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딜레마, 인간에겐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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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8-06-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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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친히 시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 패스하였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행위를 매우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구원 교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야고보는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3,24)고까지 설명합니다. 우리는 논리적 영향 때문에 믿음과 행위까지도 대립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해도, 그 행위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이신칭의 교리에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강조할 때 그 의미는 행위가 아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어떤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야고보의 가르침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와 상충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은 노아 홍수 같은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살아남을 인간의 대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인간의 도모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으로 여기시고 더 이상 탑을 쌓지 못하도록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힘과 지혜를 과시하는 것으로는 대단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나라는 아닙니다. 바벨탑은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인간의 왕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 왕국을 허시고 막으셨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불러내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신 것입니다. 바벨탑은 수많은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집단을 이루어 힘과 지혜를 결집하여 인간 왕국을 세우려는 것이었다면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출발하는 나라입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은 바벨탑을 쌓는 무리와 비교하면 마치 겨자씨 한 알 같이 미미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는 일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 힘을 모아서 그 나라를 세우도록 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에 아브라함 한 사람을 참여시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아브라함은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 얻는 도리와 하나님 나라 원리가 인간의 힘과 지혜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과 그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과 그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이 순종에는 우리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인신 제사를 요구하셨다는 점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이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이 나눈 대화를 통해 그 당시 이미 제사 제도가 정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인신 제사를 요구하신 적이 없으시고 또한 하나님은 인신 제사를 요구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갈등한 흔적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받고도 아무런 갈등이나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의도에 따라 아브라함이 겪었을 고통과 두려움과 갈등은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행하신 일에 대해 언제나 논리적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나 합리의 그릇은 하나님의 계시를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선언적으로 때로는 서술적으로 드러내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에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이 질문은 이미 당시 제사 제도가 정착되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질문에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목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갈 속죄의 어린양입니다. 죄를 범한 인류에게 속죄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신 어린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다는 것은 인간이 준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 사실이 바로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이 딜레마에서 인간이 헤어날 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어린양 외에는 없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구원을 얻는 길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단순히 종교적인 교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 뿐 아니라 인간이 직면한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수없이 많은 어린양을 제물로 드렸지만 헛된 제물이었습니다(사 1:11-14). 이삭은 자기가 제물인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인간 무지의 이중성은, 첫째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는 어린양을 알지 못하고, 둘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산 제물임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 딜레마의 심각성은 어린양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유일한 속죄제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무지와 그 진리를 믿지 못함이고 더 근본적인 심각성은 인간에게는 그 어린양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대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그 어떤 고상한 사상이나 철학이나 이론이나 가치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이롭지 못합니다. 르네상스, 계몽주의, 자연과학, 그 외 여러 혁명들은 거의 무신론적 토대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모든 것은 일반은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인간에게 그 모든 것은 우상과 다름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경제정의, 인권, 자유, 평등, 반핵, 반전, 여권, 복지, 환경문제 등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대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간 딜레마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번제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을까요? 그 어린양은 유엔이 준비할 수 없고, 미국이 준비할 수 없고, 중국이나 북한이 준비할 수도 없고, 남한 정부가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번제 제물 어린양, 이를테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대안은 오직 하나님만이 친히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 구속의 비밀이고 인류 역사의 회답입니다. 인간 딜레마에 대한 모든 대안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이호와 이레입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7-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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