신론과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는데도 노회나 총회로 모여서 그런 문제를 언급조차 안 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시대의 성전 중심의 이데올로기 신앙입니다.

그 다음은 열광적인 태도의 신앙인데 이는 이방종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에도 열정과 깊은 감동이 동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모든 집회가 다 열광적이지 않고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감성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모일 때마다 열광적인 종교 집회는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의 절대화와 열광적 신앙에 몰입함으로써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하나냐라는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냐는 사이비 선지자입니다. 유대 왕을 비롯한 귀족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에 집착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볼 때 그들이 어떻게 될지 불을 보듯 분명하였습니다. 일상의 삶으로 이야기하면 매일 군것질만 하거나 술에 찌든 사람의 육체 건강이 어떻게 될지를, 그리고 인기 드라마만 보는 이들의 정신 건강이 어떻게 될지를 예측할 수 있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날마다 컴퓨터 게임에만 빠져 있는 학생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언하는 선지자는 아니지만 그런 이들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를 예고할 수 있습니다. 율법적이고 화려한 성전 제사로 안도하는 신앙과 바알 우상자들의 특징인 열광적 종교행위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왜곡된 신앙이고 일종의 이데올로기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영적 생명의 풍성을 누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데올로기를 믿는 것으로 거짓 안도감에 빠져 있는 현대 기독교를 향하여 예레미야는 심판을 선포합니다. 영적 생명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풍성해 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관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에 참여하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이성을 하나님을 알고 선을 행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렘 4:22, 호 6:3, 벧후 3:1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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