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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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8-07-3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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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산업화 이후 경제에 대한 논의는 점점 정치적 이슈화가 되었습니다. 즉 경제에 대한 논의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다룰지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경제가 정치적 이슈로 다루어질 때 정부가 산업 개발을 주도하고 그 결과를 통제하는 정부의 역할이 확대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경제 문제는 한 국가나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운 양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통제하기 어려운 경제구조는 단순히 인간의 경제활동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욕구를 확대 증폭시킵니다. 자본주의 아래서 경제활동의 자유가 보장될수록 경제 발전은 인간 사회 어느 분야에서든지 소홀히 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다른 모든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종속되게 됩니다. 교회가 복음을 기복적으로 왜곡하게 된 것도 그와 같은 영향 때문입니다. 정작 교회는 경제의 위력에 편승하여 복음까지 왜곡하였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많은 신학자들은 신앙과 경제활동을 이원론적으로 설명하고, 경제적 발전을 인간의 무제한적 탐욕의 형태로 이해하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경제를 이렇게 이해할 때, 만약 하나님께서 직접 경제적 문제에 개입하신다면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보다는 사회주의적 경제, 이를테면 정부 통제적 경제구조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자유 시장경제 자체를 거부하는 신학이나 이념보다 그것을 윤리적으로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쪽으로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유시장경제체제는 사회주의 체제보다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 조건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인격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경제와 도덕 사이의 교차점에 자리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한 인격 개념 안에 자유, 책임, 창조성, 소유권, 수요 등이 포함되며, 이러한 개념들은 경제와 도덕 영역 모두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원리적으로, 자유시장경제는 인간의 본성을 존중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공정한 사회구조를 형성하도록 하는 많은 가치와 행위들을 고양합니다. 성경은 사유재산을 인간의 합법적 권리로 인정하며, 인간의 청지기적 사명과 사랑의 개념은 그러한 구조 안에서 자발적 미덕을 형성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게 됩니다. 자유시장경제는 각 개인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이 가진 소유를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전제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당신에 대한 의무에서도 강제하지 않으시고 자발적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제사와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 서로를 위하는 선행과 미덕도 정부나 권력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으로 이루어지도록 보장하는 체제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유가 보장되는 체제 하에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에 부응하여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에서 노동이 인간 타락의 결과라는 전제를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려 깊지 못하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근거는 창세기 3장 17-19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타락 후에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이 그런 생각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이 타락의 결과이고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 대한 통시적 이해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이미 타락 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 일은 창조 때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 형상의 일부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일하는 존재로 창조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천지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 45:7)고 하셨고,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사 65:17)라고 하셨고,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사 65:1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 같이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일과 섭리하시고 다스리시고 돌보시는 일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일에 참여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도“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심으로서 당신의 하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하나님 나라 백성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여기 “경작하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갈다, 경작하다, 고안하다, 생각해내다, 고치다, 보살피다 등의 여러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로부터 문화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땅을 경작하여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가꾸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에덴동산은 낙원이었지만 저절로 유지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일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영적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은 영적 생명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락은 인간의 일을 수고로움과 괴로운 것으로 왜곡시킨 것이지 타락 전에 없던 일이 죄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인간의 일은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을 동반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수고한 만큼의 결실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때문입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일이 왜곡되었지만 일 자체의 기능과 목적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타락 전에도 인간은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고, 타락 후에도 여전히 인간은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드러내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성경적 인간관에서 일하지 않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일하지 않는 인간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타락은 수고한 만큼의 결실을 얻지 못하게 하였지만 인간의 모든 필요는 그 수고의 노동을 통해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인간도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편승하여 선한 욕망으로 발전을 이루며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욕망까지 왜곡되어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따르지 않고 이기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따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이기적인 욕망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이 선한 욕망을 따라 사는 일에 늘 실패하고 이기적 욕망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통하여 더 풍성한 결실과 더 나은 발전을 이루게도 하시는 것은 일반은총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살아 상당한 보응을 받기도 하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아래서 그 욕망으로 인하여 더 나은 풍요를 누리고 발전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시듯이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도 일반은총의 방편으로 사용하십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에너지로 하여 작동하는 제도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일찍이 그 사실을 간파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교과서인 그의 국부론의 요지는, 첫째 인간은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투자하지 않고, 둘째 생산된 이익을 내 소유로 취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어야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경제활동에서 자기 소유에 대한 보장이 없다면 최선을 다하여 일하지 않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분배의 문제는 최대의 생산을 이룬 이후의 문제입니다. 분배의 문제로 인하여 투자와 생산을 위축시키는 것은 분배할 이익 자체를 위축시키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도 수많은 모순과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하여 보완되고 개혁되어야지만 정부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억누르고 시장의 기능을 무시하여 생산물의 가격과 임금을 조종하게 되면 경제는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1973년대 초에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중화학 발전을 위하여 집중적으로 투자하였지만 거의 모든 나라들은 한국처럼 발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모든 다른 나라들은 정부가 경제와 산업을 주도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없었고 한국은 경제문제를 소위 장사꾼들에게 맡겨서 획기적으로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경제, 즉 장사를 공무원들에게 맡겼던 나라는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정부와 공무원들과 경제학자들은 장사꾼들의 뒤를 봐주는 역할을 잘 하면 되는데 사회주의 경제는 그 역할을 소홀히 할 뿐 아니라 정부나 공무원이나 경제학자들이 경제를 주도하게 되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무원이나 교수들은 안 되는 것과 불가능이 많아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사꾼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특히 한국 경제 성장에서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같은 이들에게는 정부가 뒤를 봐주었기 때문에 불가능이 없었습니다. 자유 시장경제란 장사꾼이 마음껏 장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렇게 장사꾼들을 독려해서 기술과 자본이 전무한 가운데서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인간 존재와 경제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이 그러한 정책을 독재니 정경유착이니 비난하였지만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보다 몇 배 더 나쁜 독재와 정경유착과 관료주의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금의 한국 정부의 경제 정책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들입니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동운동 등이 나름의 명분과 정당성이 있지만 현실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 정부의 정책들은 인간의 본질과 장사와 시장의 기능을 잘 모르거나 오해한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더 부자 되고 싶고 더 잘 살고 싶은 장사꾼들의 욕망을 단죄하는 정책 아래서 경제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 자체가 문명의 진보와 발전을 이루는 에너지임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무지입니다. 인간은 이기적 욕망으로 열심히 일하여 더 많은 결실을 생산하여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편승하여 하나님의 일을 욕망해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 자체를 부인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더 많은 결실과 발전을 얻으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진보와 발전을 부정하고 원시 공동체와 원시자연을 동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이고 인간에게 치명적 재앙을 불러오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성실한 노동이 경제적 부를 창출하고 문명의 발전을 이루며 도덕을 고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일하지 않고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반한 태도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일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섭리와 창조의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더 나은 내일을 이루며 경제는 물론 모든 분야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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