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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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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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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요한복음의 저자는 갈릴리 벳세다 출신인 사도 요한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세베데이고 어머니는 살로매, 그의 형은 야고보로 시몬과 같은 직업의 어부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신 3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의 한 사람이고,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계시록을 기록하였고 그 후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예수님의 12제자들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와석종신(臥席終身)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요한복음은 1세기 말에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이 전통적 견해이고, 다른 복음서들은 주로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나 요한복음은 주로 유다 지방에서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생애의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분의 교훈의 종교적 의를 중요시하고 영적으로 재해석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요한은 예수님의 비유는 기록하지 않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 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특징과 용어들이 어떻든지 간에 저자 요한은 이 복음서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도와 목적에서 요한은 7가지 표적을 통해 모든 영역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 표적인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은 물질을 임의로 바꾸실 수 있는 분임을, 둘째,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은 공간에 지배 받는 인간과는 달리 공간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셋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은 시간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넷째,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심은 량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다섯째, 물 위로 걸어가심은 자연법칙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여섯째,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고치심은 불행을 해결하시는 분임을, 마지막 일곱 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은 죽음의 문제를 지배하시는 분임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이심을 이러한 여러 표적들을 통해 증거 하고 있으나 그 모든 표적들이 사실이고 가능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표적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이 요한복음의 1차 독자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그의 독자들은 거짓 교훈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 거짓 교훈 중에 요한이 사용한 “말씀 λόγος”은 그 당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메시야 이심을 가장 심각하게 오해하게 하는 개념이었습니다. 희랍인들은 인간의 사고나 이성과 관련하여 로고스가 인간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로고스는 인간의 사고나 언어 표현에서 인간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철학에서 로고스는 세계정신이나 우주의 혼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이 또한 로고스는 모든 것과 관계가 있는 합리적 원리이며 창조적 에너지이고 모든 존재의 시원이라고 본 것입니다. 처음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이 희랍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기원전 6세기)입니다. 그는, 로고스는 “항상 존재한다.”, “모든 것은 로고스를 통하여 일어났다.”고 하였으며 궁극적인 실재는 불같은 무엇, 신 같은 무엇, 로고스 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로고스, 불,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조정하는 편만한 지혜이고 지시적 원리입니다. 헤라클리투스의 사상을 발전시킨 이들은 스토아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를 영원한 이성인 로고스가 충만한 것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로고스는 하나의 원리이고 에너지이며 세력이었습니다. 그 로고스가 모든 존재의 기원이고 모든 존재 속에서 모든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요한은 당시 지배적이던 희랍 철학에서의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설명하였습니다. 요한이 희랍 철학의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경건한 이들도 있지만 요한이 희랍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그 용어에 의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은 희랍 철학에 의존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희랍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희랍 철학의 기본 이념을 깨부수고 있습니다. 희랍의 신은 이 세상과는 단절된 신, 즉 인간 세상의 전쟁이나 슬픔이나 기쁨과 두려움에 대하여 무관심한 신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희랍 신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자신이 말하는 로고스는 인간과 인간 세상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관여하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로고스로서 인간의 성정을 입으시고 인간과 인간 세상에 돌입하여 들어오셔서 인간을 이 모든 고통과 죽음(죄)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로고스가 비록 희랍 철학의 용어이지만 요한은 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구약 성경의 배경을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태초에...”라는 표현이 바로 구약 창세기 1:1절을 배경으로 전제한 것이고, “말씀”도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압도적인 히브리적 분위기를 설정한 것입니다. 요한은 구약 성경의 유일신 사상의 진수에 대한 눈곱만큼의 양보도 없이 당당하게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시각에 무엇인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분의 말씀은 곧 그분의 행동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적 행위를 주의 말씀이 예언자에게 임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이해와 믿음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수님에 대하여 희랍의 로고스 사상과 상당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 중에는 예수님을 희랍의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로고스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했던 이들이 있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배우고 믿었습니다. 당시 희랍 철학은 지배적 사상이었고 기독교 복음은 열세였던 상황을 감안하면 오리겐 같은 경건한 교부가 그렇게 생각한 것을 지나치게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터툴리안은 “예루살렘과 아덴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였지만 그의 주장 역시 더욱 밝히 드러난 바른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보면 약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터툴리안은 기독교 역사에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는 삼위일체라는 용어와 신, 구약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성경 계시의 절대 신적 권위를 변증하는 대 크게 기여하였지만 일반은총과 우주적인 하나님의 영역주권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였습니다. 그가 이단 몬타누스로 개종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순수하고 탁월했던 신학자들이 많지만 요한은 성경 저자라는 면에서 그런 인물들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 저자라고 할지라도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성령께서 그들을 특별하게 사용하셨다는 면에서는 구별됩니다. 성령께서는 불완전한 인간 성경 저자들을 하나님의 계시를 오류 없이 기록할 수 있도록 사용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성경 저자들이 이성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하셨고 탁월한 문장력과 표현력으로 당대의 철학과 사조를 관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술하도록 하셨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잘 알아서 분별 할 수 없는 철학이나 사상의 혼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특별하게 간섭하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희랍 철학과 이방종교가 혼합된 영지주로 인하여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희랍 철학과 영지주의의 영향에 의하여 하나님과 예수님과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가현설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가히 치명적인 해를 끼쳤습니다. 희랍 철학과 영지주의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현설로 설명하였습니다. 가현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는 인정하지만 인간성의 실재를 부인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된다는 발상 자체는 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동행하며 활동하신 것은 가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가현설(假現說, Docetism) 은 희랍어로 “보이다”는 뜻인 도케오(δοκέω)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가현설의 설명은, 예수님의 몸은 환상일 뿐이고 사람의 탈을 쓴 것뿐이기 때문에 실재 인간이 아니고 따라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고난 받은 것은 환상일 뿐이며, 그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게다가 가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반박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현설은 복음서와 서신서와 정통 신학자들에 의해 부정되고 단죄되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예수가 사람인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단죄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은 대담하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육신이 되어”는 부정과거 시제로서 성육신의 역사적 한 시점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여기서 “육신”을 인간 본성을 강력하게 가리키는 직설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주장은 가현설이야 말로 황당무계한 이론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이러한 주장은 로마 교회를 향한 루터의 저항보다 위대한 저항이고 선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 짧은 한 문장에는 기독교 진리인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어서 요한은 육신을 입으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장은 다분히 광야 장막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연상하게 합니다. 광야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상황을 요한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영광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현상입니다. 그 영광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관념이나 환상이 아니고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하고 믿은 자들이 두 눈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은 인간의 욕망이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시지 않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낮아지심과 겸허한 방법으로 임하셨으며 요한은 그렇게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 가운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증명되었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십자가가 은혜이고 진리입니다. 이로써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 말고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명백하게 경험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은혜와 진리의 계시라는 뜻입니다. 은혜뿐이면 인간은 균형을 잃을 위험이 있으나 진리이기 때문에 믿음 위에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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