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고난과 죽음의 길로 주님 따르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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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9-04-0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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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대강하면 쉽습니다. 법과 질서와 상식과 윤리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일이 쉬워집니다. 즉 나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면 세상사의 어려움은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살면 나는 우선 편하지만 내가 편한 만큼 다른 사람이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도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정당하게 노력하지 않고 남의 것을 훔치면 일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직접 남의 돈을 훔치는 것만 도둑질이 아니라 공금을 횡령하는 것이나 유용하는 것과 부당하게 또는 불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도 도둑질이나 다름없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나에게는 이익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둑은 자기만 도둑질을 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길 바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혼자 도둑이 되어야 수지맞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처럼 도둑이 되면 자기가 열심히 도적질 해봐야 다른 사람이 자기가 훔쳐다 놓은 것을 다시 훔쳐 갈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자기 이익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독재의 가장 큰 매력도 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민주주의는 가장 비효율적인 제도입니다. 모든 사람의 뜻을 묻고 종합하고 투표해서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듭니다. 반면에 독재는 시간과 비용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독재는 매력적이고 종종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독재의 형태는 지도자나 통치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편리와 이익을 위해 법과 질서를 어기는 모든 개인의 행위도 독재의 해악 못지않습니다. 권력과 특권을 이용하여 법과 규범을 어기는 모든 행위는 그 해약이 크기 때문에 엄격한 가중처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경영하는 단체에서도 정치권이나 사회단체 못지않게 불법과 편법이 자행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신앙생활만큼 다양한 수준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믿음이 있고 형편없는 믿음도 있습니다. 헛된 믿음도 있고 심지어 가짜 믿음도 있습니다. 별의별 수준과 형태의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쉽게 하려는 사람들은 불법과 편법을 단순히 편리로만 생각합니다. 바른 신앙생활에는 어려움과 손해가 따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쉽게 신앙생활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손해를 감수하고 바르게 잘 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가고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타협하고 양보하고 쉬운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이지만 또한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섭리와 계획과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피조물이지만 창조주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가 비록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이지만 구원자이신 주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다면 당연히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에만 참여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을 대표하여 바른 신앙을 고백하기도 하였고 천국 열쇠를 받기도 하였으며 또한 사탄이란 책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신 일이 있습니다. 두 번은 아가페로 물으셨고 한 번은 필로스로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로스로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신 것은 며칠 전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에 죽을지언정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을 했었는데 그 다짐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아무리 단호하고 결연한 결심과 다짐과 맹세를 한다고 해도 배교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런 배신은 부부 간에도 부자간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째 물으시자 근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다음 또 동일하게 세 번“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매번 그 표현이 약간씩 다르기는 합니다. 두 번째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고, 세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님의 양을 먹여야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양을 먹인다는 것은 교회를 돌보는 일이고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입니다. 목사에게는 그 일이 목회이고 일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나라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는 특별히 사도들의 사역이 강조되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 할 때 사도로서의 사역은 교회의 기초를 놓는 일과 성경 계시를 완성하고 전하는 것으로 사도들에게서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그런 사명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목회적 사명도 주어졌습니다. 사도들의 목회적 사명은 속 사도들에게 이어졌고, 다시 교부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런 전통은 지금까지 지속됩니다. 목회자들의 사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회적 사명 자들이 없이는 교회 활동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회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역교회의 목회입니다. 바울의 편지들에 의하면 교회 지도자들은 개별 교회를 책임졌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사이비 이단에 대처하여 주님의 양들을 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권면하고, 범죄자를 꾸짖고, 싸우고 갈등하는 신자들을 화해시킵니다. 지역에 있는 개별 교회의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목회는 개별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노회가 있고 총회가 있는데, 이런 기관도 교회입니다. 개 교회의 목회는 이런 연합기관의 역할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목회자를 세우는 일을 이런 기관에서 합니다. 교리와 신학을 채택하는 일도 이런 기관에서 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당시 세계공의회에서 중요한 교리를 결정하였습니다.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신학용어가 결정되었고, 그것에 기초해서 삼위일체론도 기독교의 정식 교리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우리가 지금 성경으로 사용하는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다 주님의 “내 양을 먹이라.”는 목회적 사명을 수행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이 없었다면 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목회자들 중에도 이러한 목회적 사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목회는 교인 수를 늘이는 일뿐 아니라 교회사적 이해와 개 교회가 곧 하나의 보편 교회라는 차원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명령에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어서 그 명령을 순종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는 일은 개인이나 목회자의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개인이나 목회자가 능력이 있으면 주님의 명령을 잘 순종할 거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목회자가 능력이 많아서 교회가 수적으로 부흥하게 되면 목회자가 주님의 명령에 더 잘 순종할 가능성보다 불순종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집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목사는 교인 천명이 넘는 교회에서는 주님이 주인으로 대접을 받으시기가 어려울 것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현대 목회의 어려움입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목회적 어려움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사도의 권위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실제적으로 기독교는 헬라 철학보다 수준 낮은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단의 침투, 교우들 간의 분쟁과 박해까지 목회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로마는 로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회를 일벌백계로 다스렸는데 그 일벌백계의 대상이 교회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그와 같은 분위기를 요한복음 21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나를 사랑 하느냐?”는 질문과 “내 양을 치라.”는 명령을 하신 뒤에 베드로의 미래에 대해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요한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가가 분명해 지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목회자요 지도자로 사는 것만이 아니라 고난뿐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순교까지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고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 다시 한 번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고난당하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직접 목격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죽음의 길로 부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 외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의 길, 즉 죽음의 길 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남을 살리는 십자가의 길 가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교회가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축소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경건에 이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고행을 하라거나, 네 속에 있는 거룩성을 찾으라거나, 세상을 등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위로와 힐링과 기복이 중요합니다. 종교는 그런 것을 약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반 종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것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가르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어려운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견해와 가치관과 꿈과 비전과 목표를 모두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개인이 주님을 따르는 구체적인 일은 수입 얼마를 가난한 자들이나 복음 전파를 위해 일정액을 계획적으로 할애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익 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재정이 허락되면 선한 일에 써야 합니다. 교회에 재물이 축적되면 안 됩니다. 이를테면 돈 많은 교회가 되면 안 됩니다. 개인이 돈이 많은 것보다 교회가 돈이 많으면 더 쉽게 부패하게 됩니다. 돈 많은 교회가 그 돈을 다 흩어 선한 일에 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개인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며 살기가 쉽지 않지만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희생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실천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사이비 이단을 따르는 이들처럼 재산을 다 바치고 광신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면에 주님을 따르는 것을 냉소적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마치 세상을 바꾸겠다는 망상에 가까운 비전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라면 싸움이나 경쟁에서 손해 보는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떤 문제로 힘들어할 때 그의 책임을 내가 대신 질수만 있다면 대신 지거나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모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 죽음의 길입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8,19)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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