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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 그 불편한 불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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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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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콤한 바람, 해질 무렵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사랑하세요. 눈이 부시게 . . .”

어느 깊은 산중에서 도를 닦다가 마침내 득도한 사람이 내 뱉는 독백이 아니다. 치매환자가 치열하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네에게 주는 말이다. 눈이 부시도록 오늘을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이 담담한 메시지는 최근에 종영한 ‘눈이 부시게’란 TV연속극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김혜자 씨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다. ‘전원일기’의 ‘일용엄니’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대한민국 국민여배우 김혜자 씨가 극중 이름도 똑같은 치매환자 김혜자로 연기한 이 드라마 마지막 회를 보면서 나도 눈물을 글썽일 수밖에 없었다.

12회로 끝나는 드라마를 모두 살펴보진 못했지만 마지막 한 회만 떼어서 볼지라도 아름다운 한편의 ‘치매영화’였다. 김혜자 씨의 눈부신 연기가 ‘아카데미 주연 배우급’이었지만 치매환자하면 우선 겁부터 먹고 보는 오늘날의 세태가운데 치매는 멀리 있는게 아니라 바로 내 곁에, 누군가의 병이 아니라 바로 내 병이란 깨달음을 주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원로목사님이 많이 출석하는 교회를 ‘늘푸른교회’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가끔 담임목사님이 축도를 맡기실 경우 축도까지 글로 써서 강단에 오르는 목사님들이 부쩍 늘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을 해온 그 짧은 기도가 생각나지 않을까봐 글로 쓴다는 것이다. 만약 축도하러 강단에 올라가서 성부, 성자, 성령가운데 하나라도 잊어버릴 경우 엉뚱하게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목사님으로 찍힐 수도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쪽지를 써가지고 강단에 오르는 목사님의 노년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감리교 신학대학교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김용옥 박사님에 관한 것이다. 그분은 신약학교수이셨다. 얼굴만 봐도 학자요 인자하기로 소문났던 그 교수님은 지금도 존경받는 교수님으로 제자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있는 분이다. 성탄절을 앞둔 채플시간에 교수님이 설교를 끝내시고 기도를 하셨다.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황금과 유향과 . . ” 그리고 기도가 끊어졌다. 교수님의 필림이 끊어져서 몰약이 기억력에서 순간 증발된 것이다.

한참 있다가 “황금과 유향과 그리고 여러 가지 좋은 것으로 아기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마치셨다. 제자들은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며 교수님을 회상하곤 한다. 그 실수가 교수님의 명예에 흠이 되기는커녕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교훈으로 제자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중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황금, 유향까지만 기억하다가 유향을 잊어버릴 날이 올 것이고 마침내 황금까지도 잊게 되는 날이 찾아 올 것이다. 축도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다 기억 못해 성자를 잊어버리고 마침내 성부까지도 잊을 날이 찾아 올 것이고 아니 그 모든 것이 기억 속에서 깡그리 사라지는 날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불편한 불청객, 치매.

그래서 극중의 김혜자는 오늘 하루를 눈이 부시게, 그리고 아직 치매에 공격당하지 않은 오늘이야말로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눈이 부시게 살아가라고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내일 걱정은 내일 알아서 하고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독백이었다.

결국 드라마에서 나를 울린 것은 이 대목이었다. 치매를 앓고 있는 김혜자 할머니의 아들이 양로병원에 다녀 온 후 걱정스럽게 아내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당신을 못 알아보는 것 같아. 당신이 다녀간 것을 어디 미장원 아주머니가 다녀갔다고 하더라고. . ” 한참 뒤에 며느리가 말을 받는다. “괜찮아요, 어머니가 못 알아봐도 내가 알아보면 되지. . . ”

그렇다. 노년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치매에게 먼저 항복할 이유도 없다. 치매와 공존하는 법을 배워 가면 된다. 며느리의 말처럼 내가 알아보면 되니까. 옛날 담임목사님을 은퇴하신 후 아주 오랜만에 길에서 만났다고 하자. 백발이 무성한 목사님을 보고 너무 반가워 달려가서 인사를 드렸는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사랑과 격려로 자상하셨던 목사님이 자신을 알아보기는커녕 엉뚱한 소리를 하며 내 앞에 마주섰을 때도 서운해 하지는 말자. 나만 우리 목사님이라고 알아보면 되니까. . 무슨 엉뚱한 말씀을 하셔도 그냥 목사님께 사랑과 예의를 표시하면 되니까.

그래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감사하게 이 순간을 살아가면 되니까.

조명환 목사(발행인)
ⓒ 크리스천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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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준기님의 댓글

김준기

치매를 앞두고 뜻있게 읽었습니다. 주변에 비슷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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