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에 대한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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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9-10-2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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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딱 일곱 달이 지났습니다. 95년을 사셨으니 장수를 하신 것입니다. 90이 넘도록 정신이 맑으셨고 기억력은 젊은 자녀들보다 훨씬 더 좋으셨습니다. 그 연세에 매년 성경을 몇 독씩 하셨습니다. 거동과 출입은 불편하셨지만 정신은 맑으셨고 7남매의 집안일을 다 헤아리시고 지도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먼 곳에 계시면서 내가 목회하는 교회로 나오시기를 원하셔서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는 일이 쉽지 않았고 교회당이나 우리 집을 출입하실 때는 업어드려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내가 허리라도 아플 때는 사위가 업어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 허투루 들었는데, 내 감정에 정직하게 말한다면, 사실만큼 사셨으니 이제 돌아가셔도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을 것 같았고, 실제로 돌아가시자 고통스럽게 얼마를 더 사시는 것보다 잘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예상치 못한 허전함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인데, 그 동안 나는 어머니를 만나면 온갖 투정을 다 했었습니다. 어머니한테는 온갖 불평과 투정을 다했고 또한 온갖 자랑도 다했습니다. 불평을 하면 나무라시고 자랑을 하면 그것이 자랑인 줄도 모르시고 함께 좋아하시다가도 자랑인 것을 알아차리시면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를 뵐 때는 불평과 자랑을 늘어놓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머니에게 했던 불평과 투정과 자랑은 다른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것임을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일곱 달 만에 형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형님의 건강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두 분의 떠나시는 순서가 뒤바뀔까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 난감함이란 이루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보다 아들이 먼저 갈 수도 있는데, 왜 나는 그렇게 될까봐 그렇게도 불안해했는지 지금도 당시의 불안했던 마음에 대해 논리적으로 또는 신앙적으로 해명이 잘 되지 않습니다. 좌우지간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통사정을 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형님보다 먼저 돌아가시게 해 주세요. 형님이 어머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헤아려 주셨는지 형님이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여 인사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 형님은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계명으로 금하는 우상이 아닙니다.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1960년대 중반쯤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시골은 주먹패들이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 주먹패들이 서로 경쟁을 했고, 주변 지역을 평정한 주먹패들은 이웃 동네로 원정까지 다니며 동네 아가씨들을 희롱하고 남자 청년들을 때리고 가축이나 과수나 농작물을 서리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젊은 청년들이 자기네 동네 앞을 지나가면 잡아서 때리고 신발이나 옷을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때 형님이 서울서 내려와서 주변 동네 주먹패들을 평정했습니다. 형님의 이름이 알려지자 도전하는 주먹패들이 많았는데 형님은 그 모두를 제압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낮선 사람이 집에 찾아오기만 하면 혹시 형님이 사람을 때려서 찾아 온 게 아닌가 하여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형님은 한 번도 주먹패들을 먼저 건드리거나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유 없이 행패를 부리거나 우리 동네 청년들을 때리거나 하면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몸집은 크지 않지만 누구라도 부당하게 시비를 걸거나 비겁하게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를 제압하고 코피를 터트렸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는 군용 혁대와 자전거 체인 등으로 무장한 대여섯 명의 주먹패들이 수요일 밤 예배를 마치고나오는 우리 교회 아가씨들을 희롱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일은 형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우리 동네 청년들이 형을 불러내어 사실을 알리자 형님은 그들을 단 몇 마디의 말로 기선을 제압하여 일렬로 세워 놓고 무장을 해제시킨 다음 나쁜 짓을 했으니 한 대씩 맞으라며 한 명씩 불러내어 이빨을 꽉 물고 배에 힘을 주라고 하고 몇 대씩 때려주고 엄히 훈계를 하고 돌려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어릴 때 형의 그런 모습이 그렇게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러던 형님이 1967년에 총회신학교에 입학을 했다가 군에 입대하여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하였습니다. 당시는 사당동 총회신학교 건물은 콘크리트 구조만 세워 놓은 상태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사들과 교단 지도자들은 이같이 열악한 신학교의 교육환경에 대해 무관심했고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만 하고 있었습니다. 형님은 몇 명의 의기투합한 친구들과 소위 총신의 정화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영적으로 기도와 경건훈련을 할 수 있는 환경과 교수와 신학생들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학구적 분위기를 만들자는, 이를테면 개혁운동이었습니다. 나는 형님의 그런 활동을 곁에서 지켜보고 잔심부름도 하였습니다. 총회신학교 대학부 학우회는 경건을 위한 채플홀과 학구적인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도서관을 확충할 것을 이사들과 전국교회에게 호소하는 호소문을 여러 차례 발송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사회는 콘크리트 뼈대만 세워진 건물의 외벽과 바닥 공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이어 채플 홀이 세워지고, 도서관이 확충되고 신관건물까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시험 때가 되면 밤을 새워 시험공부를 하고 또 밤새워 신학교의 정화운동을 위한 회의를 거듭하였는데 우리 형제가 살던 자취방에 그 일을 위해 모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교수들은 연구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수 십 년 똑 같은 강의 노트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것도 개혁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학우회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학문적 분위기 조성을 위해 공개신학강좌를 개최하였고 그 결과 연구하지 않는 교수들이 상당히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학교가 영적으로 학문적으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게 되자 이사회와 신학교가 총회 정치하는 목사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심각한 상황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무자격 교수가 임용 되고 무자격 학생이 부정 입학 하는 일들이 많았고 학생회는 그와 같은 정치 세력에 맞서서 학교 발전을 위해 싸웠습니다. 형님은 그 운동의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여러 신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협력하였으며 그 이후 신학부 총학생회가 정풍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그 운동이 후배들의 몫이 되어 오늘의 총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 누구 못지않게 총회신학교와 합동교단을 사랑했던 형님의 순수했던 열정과 리더십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76년 형님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나는 총회신학교의 다음 세대가 되어 총신개혁을 부르짖으며 합신이 만들어지는 역사적 흐름의 중심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고, 사회와 교단의 정치적 부패와 혼란의 격랑을 겪으며 개혁신학의 정체성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광화문, 시청 앞 등에서 체류탄 가스를 마시며 반독재를 외쳤던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내가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 개혁신학의 하나님 절대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조건적 은혜는 무신론과 유물론의 토대에서 비롯된 진보사상과 이념들과 양립할 수 없었고 나에게 많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 갈등은 너무나 소중한 결과를 얻게 하였는데, 갈등이 깊어질수록 개혁신학에 대한 확신이 견고하게 된 것입니다. 개혁신학과 진보사상이나 사회주의가 양립할 수 없는 이유는 진보사상이나 사회주의가 무신론과 유물사관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조금은 빗나간 감이 없지 않으나 나의 신앙과 신학의 이러한 편력은 헛된 방황만은 아니었고 값진 유익이 되었는데 개혁주의에서 비껴가고 있는 복음주의를 보게 된 점입니다. 복음주의는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핵심 사상을 지칭하는 용어인데, 지금은 복음주의 안에 WCC를 비롯하여 자유주의와 온갖 사조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한국 보수교단을 비롯하여 내가 속해 있는 KAPC 교단도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결코 안전하지 못합니다.
나는 형님이 1976년에 도미하고 19년이 지난 1995년에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나는 미국에 와서 형으로부터 KAPC 교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형님은 언제나 어디를 다녀오거나 경험한 것을 아주 작은 일까지 소상히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잘 설명을 하였습니다. 형님은 KAPC 교단의 역사를 사소한 사건까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고 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형님을 잘 알기 때문에 KAPC 교단을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일했을 지를 짐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미국에 와서 지난 24년 동안 형님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역시 그 집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형님은 총회와 신학교와 세계선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언제나 앞장섰고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형님에게는 사심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공적 일을 앞장서서 하는 이들 중에 돈이나 명예를 탐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을 분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사심을 숨기는 사람이 순수한 것처럼 드러날 수가 있고 사심이 없는데도 돈이나 명예를 탐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형님이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총회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언제나 총회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일이나 마치 집안일처럼 걱정하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다른 총회원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자신이 직접 온 힘을 쏟아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총회를 너무 사랑하여 언제나 총회 뺏지를 달고 다녔는데, 돌아가셨을 때 형수님이 수의 양복에도 빼지를 달면서“당신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총회 뺏지 달아드릴게요”하였습니다. 목회에서나 총회나 노회를 위해 일할 때 언제나 자기의 것을 손해보아가며 일했고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으며 참 인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노회나 총회에서 회원을 받아들일 때 자격이 좀 모자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부족한 조건들을 갖추어 받아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점에서 나는 형님과 늘 의견을 달리 하곤 했습니다. 나는 누구라도 사업에 실패하여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나 가고 싶은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여 신학교에 가려고 하는 이들이 상담을 해오면 가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도 인도하시지만 나는 목회자로서의 소명과 달란트를 신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자격이 없으면 갖추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해 교단이나 노회 가입이 어려웠던 이들 중에 형님의 덕을 본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생각이 맞고 형님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반대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는 총회나 노회나 교회를 위한 열정에서 형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한 열정에서도 순수성에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함에서도 리더십에서도 기도에서도 나는 형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형님을 만나서 대화할 때면 언제나 형님의 생각을 비판했지만 그것은 형님의 생각이 틀렸고 내가 옳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혹시나 형님이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오해를 받게 될까봐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가 나에게 어디가 제일 좋으냐고 물으면 '여기'라고 하고, 언제가 자장 좋았느냐고 물으면 '지금'이라고 대답하려고 노력 합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현재는 나의 결심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환경을 초월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한 환경에 의해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 외에는 어떤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수준의 신앙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그러한 신앙을 지향하면서도 형님을 먼저 떠나보내고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순간이긴 했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미국이 남의 나라처럼 느껴졌습니다. 일상에서 형님의 존재를 늘 의식하고 살지도 않았고 형님이 안 계시면 안 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의식 가운데 형님에 대한 의지가 컸던 것 같습니다. 마치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고아와 같다는 느낌, 이 느낌은 의식적이거나 논리적인 사유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의식 가운데 순간적으로 몰려든 느낌입니다. 형님 없이도 잘 살겠지만 나는 가장 강력한 내 편 한 분을 잃었습니다. 형님의 따뜻한 배려와 지지와 인정과 무엇보다 그 존재가 벌써 그리워집니다. 형님이 좋아하시던 찬송가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거기서..."를 불러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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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래님의 댓글
김양래
옳은 것에 대하여 늘 아멘하고 말할 수 있길를ㅡ 기도하며 오늘도 하루를 보냅니다.
주신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