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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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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9-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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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창조는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의 첫 내용이고 기독교 세계관의 근간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창조는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맙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는 말을 거저 교리적인 내용이거니 하고 상투적으로 받아들으면 성경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창조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인간의 상상과 의식이 닿을 수 없는 모든 차원을 함축하는 용어입니다. 창조를 믿으면 인간과 세상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창조를 믿지 않으면 아무리 탁월한 이론과 논리로도 인간과 세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남미의 베네수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한때 석유수출량 세계 5위권인 부자나라 베네수엘라 경제가 사실상 마비되었습니다. 도대체 물가상승률 8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습니다. 화폐 자체가 휴지조각이 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정부가 초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존화폐에서 0을 5개나 떼어낸 화폐개혁을 실시했지만 시장 혼란은 더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국가 사태로 베네수엘라 국민들의‘엑소더스’도 늘어나서 지난 4년간 인근 남미국가로 탈출한 베네수엘라인이 230만명에 이릅니다. 베네수엘라와 국경을 맞댄 브라질 북부의 비스타시의 경우 시인구의 5~10% 규모인 3만 여명의 베네수엘라 난민이 유입돼 매춘, 폭력 사건 등이 급증하고 있어 또 다른 국제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주변국들인 에콰도르, 페루, 콜롬비아 등의 나라들이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 경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한 나라로 인하여 남미 여러 나라들이 함께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전 587년에 남유다가 베벨론에 의해 무너지고 많은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나라와 자유를 잃은 유다인들의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지금의 베네수엘라 국민들보다 더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안하지만 아직 베네수엘라 같지는 않고 더구나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비길 수 없습니다. 베네수엘라의 경우만 해도 지금으로서는 특별한 대책이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해도 그 배고픔과 고통의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에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고 있는 유다인들에게 누군가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나라와 주권을 잃고 포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것은 허망한 심리적 착각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유다인들에게 이사야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 메시지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앞글에서 비행기 사고와 같은 개인적인 극단적 절망 상황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했던 지극히 개인적인 대응이 개인은 물론 국가와 민족의 극단적 절망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유일한 대응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대응책의 핵심은 “창조”입니다. 창조라는 말이 전해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과 세상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이란 만들어진 존재라는 뜻인데,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또는 “너를 지으신 여호와”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만들어진 존재는 만든 자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43:1절에서 “너를 창조한 여호와”라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내린 결론이 “너는 내 것이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말씀하신 뜻을 우리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2절 이하의 말씀은 하나님의 소유인 이스라엘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을 얼마나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대해 오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대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여기시고 돌보신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여기시는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모든 두려움의 이유는 생명을 잃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우리가 혹시 잃을까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우리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을 때 “너”의 핵심은 물론 생명입니다. 나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생명이 무엇이냐?”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이 무엇일까요? 숨 쉬는 것이 생명일까요? 심장 박동이 생명일까요? 그런 것은 생명 자체가 아니고 생명 현상입니다. 그런데 생명 현상은 숨 쉬고 심장 맥박이 뛰는 것 뿐 아니라 우리 몸의 수많은 신경과 세포 조직의 활동도 생명현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명 현상은 내가 별로 신경 안 써도 잘 작동합니다. 생명 현상에는 육체적 생명 현상이 있고, 사회적 생명 현상이 있고 나아가서 영적 생명 현상이 있습니다. 사회적 생명 현상은 사회생활에서 하는 모든 것이 사회적 생명 현상입니다. 영적 생명 현상은 하나님께 대하여 활동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 현상은 사회적 생명 현상까지를 포함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나를 만든 분의 소유이고 나의 존재의 핵심은 생명인데 그 생명의 소유주가나를 만든 분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것이 아닌 생명을 가지고 생명활동을 하는데 육체적 생명활동은 내가 의지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적 생명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령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또는 영적 생명 활동에 대해서는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에 의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라고 하셨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무엇을 하든지는 인간 활동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생명 활동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생명 활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생명 현상들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활동에서 우리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노력에 대해 정당하지 않은 결과나 조금이라도 손해가 나는 일이 일어나면 용납을 못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불만을 품고 화를 냅니다. 우리는 매사를 그렇게 생각하며 삽니다. 내가 사는 동내인 뉴욕 칼리지 포인트에 노숙자 센터가 세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동네 사람들이 노숙자 센터가 우리 동네에 세워지지 못하도록 반대서명운동도 하고 시위도 합니다. 솔직히 나도 노숙자 센터가 우리 동네에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집값도 떨어지고 안전도도 떨어질 것입니다. 자기 마을에 노숙자 센터가 들어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한국 강남 어느 학교에 장애인 학급을 신설한다고 기존 학부모들이 결사적으로 반대시위를 하였습니다. 그 때 나는 그 사람들을 비난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 노숙자 센터가 세워지는 것을 반대한다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모든 활동이 생명활동임을 기억해야 하고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님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활동이 나의 생명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까 걱정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두려움은 발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의 생명은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인 모든 생명활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집을 가지고 있지 않고 랜트를 산다면 노숙자 센터가 세워지는 것을 그렇게 싫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랜트비가 내려갈테니까 잘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너의 생명활동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라는 말에는 한층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먼저는 나의 생명이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당연히 보배롭고 존귀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나의 생명이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실 때문에 나의 생명이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귀한 물건은 귀하게 사용하고 천한 물건은 천하게 사용하듯이 자신의 존재가 존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 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박한 생명 활동을 하는 것으로 우리의 생명이 선하고 귀하다는 것을 고의적으로 부정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가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의 평가와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것은 대부분 세상적 기준에 의한 평가일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적 기준이란 돈과 권력과 업적 같은 것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좋은 학교 나온 것,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높은 연봉을 받고, 중산층 수준의 삶의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하고 사회적 높은 지위에서 대접받는 것을 보배롭고 존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그 생명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물과 불을 통과할 때 지켜주시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보배가 진흙탕 속에 있어도 보배인 것처럼 나의 존재가 국가적 위기와 경제적 어려움과 심지어 주권마저 빼앗긴 상황에서도 보배롭고 존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도 주권도 잃은 절망의 자리에서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여호와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이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지명하시고 불러 택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에까지 이야기를 연결할 수 있다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창조 능력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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