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강도 전쟁과 고강도 전쟁, 그리고 영적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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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명ㆍ2018-10-2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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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천 년 동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무형의 여러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무수한 박해를 받기도 했고, 성지 탈환의 명분을 가지고 이슬람권 레반트 지역을 수차례 공략한 십자군 전쟁도 일으켰습니다. 이 십자군 전쟁이 남긴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중동 무슬림들의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 그 지역에 강력한 반기독교적 정서를 조성케 했습니다. 제가 나누려 하는 전쟁은 세상 속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영적 전쟁에 관한 것입니다.
1세기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전달된 계시록 예언의 메시지를 읽노라면 그 교회들이 안고 있던 도전과 문제가 21세기 현대 교회가 직면한 도전과 이슈에서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교회가 직면한 도전과 이슈의 내용과 패턴이 거의 동일합니다. 교회의 문제는 1세기도 21세기도 거의 유사합니다. 사회-문화적 세팅이 달라졌을 뿐 문제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말이지요.
소위 ‘저강도 전쟁’(low-intensity warfare), ‘고강도 전쟁’(high-intensity warfare), 이런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두 용어는 정치 군사적 용어입니다. 저강도 전쟁은 직접적인 물리적 군사적 타격보다 정치, 경제, 사회, 심리, 군사 수단 등 제 요소가 통합적으로 운행되는 그런 전쟁의 양상을 뜻합니다. 심리전이 대표적인 저강도 전쟁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이 저강도 전쟁에는 문화적 요소도 포함된다고 봐야겠지요.
이에 비해 고강도 전쟁은 말 그대로 전쟁 양상의 강도가 센 것으로 각종 살상무기를 동원한 무력 충돌이나 전쟁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를 차용해서 현대 교회가 직면한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의 양상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 고강도 전쟁의 양상은 어떤 형태를 취할까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피 뿌림의 전쟁입니다. 신앙 때문에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나아가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강도 전쟁에 견줄 영적 전쟁은 어떤 양상을 취할까요? 사상적 문화적 전쟁의 양상을 띨 것입니다. 세속적 가치와 체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으로 끌어들여 적당히 뒤섞은 소위 ‘유사복음’은 저강도 전쟁에 패한 교회가 추구하는 신학입니다. 재정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신앙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를 증가시킨다고 믿는 ‘번영의 신학’이 그런 범주에 들어가겠지요. 복을 물질적인 복으로 전락시키고 그 물질이 신앙의 기준이 된 ‘기복주의 신앙’은 어떤가요? 기독교 복음을 다양한 종교적 구원 체험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종교다원주의 신학’도 혼합주의 형태의 신학이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신앙을 위해 고강도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 서구사회의 성도들은 저강도 전쟁의 한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전쟁이 우리의 영성과 신앙에 보다 치명적일까요?
개구리가 들어간 비커(beaker)를 알코올램프로 서서히 가열하면 그 개구리는 그대로 익혀 죽고 말지요. 그러나 갑자기 아주 센 불을 가하면 그 뜨거운 열기에 놀란 개구리는 비커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저속한 사상적 문화적 독소가 우리 의식 속에 들어와 ‘하나님 자녀’, ‘그리스도 제자’라는 정체성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심지어 우리가 갖춰야 할 영적 무장을 해제시켜 진노의 자녀(엡 2:3)로 만들어 버리려는 저강도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를 공략하는 사탄의 치밀한 전술전략이 아닐까요? 저급한 세속문화의 요소들이 우리 의식에 침투해 들어와 그것을 서서히 마비시켜 영적 각성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참담하지 않겠습니까.
총성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 가장 치열한 전쟁이 영적 전쟁입니다. 하여 바울은 우리가 치르고 있는 영적 전쟁의 양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저강도 전쟁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속사람(참사람)을 병들게 하여 결국 죽이고 말 것이기에 보다 치명적이지요. 교회가 언제 쇠퇴하고 타락하기 시작했을까요?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자만심(hubris)과 자아도취(narcissism)에 빠질 때였지요. 저강도 전쟁을 치를 때였습니다. 현대 교회는 바로 이런 치열한 저강도 전쟁의 와중에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고강도 전쟁을 치를 때에는 교회가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지만 저강도 전쟁의 양상에 들어가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왠지 맥을 못 추었어요. 영적 기민함과 탄력이 현저히 약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강도 전쟁에서 살아남는 교회만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다음 세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종 대중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교회에 급속히 파고드는 저속한 문화는 현대사회 속으로 사탄이 파견한 첨병과도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하나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잃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갈수록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교회가 복음의 견고한 진을 구축하여 사탄의 궤계를 격퇴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상명(미주 장신대 총장)
ⓒ 크리스천위클리
1세기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전달된 계시록 예언의 메시지를 읽노라면 그 교회들이 안고 있던 도전과 문제가 21세기 현대 교회가 직면한 도전과 이슈에서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교회가 직면한 도전과 이슈의 내용과 패턴이 거의 동일합니다. 교회의 문제는 1세기도 21세기도 거의 유사합니다. 사회-문화적 세팅이 달라졌을 뿐 문제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말이지요.
소위 ‘저강도 전쟁’(low-intensity warfare), ‘고강도 전쟁’(high-intensity warfare), 이런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두 용어는 정치 군사적 용어입니다. 저강도 전쟁은 직접적인 물리적 군사적 타격보다 정치, 경제, 사회, 심리, 군사 수단 등 제 요소가 통합적으로 운행되는 그런 전쟁의 양상을 뜻합니다. 심리전이 대표적인 저강도 전쟁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이 저강도 전쟁에는 문화적 요소도 포함된다고 봐야겠지요.
이에 비해 고강도 전쟁은 말 그대로 전쟁 양상의 강도가 센 것으로 각종 살상무기를 동원한 무력 충돌이나 전쟁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를 차용해서 현대 교회가 직면한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의 양상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 고강도 전쟁의 양상은 어떤 형태를 취할까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피 뿌림의 전쟁입니다. 신앙 때문에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나아가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강도 전쟁에 견줄 영적 전쟁은 어떤 양상을 취할까요? 사상적 문화적 전쟁의 양상을 띨 것입니다. 세속적 가치와 체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으로 끌어들여 적당히 뒤섞은 소위 ‘유사복음’은 저강도 전쟁에 패한 교회가 추구하는 신학입니다. 재정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신앙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를 증가시킨다고 믿는 ‘번영의 신학’이 그런 범주에 들어가겠지요. 복을 물질적인 복으로 전락시키고 그 물질이 신앙의 기준이 된 ‘기복주의 신앙’은 어떤가요? 기독교 복음을 다양한 종교적 구원 체험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종교다원주의 신학’도 혼합주의 형태의 신학이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신앙을 위해 고강도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 서구사회의 성도들은 저강도 전쟁의 한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전쟁이 우리의 영성과 신앙에 보다 치명적일까요?
개구리가 들어간 비커(beaker)를 알코올램프로 서서히 가열하면 그 개구리는 그대로 익혀 죽고 말지요. 그러나 갑자기 아주 센 불을 가하면 그 뜨거운 열기에 놀란 개구리는 비커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저속한 사상적 문화적 독소가 우리 의식 속에 들어와 ‘하나님 자녀’, ‘그리스도 제자’라는 정체성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심지어 우리가 갖춰야 할 영적 무장을 해제시켜 진노의 자녀(엡 2:3)로 만들어 버리려는 저강도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를 공략하는 사탄의 치밀한 전술전략이 아닐까요? 저급한 세속문화의 요소들이 우리 의식에 침투해 들어와 그것을 서서히 마비시켜 영적 각성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참담하지 않겠습니까.
총성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 가장 치열한 전쟁이 영적 전쟁입니다. 하여 바울은 우리가 치르고 있는 영적 전쟁의 양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저강도 전쟁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속사람(참사람)을 병들게 하여 결국 죽이고 말 것이기에 보다 치명적이지요. 교회가 언제 쇠퇴하고 타락하기 시작했을까요?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자만심(hubris)과 자아도취(narcissism)에 빠질 때였지요. 저강도 전쟁을 치를 때였습니다. 현대 교회는 바로 이런 치열한 저강도 전쟁의 와중에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고강도 전쟁을 치를 때에는 교회가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지만 저강도 전쟁의 양상에 들어가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왠지 맥을 못 추었어요. 영적 기민함과 탄력이 현저히 약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강도 전쟁에서 살아남는 교회만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다음 세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종 대중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교회에 급속히 파고드는 저속한 문화는 현대사회 속으로 사탄이 파견한 첨병과도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하나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잃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갈수록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교회가 복음의 견고한 진을 구축하여 사탄의 궤계를 격퇴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상명(미주 장신대 총장)
ⓒ 크리스천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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