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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7-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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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일어난 장 칼라스 사건은 공권력이 법을 무시한 체 무자비한 폭력으로 행사된 세기적인 사건입니다. 성실한 개신교도 칼라스는 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대립이 지배적이던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모범적인 가장으로 평온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1762년 5월 9일, 그의 큰아들 마르크 앙투안이 삶을 비관한 끝에 목을 매 자살합니다. 이 사건을 보려고 모여든 군중들 가운데 누군가가 칼라스의 큰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기 때문에 가족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런 소문은 신교도에게 적대적인 맹신적인 가톨릭교도가 대다수인 툴루즈 시민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여론에 격앙된 시에서는 아무 증거도 없이 칼라스 가족을 체포했습니다. 재판관들이 칼라스 가족에게 반복하여 가혹한 고문을 가하자 칼라스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한 뒤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끝까지 범행을 부인한 칼라스는 끔찍한 거열형으로 처형됩니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이 불법적이고 폭력적이며 잔인한 고문에 의해 조작된 재판이 철학자 볼테르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고 사건이 일어난 3년 후 1765년에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되었습니다. 볼테르의 관용론은 칼라스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된 역작입니다.

 

장 칼라스 사건은 이탈리아의 젊은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법은 자유로운 사람 사이의 대등한 계약이어야 하지만 당시의 법은 소수의 지배계급의 욕망을 채우는 야만적 도구에 불과하였습니다. 이에 체사레 베카리아는“법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형벌은 오직 법률을 통해서만 규정할 수 있으며 법관은 법규를 적용할 권한은 있어도 그것을 해석할 권리는 없다.”는 죄형법정주의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는“재판관이 판결하기 전에는 누구도 유죄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무죄추정의 원칙(無罪推定의 原則)이 되었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피고인이 유죄로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원칙입니다. 이곳 미국에서는 이런 법 정신이 ‘benefit of doubt’라고 하는 사회적 덕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베카리아는 범죄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형벌의 잔혹성에 있지 않고 법 집행의 정확성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764년에 체사레 베카리아가 세상에 내 놓은 『범죄와 형벌』이라는 책은 지금까지 인도주의적인 형사정책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고전이 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처음에는 익명으로 출간되었지만, 세상에 나오자마자 수많은 계몽 사상가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볼테르는 이 책을 '형사절차에 있어 인권장전'이라고 격찬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책은 당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정당화 되었던 잔혹한 형벌과 고문 등의 형사정책들에 지대한 도전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형사정책에 대한 논의에서는 논거의 토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베카리아가 품었던 이상은 오늘날 형법의 근본원리인 죄형법정주의로 구현되었습니다. 베카리아의 죄형법정주의란 모든 범죄는 법률에 규정된 경우에만 처벌할 수 있다는 원칙으로 오늘날의 법률주의, 유추해석 금지, 적정성의 원칙, 소급효금지의 원칙의 형태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베카리아는 당대에 주류적이던 사회계약설에 기초하여 국가 형벌권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사회계약설이란, 모든 인간은 천부적인 권리들을 갖고 태어난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이론입니다. 하지만 홉스가 말했듯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개인은 자발적인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를 형성하고 국가에게 자신들의 권리의 일부를 양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천부적 권리들을 보장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원리 속에서 국가 형벌권의 정당성의 토대를 제시하였습니다. 국가가 국민 개인들로부터 권리의 일부를 위임 받아 대신 행사하는 것이 형벌권이기 때문에 위임 받은 권한 안에서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생존했던 18세기까지만 해도 국가 형벌권은 전제군주와 소수의 귀족들에 의해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범죄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명확하게 기록된 법률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베카리아가 제안한 이론들이 대부분 오늘날 사법체제에 구현되고 있는 것을 보아 그의 이론들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 가치에 토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법의 정의는 강조되지만 전제 군주나 지배계급에게 권력이 집중된 형편에서는 법이 정의롭게 집행되는 것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법이 엄격해도 법을 집행하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게 힘이 집중되어 있다면 그들은 법을 임의로 해석하여 적용하게 되고 그것을 합법과 법의 정의라고 주장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그러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권력과 책임을 분산시켜 놓은 것인데, 과거에는 전제 군주와 봉건 지배계급이 힘을 독점하였지만 현대에는 언론과 군중이 지배적 세력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군중의 힘이 이성적으로 작용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군중이 직접 힘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대의 민주주의입니다. 대의 민주주의로 직접민주주의의 폐단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언론의 힘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는 셈입니다. 대한민국의 상황은 직접 민주주의적 방법을 추구하는 군중과 통제 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언론이 연대하여 지금의 사태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볼테르의 관용론도 베카리아의 죄형법정주의도 무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볼테르의 관용론이 봉건적 지배세력과 다수의 광신적 가톨릭교도들의 폭력이 왜곡하고 조작하여 약한 자들에게 저지르는 만행을 저지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볼테르의 관용론은 지금도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효과적인 이론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용론이 무신론과 맞닿아 있어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칼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오랜 시간과 많은 시행착오의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야 그 한계와 폐해를 깨닫는 어리석은 역사를 되풀이 하게 될 것입니다.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이 현대 사법체계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지대합니다.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그 책이 나온 이래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국가의 법이 폭력으로 작용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세운 것이나 고문이 야만적 행위라고 비판한 것은 지금도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의 주장의 상당부분을 그리스도인들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그의 사형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이들도 많고 나 역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카리아가 그렇게 강조했고 현대 거의 모든 국가가 받아들이고 있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처럼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이나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외국에 나가 있는 외교관들은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을 궁금해 하는 외국인들에게 설명하기가 매우 난처합니다. 현대 국가의 사법체계에 대한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대한민국은 법정에서 판결이 나지도 않은 사건을 정치권과 군중과 언론과 검찰과 지식인들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하고 피고인을 범죄자로 전제하고 취급하고 있습니다. 배울 만큼 배운 앵커나 기자들이 증인이 증언하는 말을 예단하여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표현을 천연덕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표현은 피고의 말이 객관적 증거에 의해 거짓임이 밝혀지거나 유죄 확정판결이 있은 후에나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외국에서 볼 때 지금의 대한민국 사태는 사법 체계의 기본도 갖춰지지 않은 미개한 야만 사회처럼 비춰지고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수많은 대한민국 외교관들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너희 나라 왜 저러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고 그 질문에 어떻게든 설명을 해야 할 텐데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할지 안쓰러울 뿐입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외국에 나와 살고 있는 동포들이나 외교관들은 조국에 대한 자긍심은커녕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내심 폄하하게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 지은 자를 법으로 처벌하는 형벌이 정의롭게 시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사람들이 배우게 되었지만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그 명령이 성경에 기록되기 전에 이미 사람들이 그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21:24, 25절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고 한 것은 반드시 보복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형벌도 일종의 보복인데 그 보복이 정의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명령입니다. 남의 눈 한 쪽을 상하게 한 사람은 그의 눈 한 쪽만 상하게 하는 처벌을 받아야지 양 쪽 눈을 다 상하게 하는 벌을 받게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피해를 당하면 자기가 당한 몇 배의 복수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러한 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의롭고 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변화보다는 강제에 의한 통제가 더 효과적입니다. 상대적으로는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의 변화가 가능하지만 법적 정의나 사회적 질서를 성숙한 인간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강제적인 법의 통제를 따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참 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나아가 인간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지식은 어리석은 지식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를 강조했는데,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는 주장은 경험론을 낳았고, 과학적 방법의 토대가 되었으며, 그 결과 자연과학은 한없이 오만하게 되어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론은 아무리 탁월해도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이롭지 못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만큼 아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이 폭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미개한 시대에만 자행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도로 발달한 21세에 그물망처럼 촘촘한 법망을 통해서도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될 수 있습니다. 어떤 형벌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한 사회가 최소한 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때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약자가 보호 받을 수 있으며 약자가 보호 받아야 강한 자의 안녕도 보장되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 출 21:24,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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