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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3-노예 해방과 제4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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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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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미국은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 불리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인종적, 국가적 갈등을 겪어왔습니다. 영국,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동유럽, 극동으로부터 온 이민자들은 자신들보다 먼저 온 이민자들로부터 무시를 당해왔습니다.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은 가장 먼저 이 땅에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 온 자들에 의해 무시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끼친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큰 인종 문제는 노예의 후손인 흑인들과 노예를 소유했거나 노예제를 묵인했던 이들의 자손인 백인들 사이의 문제입니다. 미국의 노예 제도의 역사는 백인과 흑인 사이의 적대감을 만들었으며 이후의 역사를 통해 이 긴장은 더 높아졌습니다.

노예제로 인한 백인과 흑인의 갈등과 긴장은 노예주들의 잔혹한 처우에 대한 흑인들의 반발보다는 노예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하고 노예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몇몇 백인들의 주장 때문에 점점 심화하였습니다. 노예 해방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백인들이 없었다면 노예 해방은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노예제에 대한 기독교의 잘못과 책임이 큰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노예제 폐지 운동(Abolitionism) 또한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비롯한 것도 사실입니다. 19세기에 서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노예 제도의 폐지 운동은 기독교 사상의 토대에서 비롯된 인도주의적 개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세기에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최초의 노예무역을 시작한 이래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노예 시장화 시켰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성공회 평신도이자 국회의원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가 감리교창시자이자 성공회 신부인 존 웨슬리의 지지에 힘입어 노예 제도의 폐지를 추진함으로써 1807년 노예무역이 폐지되었으며, 1833년에는 대영 제국 전체에서 노예 제도가 사라졌습니다. 유럽에서의 노예제 반대 운동은 근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교도소 재소자들의 인권 향상, 주일학교 운동, 아동 노동 반대 등과 더불어 실천하던 기독교 사상에 따른 사회개혁 중 하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사회개혁에 대한 열정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등장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사회 참여를 통해 드러내기보다는 개인에 한정 지어서 이해하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교회는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기존 질서가 아무런 변혁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는 데 이바지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노예 해방에 대한 투쟁은 지속하여 1840~1850년대에 거의 모든 유럽 국가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남부 목화 농장에서 농업에 필요한 인력으로 흑인 노예들을 이용했기 때문에 노예 제도는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목화 농사가 지역경제의 중심이기 때문에 노예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부에서는 1831년 흑인 내트 터너(Nat Turner)가 백인 지주의 억압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내트 터너 봉기 이후 노예 단속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북부에서는 흑인들을 저임금 공장 노동자로 흡수하려는 자본가들에 의해 미 노예 제도 폐지 협회(대표 윌리엄 개리슨)가 중심이 되어 노예 제도 폐지를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노예 제도 폐지 논쟁은 자본주의가 발달한 북부와 농업 경제가 발전한 남부 간의 심각한 지역감정으로 치달아 남북 전쟁이라는 내전이 일어나기에 이르렀습니다.

노예제 폐지와 반대는 기독교 안에서도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기독교 근본주의 전통의 남부 개신교 신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노예제에 찬성하고, 진보적 신학 전통을 가진 북부 개신교 신자들은 성경을 역사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상황적 해석을 함으로써 노예제에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근본주의나 진보적 신학의 성경 해석은 바른 성경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초기의 노예제 폐지 운동은 대중적 지지 기반의 결여로 1837년 러브조이 암살 사건 등 탄압도 적지 않았으나 1852년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의 소설《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대 인기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였습니다. 1860년의 대통령 선거 결과 국회의원 시절에 노예제를 악의 제도라고 비난했던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자 이에 반발한 남부 11개 주의 잇따른 연방 탈퇴로 남북 전쟁(1861-1865)이 일어났습니다. 1863년에 공포된 노예 해방 선언은 1865년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발효되어, 미국 내의 흑인들은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 노예 해방은 북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자본가(부르주아)들이 흑인들을 저임금 노동자로 흡수하기 위해 노예 해방을 주장한 북부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남부에서는 과격 비밀 결사 단체 쿠 클럭스 클랜 (Ku Klux Klan; KKK) 등의 보수적인 남부 잔당들이 흑인들을 탄압하였습니다. 북부의 흑인들도 신분은 해방되었으나, 상당수가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자본가들에게 종속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해방된 노예나 노예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 진정한 노예 해방에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 노예였던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돌려 보내 주거나 “40 에이커와 노새-40 Acres And A Mule"를 주겠다는 배상의 약속이 링컨 대통령이 죽자 파기되어 버렸으며 교육받지 못하고 재산이나 심지어 가족 관계도 끊어져 버린 이전의 노예들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법과 법정의 용인하에서 미국 사회는 분리되고 평등하지 않은 학교, 거주지, 다른 시설 등에 흑인을 보내도록 차별하였습니다.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제도적으로 지속하였습니다. 흑인들은 사회적 분리 방식으로 차별을 당하였습니다. 이 분리는 때로 폭력적인 린치를 동반하기도 하였습니다. 1954년에 학교 분리는 공식적으로 끝이 났으며 이후에 시민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누구에게나 투표권이 보장되었고 사람들은 공적 시설에서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했습니다. 인종차별 폐지, 심지어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은 시장의 원칙이 되었으며 여러 산업은 자신들의 상품과 서비스의 중요한 고객인 흑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흑인들에 대한 비공식적인 불신과 경멸을 포함한 인종차별은 여러 분야에서 지속되고 교육적 성취와 경제적 성취에 있어서 인종적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문맹률, 결손가정, 그리고 범죄율은 백인보다 흑인이 월등히 높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노예, 분리주의 정책, 차별의 잔여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보수주의자들 중에는 과거 역사를 핑계로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두 주장은 모두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노예제, 분리주의 정책 그리고 차별은 사람에 대한 끔찍한 범죄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으며 또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백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역사에 대해 어떤 형태로건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인종차별이나 노예제나 그 어떤 문제라도 제도 개혁만으로는 완전하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이 노예 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사려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노예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에베드(עֶבֶד)이며 헬라어는 둘로스 (δοῦλος)입니다. 이 단어들은 자주 "종"(servant)이라고 번역되며 아주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종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고용 된 형태를 나타내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언약에서 봉신 역시 "종"이라고 불린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언약은 종과 주인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종입니다(레 25:55).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나의 종"이라고 말씀하셨고(민 12: 7-8; 수 1:2), 바울도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혔습니다(롬 1 : 1). 또 그는 교회의 종입니다(고전 9:19).

구약에서 정복된 백성들은 도망치거나 자신의 자유를 사지 않는다면 평생 노예가 될 형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노예로 삼을 수 있는 경우는 약속의 땅을 넘어서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신 20:15)에 적용이 됩니다. 약속의 땅 안에서는 노예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도시들에 사는 이들은 모두 죽여야 했기 때문입니다(신 20:16). 자신들이 거룩한 땅에서 멀리 산다고 이스라엘을 속인 후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한 기브온 족속들의 운명은 노예가 되는 것이었고 기브온 족들은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주변의 나라들이나 이스라엘에 사는 외국인들로 이방 노예를 사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레 25 : 44-46).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노예를 "기업으로 주어 영원히 소유하게"하였습니다(레 25:46). 정복한 나라에서 노예를 끌고 오는 것은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이것은 거룩한 전쟁의 부산물이었습니다(신 20 장 참고). 이 노예들은 노예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이스라엘의 율법의 자비로운 조항 아래 놓이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넷째 계명이 가족과 마찬가지로 노예들에게도 안식하게 할 것을 명령했다는 점입니다. 율법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인들 또한 애굽에서 노예였음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노예를 대할 때는 이웃 나라들이 하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은 도망친 노예를 전 주인에게 돌려보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신 23 : 15-16). 그리고 만약에 주인이 노예를 때려 눈이나 이를 잃게 한다면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출 21 : 26-27).

성경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노예는 안식년이나 희년에 자유 하게 되었고 모든 노예는 품꾼이나 동거인처럼 대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빌몬에게 돌려 보내면서 형제처럼 대할 것을 권고합니다. 성경이 비록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 원리가 실천되는 관계와 상황에서 노예는 은총과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제도적으로 노예제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노예적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할 때 노예제 아래에서 주인으로부터 형제처럼 대우받는 노예는 행복한 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으로는 악한 제도까지도 폐지할 것이지만 인간의 죄가 가득 차고 제도가 열악하여 갑작스러운 제도의 개혁은 약한 자를 더욱 곤란하게 할 수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세심하고 자비로운 배려로 악한 제도 아래서 은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빌 1: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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