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잠긴 지옥, 악의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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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9-06-2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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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뎅(Auguste Rodin 1840-1917)의“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은 무명의 노동자라고 합니다. 작품의 이름 “생각하는 사람”이 그를 철학자나 사상가나 문학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름 없는 노동자 모델을 통해 로뎅이 만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입니다. 헤라클레스는 막강한 힘과 용기, 재치, 냉정함과 활달함은 물론 남성적 매력의 전형이기도 합니다. 놀랍게 발달한 몸의 근육질 가운데 모든 힘과 용맹이 들어 있는 듯하고, 근육질 하나하나가 다 긴장하고 있는 듯하며, 마치 투우의 근육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는 오디세우스나 네스토르처럼 지혜롭지는 못하지만,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용맹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기지이고 지혜입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자신의 용맹이 부족할 경우 기지와 지혜를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그리스 국민의 영웅이 되었지만 가끔 비 정상적인 정신 발작으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여 사고를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상이 투사된 존재입니다. 제우스가 외도하여 낳은 아들로서 출생부터 불행을 타고난 그는 지혜는 부족하였지만 용감하고 재치 있고 냉정하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신발작으로 아들과 아내를 죽이고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괴로워하며 스스로 고행을 선택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뎅은 그러한 헤라클레스를 “생각하는 사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남성다움의 상징인 우람하고 잘 발달된 근육질 육체의 헤라클레스가 맹수나 악당과 싸우는 모습이 아닌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이면서도 인상적입니다.
1879년 프랑스의 법제처와 감사원이 로뎅에게 1882년 개관할 오르세 궁 예술 박물관 입구에 설치할 작품 제작을 주문합니다. 그 주문서에는 “단테의 ‘신곡’을 표현한 부조 작품들로 장식을 할 것”이라는 제작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단테의 신곡 첫 장은 고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으로 시작해서 연옥으로 가는 노래입니다. 독서광인 로뎅은 처음으로 단테의 신곡을 읽으면서 다른 세기에 있는 고통 받는 육신들, 동 시대를 심판하는 시인, 동 시대의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시에는 글이 아닌 형상들이 꿈틀 거리고 있었고 시인의 손에서 빚어지고 있는 고통 받으며 걱정과 근심과 염려에 휩싸인 인간들을 보았습니다.
로뎅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 “지옥의 문”을 만들었습니다. “지옥의 문”은 로댕의 작품 대부분을 총망라한 불후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르네상스를 탄생시키며 서양 예술의 거대한 새로운 움직임을 기록한 작품이 되었던 이탈리아 조각가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의 작품 “천국의 문”의 전체적인 구성을 모델로 만들어진 이 지옥의 문은 무질서하고 혼돈에 휩싸인 양상을 띠며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예술을 태동하고 있습니다. 작품 안에는 단테의 모습을 형상화했다는“생각하는 사람”을 필두로 19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로댕은 30년 넘게 고뇌하며 이 작품을 구상하였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을 필두로 “추락하는 사람”, “세 망령”, “웅크린 여인”, “입맞춤”, “아담”, “이브”등이 모두 그의 고뇌의 결과로 나온 작품들입니다. 따라서 “지옥의 문”은 로댕의 전 작품들을 한데 모아놓은 미술관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 위에 서 있는 세 명의 인물은 지옥에 거주하는“세 어둠”을 묘사하였는데, 세 형상 모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을 표현한 작품을 변형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수많은 인간들의 정념과 쾌락과 야수성 및 잔인한 악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수많은 육체의 뒤엉킴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로 뒤엉켜 붙어서 사나운 맹수처럼 날카로운 이빨로 서로를 물어뜯으며 지옥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지옥의 문 육체의 사슬이 화환과 덩굴손처럼 뻗어 나가고, 무언가에 귀 기울이는 얼굴, 무언가를 집어 던지려는 팔들과 군상들은 악의 즙에서 솟아나는 고통의 뿌리를 보여준다.”고 하였습니다.
로뎅은 단테의 글을 창조적으로 형상화 하였습니다. 지옥의 문에 새겨진 그룹 형상들은 깊은 영혼의 추억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있으며, 그 인간상들이 부딪히는 접점에 그 인간들의 감정과 동작을 불어넣었습니다. 로뎅은 그 인간들의 동작에 잡고, 취하고, 잃고, 버리고, 놓고, 고통당하고, 소리치고, 호소하고, 떨어지고, 오르고, 포기되고 있는 모습들을 담았습니다. 13년에 걸친 그의 첫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대중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다시 13년을 자신의 영혼에게 물어가며 작업을 한 후에는 더 이상 대중의 기호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을 만큼 자신의 내면을 남김없이 작품의 구석구석에 영혼의 일기로서 새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로뎅은 지옥과 같은 인간 실존을“생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려다보며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뇌에 찬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절망적 상황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이 고뇌하며 생각하도록 하였습니다.
지옥의 문 위에 앉아 오른 손을 접어 턱 위 입술에 붙이고 오른 쪽 팔꿈치를 왼 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생각하는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의 내용은 한가하고 낭만적인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인간들이 혼돈과 무질서와 정념과 악의 세력에 노예가 되어 공포와 두려움과 역겨움과 타인은 물론 자신까지 할퀴고 찢고 물어뜯고 괴성을 질러대는 인간 실존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악에 받쳐, 있는 힘을 다해 자신과 서로를 해치는 아귀들의 다툼과 같은 인간 실존을 마치 차분하게 관조하는 듯 한 그의 모습이 주변 현실과 어울리지 않지만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로뎅의 “지옥의 문”은 그가 살았던 시대 뿐 아니라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인간 실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국내외적인 정치적 현실과 국제 정치적 상황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렇고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지만 모든 나라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고, 조국 대한민국의 소식을 비교적 많이 들어서 알게 된 나름의 생각과 판단에 의하면 로뎅의 “지옥의 문”처럼 출구를 찾지 못할 뿐 아니라 지옥의 문을 점점 더 단단히 잠그는 정책들로 심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적 정책을 도입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포기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철없는 청소년 자녀가 근검절약하는 부모보다 낭비벽이 심한 부모를 좋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국민은 나라가 망해도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져 주는 복지 정책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지옥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발부둥치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고통의 문제”에서 지옥의 문은 안에서 굳게 잠겨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루이스의 이런 설명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인간이 지옥으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스스로 지옥을 만든다고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악이란 인간의 의지와 행위와 독립된 개념이 아닙니다. 악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불순종하는 의지와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고 그 불순종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간은 합리적 의심과 추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신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악이고 그 같은 악은 인간 스스로를 하나님과 격리시키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인간이 나름의 새 길을 모색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성적 시도들은 아무리 기발하고 탁월해도 스스로를 가둬 놓은 지옥의 문을 점점 더 견고하게 잠그는 행위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깨뜨린 결과라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그런 맥락에서의 설명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설명은 범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형벌은 마치 이신론자들의 설명처럼 법칙이나 원리에 의해 자동적으로 주어지거나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을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은 병이 들었거나 포수가 쏜 총에 맞았거나 무엇에 부딪쳤거나 여러 종류의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도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생물학적 원리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 법칙과 원리에만 맡겨두지 않으시고 직접 통치하고 돌보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자연 법칙이나 원리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활용하십니다. 나는 자연 법칙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조화를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통치를 어떤 원리나 법칙으로 오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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