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적인 감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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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ㆍ2020-11-1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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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건너편 알리파크에는 이제 낙엽이 거의 다 떨어졌다. 특히 어제는 비가 많이 와서인지 떨어진 낙엽들이 땅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너부러져 있다. 낙엽뿐만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 빛에서 힘을 다해 맺어 논 도토리 열매들도 다 떨어졌다. 떨어져서 한쪽 구석에서 썩어져 가고 있는 도토리가 유독 내 눈에 들어온다. 이런 모습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 올 때면 예외 없이 추수감사절이 찾아온다.
추수감사절!
뭘 감사해야 할까? 감사헌금을 봉투에 넣으면서 이 정도 금액이면 추수감사헌금으로 최선을 다한 것 아닌가, 스스로 위안을 해 보면서도 진짜 뭘 감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난 10여 년 전 내 스스로 죽었다고 선언했던 적 있었다. 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우울증에 빠져있던 당시 난 목회의 의욕뿐만 아니라 삶에 의욕도 상실한 채 종일 집에만 있었었다.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이 오게 되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어진다, 친구들이 나와 식사라도 하자지만 식사하러 나갈 자동차에 가스가 없어 움직일 수가 없다. 단 1불이 없는 현실 앞에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내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당장 해결해야 할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할 수가 없다 보니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때 바로 추수감사절을 맞아했고 그때도 알리파크를 걸으면서 처참하게 떨어진 낙엽과 떨어진 도토리를 보면서 추수감사절은 낙엽도, 각종 열매도 그 풍성함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성함이 끝났다는 신호였다는 것을 난 그때 알았다.
추수감사절은 온갖 곡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지만 이제 이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경고 메시지도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감사는 지금까지 이렇게 풍성하게 열매 맺는 이 땅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라는 것이다, 즉 풍성한 양식을 주셔서 앞으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어서 감사가 아니라 지금까지이다. 지금까지 풍성하게 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마지막이다. 다음 추수감사절은 없다. 내년에 올해 맺었던 나무 열매가 또 맺어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비바람에 나무가 부러질지, 폭우에 나무가 뿌리째 뽑힐지, 태풍으로 열매가 다 떨어져버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내 인생이 그렇다. 올해 추수감사절까지 살게 하신 것에 감사한 것이지 올해 주신 이 풍성함으로 내년 추수감사절까지 살게 하실 하나님께 감사함이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 맞이한 이 추수감사절이 즉 이 땅에서 감사함이, 이 땅에서의 이 풍성함이 내 삶에 없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내일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종말론적일 수밖에 없다.
올해 추수감사절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풍성함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함에 앞서 이 풍성함을 누릴 수 있도록 생명을 연장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 보다 더 앞서야 하지 않을까?
풍성함을 맺었던 모든 나무들의 입사귀와 열매는 다 떨어졌다. 이제 차가운 눈보라와 긴 겨울의 추위 속에서 죽어 있어야 한다. 아니 죽은 것이다. 내년 봄 다시 꽃이 피고 잎이 솟아난다는 것은 전폭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부활의 상징이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은총을 입은 것이다.
내가 죽었다고 여겼을 때 그때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그 차가움이 나를 죽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다시 살아서 그 풍성한 열매를 안고 추수감사절을 지낸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라 말 하겠는가?
여기까지의 시간이었기에 종말론적이다.
여기까지 풍성함을 누렸기에 종말론적이다.
여기까지 감사하는 절기가 추수감사절이다.
내일은 또 새롭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만 기다릴 뿐이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38:19).
한준희 목사(뉴욕성원장로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추수감사절!
뭘 감사해야 할까? 감사헌금을 봉투에 넣으면서 이 정도 금액이면 추수감사헌금으로 최선을 다한 것 아닌가, 스스로 위안을 해 보면서도 진짜 뭘 감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난 10여 년 전 내 스스로 죽었다고 선언했던 적 있었다. 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우울증에 빠져있던 당시 난 목회의 의욕뿐만 아니라 삶에 의욕도 상실한 채 종일 집에만 있었었다.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이 오게 되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어진다, 친구들이 나와 식사라도 하자지만 식사하러 나갈 자동차에 가스가 없어 움직일 수가 없다. 단 1불이 없는 현실 앞에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내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당장 해결해야 할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할 수가 없다 보니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때 바로 추수감사절을 맞아했고 그때도 알리파크를 걸으면서 처참하게 떨어진 낙엽과 떨어진 도토리를 보면서 추수감사절은 낙엽도, 각종 열매도 그 풍성함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성함이 끝났다는 신호였다는 것을 난 그때 알았다.
추수감사절은 온갖 곡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지만 이제 이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경고 메시지도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감사는 지금까지 이렇게 풍성하게 열매 맺는 이 땅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라는 것이다, 즉 풍성한 양식을 주셔서 앞으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어서 감사가 아니라 지금까지이다. 지금까지 풍성하게 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마지막이다. 다음 추수감사절은 없다. 내년에 올해 맺었던 나무 열매가 또 맺어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비바람에 나무가 부러질지, 폭우에 나무가 뿌리째 뽑힐지, 태풍으로 열매가 다 떨어져버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내 인생이 그렇다. 올해 추수감사절까지 살게 하신 것에 감사한 것이지 올해 주신 이 풍성함으로 내년 추수감사절까지 살게 하실 하나님께 감사함이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 맞이한 이 추수감사절이 즉 이 땅에서 감사함이, 이 땅에서의 이 풍성함이 내 삶에 없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내일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종말론적일 수밖에 없다.
올해 추수감사절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풍성함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함에 앞서 이 풍성함을 누릴 수 있도록 생명을 연장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 보다 더 앞서야 하지 않을까?
풍성함을 맺었던 모든 나무들의 입사귀와 열매는 다 떨어졌다. 이제 차가운 눈보라와 긴 겨울의 추위 속에서 죽어 있어야 한다. 아니 죽은 것이다. 내년 봄 다시 꽃이 피고 잎이 솟아난다는 것은 전폭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부활의 상징이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은총을 입은 것이다.
내가 죽었다고 여겼을 때 그때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그 차가움이 나를 죽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다시 살아서 그 풍성한 열매를 안고 추수감사절을 지낸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라 말 하겠는가?
여기까지의 시간이었기에 종말론적이다.
여기까지 풍성함을 누렸기에 종말론적이다.
여기까지 감사하는 절기가 추수감사절이다.
내일은 또 새롭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만 기다릴 뿐이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38:19).
한준희 목사(뉴욕성원장로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Kate님의 댓글
Kate목사님께서 힘든시간들을 잘 버티시고 견디시고 감사하는 오늘을 맞이하신것을 축하드립니다. 목사님을 비롯하여 우리모두가 하나님의 풍성한은혜에 대한 감사절을 내년에도 똑같이 경험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