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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서론, 결론은 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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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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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구약의 예레미야나 신약의 바울은 이스라엘인들의 하나님 신앙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예레미야가 볼 때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을 바알과 바꾸었고, 바울이 볼 때도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을 우상과 바꾸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로 대체하려는 경향은 인간 타락 이후 어느 시대에나 계속되어 온 경향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러한 경향은 불신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경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정하는 불신자들의 그러한 경향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을 피조물이나 우상과 바꾸어 놓고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들 대부분도 하나님을 피조물이나 우상과 바꾸거나 겸하여 섬기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레미야나 바울 같은 지도자들이 그렇게 왜곡된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을 꿰둟어 통찰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생명과 구원이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고 가치이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과 생명과 구원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그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구원보다 더 큰 상위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창조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리문답 제1문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구원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면 본래의 존재 목적을 벗어나는 것이고 성경은 그것을 곧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개념으로 말한다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나 바울이 이스라엘의 그러한 왜곡을 지적하는 것은 단순한 고발 차원이 아니라 그런 전형을 통해 인류가 그 존재 목적에 얼마나 역행하여 사는가를 깨닫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여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2:4-1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와 같은 왜곡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언이며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인간의 한계와 수준을 드러내는 그와 같은 시대적 통찰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역사적 인물로 남다른 영적 예민함으로 시대를 직시하는 감성을 지녔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의 범죄와 하나님 왜곡을 안타까워하며 많이도 울었던 특별한 선지자입니다. 모든 선지자가 예레미야와 같은 통찰력과 감성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그 특별한 통찰을 통해서 역사와 현실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힐기야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사장 아들이니까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거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보수적인 종교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교육받은 엘리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고향은 베냐민 땅 아나돗입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깝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국내외 정치 상황을 몸으로 겪으며 자랐습니다. 소위 당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어릴 때부터 고급 정보를 통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때는 요시야, 여호야김, 시드기야 왕의 시대입니다. 요시야는 8세의 어린 나이로 주전 640년에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와 나이가 비슷합니다. 요시야가 왕이 된 지 13년이 되던 주전 627년에 예레미야는 스물한 살의 나이로 소명을 받아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 5년 뒤인 주전 622년부터 요시야 왕은 개혁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요시야의 나이가 27세였습니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의 개혁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끝까지 잘 되었다면 유대의 역사도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유대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려운 외교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유프라테스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바벨론이 그리고 남쪽에는 애굽이 그 세력을 확장하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이나 애굽은 모두 강대국입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유대는 어느 나라 편에 설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요시야는 바벨론 편에 섰습니다. 바벨론 편에 섰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밀고 올라오는 애굽과 맞붙었습니다. 애굽이 바벨론을 공격하기 위해 올라오는 것을 요시야가 가로막고 싸웠습니다. 유대가 애굽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요시야가 용기가 있어서 그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싸움을 시작하면 바벨론이 내려와서 구해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요시야는 전사했습니다. 그때가 주전 609년인데 그가 개혁을 시작한 지 13년 되던 해였고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의 왕은 파라오 느고였습니다. 성경에는 그 이름이 바로느고라고 나옵니다. 바로느고는 자기 마음대로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여호야김을 유대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여호야김은 왕의 자질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굽 왕이 시키는 대로 하는 왕이었습니다. 여호야김이 그런 왕으로 유대를 다스리다가 요시야가 죽은 지 22년 만에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시드기야가 왕이 된 지 11년이 되는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시야는 바벨론을 위해서 애굽과 싸우다가 애굽에게 패하여 자주권마저 잃었는데 이제는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대의 왕족을 비롯한 귀족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 모두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고 유대 땅은 바벨론 총독이 와서 다스렸습니다.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이제 유대라는 나라가 없어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나이 20대 초반에서 시작해서 60대 초까지 선지자로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정서적으로 예민하였고 시대를 보는 눈이 남다르게 예리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그의 성품이 그를 더욱 불운한 선지자로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감지하였던 것입니다. 철학자는 동시대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예언자는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한 민족의 불행한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고 그러한 안목이 그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김사인 시인의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는 시에서 이성선 시인의 “별을 보며”의 첫 부분을 빌려 쓴 시의 한 부분입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렵혀지지 않았을까” 시인은 별과 하늘을 너무 쳐다보아 그것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하는 소심증과 결벽증 환자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덜덜 떨며 살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런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백성을 책망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세상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을 더럽힐까 두려워서 덜덜 떨며 살았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 말기에 정도전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고려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듯이 예레미야는 조국이 처하게 될 그 처참한 내일을 내다보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조국 유대가 처한 상황으로 인하여 한없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백성들로 인하여 그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인데 누가 감히 건드리겠느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바알과 바꾸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알과 바꾸었다는 예레미야의 지적은 풍요와 형통에만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을 찾았고 믿었었지만 그 하나님은 바알이지 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믿는 신앙의 외형은 참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았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알, 즉 풍요와 형통이었습니다. 이것은 현대 기독교와 너무 흡사한 형국입니다. 현대 많은 기독교인들이 듣고 싶은 설교나 간증은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배 회복이니 말씀 중심이니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서론을 장식하는 것일 뿐, 온갖 그럴듯한 말은 많이 해도 메시지의 결론은 복 받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이를테면 많은 설교에서 하나님은 서론이고 결론은 바알입니다. 형통과 복에 집착하는 동안은 자신이 하나님을 바알과 바꾸어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 생명의 메시지를 듣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도 그를 선지자로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 까다로운 엉터리 선지자라고 취급하였습니다. 늘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지적하는 못된 선지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선지자로 대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참 외롭고 고독한 선지자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바벨론의 간첩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늘 테러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한평생 마음 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참 불운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영혼에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이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5,11-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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