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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다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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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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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어떤 사람이 쥐를 실험하기 위해 쥐가 버튼을 누르면 치즈 한 덩이를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쥐가 처음에는 실수로 버튼을 눌렀지만, 영리한 쥐는 버튼을 누르면 치즈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후로 쥐는 치즈를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버튼을 눌러서 떨어지는 치즈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쥐가 친구 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을 잘 훈련만 시켜 놓으면 언제든지 치즈를 먹을 수 있다고...”

누군가 우화 같은 이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무슨 교훈을 위해서 이 이야기를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리한 쥐는 현대 기독교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이 쥐처럼 하나님을 훈련만 잘 시켜 놓으면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선교사는 설교하는 중에“하나님도 길들이기 나름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길들이거나 훈련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3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을 굳이 세상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자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의적이란 일정한 질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제멋대로 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은 무뢰한 표현이지만 “제멋대로”를 “당신의 뜻대로”로 고쳐 사용하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어떤 존재나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좌우되지 않는 분으로 강조합니다. 쥐를 훈련시키는 사람이 훈련을 위해 쥐가 버튼을 누르면 치즈를 떨어뜨려 주지만 훈련이 끝나면 버튼을 눌러도 치즈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쥐에게 치즈를 주고 안 주고는 쥐에 의해 사람이 훈련되거나 길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렸듯이 천지 만물은 하나님의 의지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 즉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지를 법칙으로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면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기적을 행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기도가 기적을 일으키는 법칙은 아닙니다. 기도 응답으로 몇 번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기독교인 중에는 앞의 쥐처럼 하나님을 잘 훈련해 놓으면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법칙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 이렇게 되면 자기 입맛대로 길들지 않는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과 불평과 시비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어 고생하던 중에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모세는 백성이 자기와 다투는 것을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셔서 목마름은 해갈되었지만, 성경은 그 사건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다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는 그 사건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다투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였다고 하였지만 민수기 20장 13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다툼은 일반적으로 비슷한 상대끼리 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상관과 부하,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은 다툼이라고 하지 않고 반항, 거역, 항명, 버릇없는 태도 등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다투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대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계명을 어기는 무서운 죄입니다. 모세는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줄로 알고 대하는 태도를 책망하십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속된 말로 인간이 하나님을 맞짱 뜰 상대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다투므로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하나님과 다투었는데, 이스라엘이 처했던 상황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절박했을 것입니다. 장정만 60만이고 남녀노소를 합치면 200만은 족히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모두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고 막막했을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즉각 애굽에서 괜히 나왔다고 후회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학대와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애굽에는 자유가 없고 노동이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 생존에 필요한 것은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애굽에서는 목말라 죽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는 물이 없을 뿐 아니라 먹을 양식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광야 생활에서는 순간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낍니다. 이미 얼마 전에는 양식이 떨어져 생존의 위협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해결을 해 주셨지만, 지금은 물이 없어 죽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곤란한 일들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고생과 생존의 위협을 겪게 된 것이 모세 때문이라고 하며 대들었습니다. 이런 기세라면 얼마 안 가서 백성들이 모세를 돌로 칠 것 같았습니다. 광야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모세지만 2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과 수많은 가축들이 목말라 죽어가는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해결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모세는 장로들을 데리고 호렙산 바위 앞으로 가서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바위에서 물이 솟아 나와 백성들은 그 물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20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모세는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모세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7장에서는 모세의 실수는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점만 지적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대들었다고 그곳 이름을 므리바라고 했고,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해서 맛사라고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므리바나 맛사는 모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그렇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이 왜 하나님과의 다툼이라는 것일까요? 그들 앞에 물이 없다는 사실은 당장 사느냐, 죽느냐 할 정도의 위기이며, 그런 위기에서 불평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불평을 한 것이 그렇게도 나쁘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힘들어했다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상황이 힘들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면서 왜 자기를 버리시는가, 하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소, 원망, 불평은 그것 자체로만은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애굽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었는데 왜 끌고 나와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애굽 타령이었습니다. 광야보다 애굽의 생활이 좋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아에서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갈 바에야 차라리 애굽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나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태도가 나쁜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론적 토대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정은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훈련시키시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먹고 잘사는 면에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광야가 아니라 애굽에서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그런 반론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온 세계에 편만하게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광야와 가나안만이 아니라 애굽에도 계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물이 없는 르비딤이 아니라 물이 풍부한 이집트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주장은 어떻습니까? 그런 주장이 진실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풍부한 먹을거리와 물, 따뜻한 잠자리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보장해주는 분으로만 받아들여질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광야에서는 아무것도 보장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결국 애굽의 신이 자신들이 섬겨야 할 신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말을 돌려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이야기한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의 신을 섬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그런 삶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신을 그리워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다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다투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민족의 문명에 흠뻑 사로잡혔습니다. 광야에서 별 볼일 없이 살았던 그들에게 가나안의 삶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문명의 꽃을 피우게 한 가나안의 신이 하나님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농경신입니다. 풍요의 신입니다. 실제로 가나안 문화는 삶의 풍요와 즐거움을 보장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바람난 사람처럼 쉴 새 없이 다른 신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과 다투었으며, 늘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다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투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이 므리바는 바위에서 기적적으로 물이 솟아 나온 자랑스러운 영적 체험의 장소가 아니라 부끄러운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에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걸 보고 아멘, 할렐루야를 외쳤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건을 영적 무용담으로 두고두고 이야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과 다툰 사건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늘 애굽 신을 향한 갈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사건입니다. 므리바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을 드러내시기 원하셨는데 모세도 백성들도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 결과 하나님과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민 20: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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