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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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0-11-2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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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죄를 ‘선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가난에 찌든 법학도인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빈곤과 고독에 짓눌러 추상적 사색에 집착합니다. 그는 예리한 지성으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독창적인 초인사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의 초인사상은 인류를 나폴레옹과 이(蝨)로 분류합니다. 나폴레옹은 선악을 초월하고 스스로가 법이나 다름없는 비범하고 강력한 소수 인간이고, 이는 인습적 도덕에 얽매이는 약하고 평범한 다수 인간입니다. 라스콜리코프는 자신이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한 마리의 이에 불과한 무자비한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살해 장면을 목격한 노파의 여동생 리자베타도 죽입니다. 그는 살인을 통해 나폴레옹이 되어 다수의 인간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찾아 온 것은 죄책과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을 희생해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몸을 파는 쏘냐를 만나서 자신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자수하게 됩니다. 쏘냐는 작가가 이상으로 여긴 복음의 사랑과 인종의 사도이고 무신론자 라스콜니코프에 대립하는 인물입니다. 작가는 합리적 원리와 비합리적인 원리와의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에 직면한 주인공의 심각한 고민을 인간 심리의 철저한 분석을 통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쏘냐에 감화를 받은 주인공 라스콜리코프의 종교적 갱생과 정신적 부활을 그리고 있습니다. 죄는 선을 넘어서는 것이고 벌은 살인에 대한 가혹한 법적 처벌보다 더 극심한 자기혐오와 고통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살인죄에 대한 형벌로 시베리아 유배지로 떠나게 되는데, 형벌의 길인 시베리아 유배지로 가는 길이 자유를 행해 가는 과정과 중첩되어 있고, 쏘냐가 동행한 머나먼 여정 끝에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는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죄의 형벌로서 온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사망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죄가 없는 곳에 사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의 말씀처럼 죄에 대한 형벌로 즉각적이고도 점진적인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고 사망이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롬 5:12). 죽음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현상으로 영적인 죽음, 육체의 죽음, 영원한 죽음으로 분류되는데, 인류가 경험하는 모든 불행과 비참은 바로 이 죽음과 그로 인한 증상들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지만, 이 형벌은 이생에서 그 누구에게도 완전히 시행되지 않았으며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 모든 가혹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죄는 하나의 힘이요 원리로서 피조 된 생명의 모든 형태 속에 깊이 침투해있다. 이것을 그냥 버려둔다면 모든 것들은 황폐해졌을 것이며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간섭하셨다. 그의 일반은총을 통해서 하나님은 죄의 파괴적이고 파멸적인 세력들을 억제하시고 제어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은총은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이 일반은총은 죄의 세력을 억제하고 가라앉히기는 하지만 없애거나 극복하거나 변화시키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을 비롯하여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특별 은총뿐 아니라 일반은총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은 특별 은총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일반은총으로는 세상의 생명을 유지시키시며 세상에 내린 저주를 느슨하게 유화시키고 세상의 부패 과정을 지체시키며 우리의 삶이 마음껏 발전하도록 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고 하면서 다양한 분야에 나름의 영역에 합당한 주권이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국가, 학교, 교회 등이 대표적인 영역주권 분야인데 카이퍼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각각 영역주권을 부여했으며 이 주권들은 동등하고 특별한 주권이므로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클라스 스킬더는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에 반대하고 비판하였습니다. 스킬더는 은총이란 단어는 항상 죄의 용서만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일반은총이란 용어는 죄가 다스리는 타락한 세계 외에 일종의 중립적인 세계가 있어 이 안에는 죄의 영향력들이 최소화되면서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대립이 배제되는 두 개의 영토개념을 형성하게 되는 것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개혁주의자들이 일반은총을 지지하지만 스킬더를 비롯한 몇몇 신학자들이 일반은총을 비판하면서 칼빈주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켜서 이들을 신칼빈주의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혁주의자는 일반은총을 지지합니다.
바울은 롬1:18-28절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현재적인 심판을 범죄함에 내버려 두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내버려두다’는 단어는 과거형으로, 포기 이전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삶 가운데 죄를 억제하고 제어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벧전2:13-14절에서 베드로가 인간에게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하는 것도 비록 불완전하고 때론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인간의 제도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죄의 억제 도구가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2:14-15절에 나타난 양심도 죄를 억제하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설명하는 충분한 근거 구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은총이 자칫 문화낙관론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일반은총은 인간의 죄를 억제하고 특별 은총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은총으로 죄를 억제하여 세상을 보존하시고 그 속에서 택한 자들을 위한 특별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과 질서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에 영향을 끼쳐 범죄를 억제합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성령의 특별 은총의 원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에 자극을 받습니다. 인간의 양심도 죄의 영향 아래 있지만, 성령은 그 양심에 역사하여 죄짓는 것을 억제합니다. 자연의 빛을 통해 죄를 억제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심지어 하나님 말씀의 빛이 없더라도 인간의 양심은 죄가 죄책을 발생시키고 형벌의 두려움을 일깨워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계시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지만, 천지 만물을 창조하셔서 자연의 빛을 인간에게 비추셔서 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시고 더듬어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부패와 죄를 억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누구나 죄를 지으면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되게 하셨고, 타인의 이익에 반하게 하셨으며,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하셔서 죄를 억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법령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게 하시고 이를 통해 세상에 경고하게 하심으로써 세상의 사악함에 대한 커다란 억제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쉽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특별한 환경에 두심으로써 범죄와 부패로부터 보호하시고 죄를 억제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더 악하게 되지 않도록 특별하게 보호 조치 된 환경임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애굽의 바로나 로마의 네로나 독일의 히틀러나 레닌과 같은 환경에 두지 않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극악한 독재자나 살인자나 범죄자를 극도로 증오하고 미워하며 비난하지만, 자신이 그들과 같은 환경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대형교회 목사의 불법적이고 무리한 세습을 반대하고 비판하지만, 만약 내가 대형교회 목사이고 내 아들이 신실한 목사라면 여느 대형교회 목사처럼 불법적 세습을 할 가능성은 매우 클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돈이 많다면 돈에 대한 욕심이 지금보다 많을 것이고 그 돈을 지키기 위해서나 또는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 불법을 행할 가능성 또한 컬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아시고 엄청난 돈, 높은 권력, 이성의 유혹, 명예와 인기 같은 것은 애당초 오르지 못할 나무로 설정해 두셨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불법과 거짓말로 돈과 권력과 명예와 미인을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그 기회를 포기하기보다 그러한 기회를 잡기 위해 경쟁까지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우상을 숭배하지 않을 수 있게 하셨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셨고, 목사가 되어 주일을 잘 지킬 수 있게 하셨고, 부족하지만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게 하셨고,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하지 않도록 하셨고,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가 나라의 법과 교회의 법과 윤리와 도덕과 예의와 체면을 지키는 것은 나의 인격의 훌륭함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지킬만한 환경과 형편을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악마 같은 흉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더 사악한 흉악성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극악한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유태계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루돌프 아히이만이 법정에서 자신은 무죄라며, 단지 명령을 투철하게 이행한 직업정신을 가졌을 뿐이라고 항변하는 것을 목격하고“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깨닫습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 장애인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고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다고 아렌트는 주장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어떤 상황에서는 아히이만이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극악한 죄를 짓고도 정당하다는 확신으로 자기 합리화의 논리를 펼 사람들입니다. 아이히만이나 라스콜리니코프도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다음은 내가 그들이 처했던 환경에 처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세계 거의 모든 정부나 사회 집단 안에 엄청난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범죄를 예방하고 판단하고 조사하고 재판하고 처벌하는 사법부와 경찰이나 정보기관 안에서도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사회와 정부와 언론과 교육기관과 문화예술 심지어 종교단체까지 부정과 불법과 거짓으로 무질서와 혼란과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을만한 개인이나 집단을 만나기가 어려운 현실에서 속이 상하고 화가 나다가 지쳐서 체념하게 되고 생존(?)을 위해서 냉소적 자세를 취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모두 법과 질서와 윤리와 도덕과 예의와 체면과 무엇보다 가치 질서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손길이 우리를 지켜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무법천지처럼 느껴지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불법과 거짓에 부화뇌동하지 않는 경건한 이들을 남겨두셨을 것입니다. 불법과 거짓과 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들은 복된 자들입니다.
이 글을 읽는 거의 모든 이들이 그런 분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불법과 거짓이 난무하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서도 불법과 거짓을 행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때문입니다. 불법과 거짓을 행하는 이들도 경건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모든 가정과 교회와 특별히 힘들고 어렵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영적으로 한층 수준 높은 감사로 기쁘고 즐거운 추수감사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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