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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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0-11-0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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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은 인간존중과 인간해방을 기조로 하는 태도나 사상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나 사상은 휴머니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지만 이러한 용어에서 발생한 최초의 역사적인 운동은 르네상스 시기에 나타났습니다. 이 운동은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의 번영을 배경으로 일어났습니다. 그 운동이 의도했던 것은 로마와 그리스 언어와 문학 그리고 예술 등의 연구를 매개로 하여 교회의 권위나 신 중심의 중세적인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보편적이며 인간적인 교훈을 획득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도시 귀족의 비호를 받은 학자, 문인, 예술가 등 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어서 종교와의 관계에서 갈등이나 충돌은 첨예화되지 않았습니다. 이 운동은 14세기에 시작하여 16세기 전반기에 끝났지만, 그 여파는 15, 16세기에 독일, 프랑스, 영국 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피코 델라 미란돌라, 네델란드의 에라스무스, 독일의 후덴(Ulrich Von Hutten) 등이 주요한 대표자들입니다. 종교개혁을 거쳐 서구 시민사회가 성장함에 따라서 17,18세기에 인본주의 유산을 계승한 로크, 흄, A, 스미드, 루소, 볼테르, 칸트와 같은 시민계급의 사상가들이 신학에서 해방된 모든 인간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확인하는 인간관을 수립하였습니다. 빙켈만 (J.J. Winckelm ann), 레싱, 헤르더, 괴테, 실러 등의 휴머니즘은 고전 중시, 인간성의 조화로운 발전, 인간의 자기 구제력 등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주도된 휴머니즘은 독일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휴머니즘은 자본주의로 인한 인간의 자기소외에서 인간성 회복을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이 현대의 휴머니즘(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파시즘이나 핵전쟁의 위험을 새로운 위기 상황이라고 인식한 휴머니스트들의 결집이 이루어졌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는 자기의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휴머니즘, 또는 자연주의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어디까지나 자연적 존재로 이해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려는 것이고 철학적으로는 관념론과 대립하는 자연주의를 완성시키려 한 것입니다.
포이어바흐는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을 고하고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서구 사상사의 패러다임 전환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서양 사상사에서 줄곧 중심적 위상을 차지했던 관념론이 자연과학의 방법론(유물론)으로 대체되어가게 되었습니다. 자연과학이 세계의 작용을 해명하기 이전에 자연철학이 세계를 설명하려 했으나, 그것은 물질적 기초와 과학적 방법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사변적이고 관념적 인식론에 가까웠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념논적 인식의 종국에는 신적(神的) 실재가 자리하고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주장은 19세기 자연과학의 급진전과 관념론에 대한 반성이 서양 사상계를 뜨겁게 달구던 시대적 배경에서 유물론이라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지닌 과학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는 과학적 방법론을 현실과 역사의 전개를 이해하는데 적용하고자 하는 철학적 시도를 한 것입니다.
인간의 사상적, 정신적, 세계관적 태도를 함축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서의 휴머니즘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문 교양을 부흥시켰습니다. 그 운동이 의도했던 대로 교회의 지배와 권위로부터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드러내기 위한 인문 교양 운동, 문화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은 지식과 이성에 기초하여 인간, 자연,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진 인간성의 창조를 지향하였습니다. 이는 예술과 문학을 매개로 하여 교회와 하나님의 권위에서 해방된 인격적 개인을 옹호하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에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적 정신이 추가됩니다.
데카르트는 참된 세계 인식은 더는 신의 은총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적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기 휴머니즘은 과학적 합리성을 타고, 인간과 자연 이해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사회, 경제를 이해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과학적 합리성에 기초한 휴머니즘은 다음 세기에 계몽이라는 숙제를 남겼고, 계몽적 휴머니즘은 18세기에 등장합니다. 과학과 기술을 휴머니즘과 통합하는 것이 계몽적 휴머니즘의 과제였습니다. 이들은 과학과 기술적 진보와 마찬가지로 역사와 인간성 역시 무한히 진보하는 무엇이라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의 추상적 합리성과 기계론적 세계관에 반대하여 18세기 후반에는 독일에서 뉴휴머니즘(Neuhumanismus)이라는 정신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빈켈만, 레싱, 헤르더, 괴테, 실러 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인문주의가 그것입니다.
이런 사상적 풍토에서 성장한 마르크스는 고전적인 휴머니즘은 ‘비인간적 현실을 보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고, 진정한 휴머니즘은 현실적 조건에 대한 비판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의 휴머니즘이 인간성, 특히 인간의 정신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마르크스는 인간의 ‘물질적 삶의 조건’에 주목함으로써 휴머니즘의 본질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주장과 사상적 흐름에서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이 생겨났고, 이는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역할에 의지하기 때문에, 계급적, 당파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즘은 전후 프랑스 휴머니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상학과 생철학의 유산을 물려받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실존(휴머니즘)은 20세기 두 번에 걸친 전쟁으로 상처받은 부르주아지 ‘개인’의 피난처, 혹은 치료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즘이 강조했던 ‘사회성의 상실’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이성에 대한 신뢰와 인간성의 진보라는 공통된 믿음에 기초한 르네상스 휴머니즘, 계몽적 휴머니즘,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은 더는 교양인의 신념이 될 수 없었습니다.
현대에 등장한 생태학적 담론에서 휴머니즘은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중심주의를 낳았고, 생태계 위기와 자연 파괴를 불러온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반휴머니즘적 기조 위에서 주장되는 일련의 현대 생태 사상은 이성중심주의, 계몽적 휴머니즘을 반대하면서, 원시시대를 찬양하는 원시주의,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동등한 주체로 보는 생물권 평등주의에 기초한 전체론, 다소간 신비주의적 색채를 띤 심층생태주의로 변하였습니다.
어떤 이름의 휴머니즘이든 그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을 위하는 것을 지향하지만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에서의 출발은 인간을 해하게 됩니다. 인간 이성의 능력은 하나님과의 의존적 관계에서 긍정적으로 발휘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이성은 악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휴머니즘이 아무리 고상한 목적과 예리한 분별력으로 세상과 인간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것은 진리가 아닌 한갓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파악하는 자연과 인간은 왜곡이고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진리는 인간이 이성으로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파악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창조물에 대한 감각적인 관심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 미술의 발전은 가져왔지만, 그것은 계시를 의존하지 않고 창조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휴머니즘이 온갖 화려한 철학과 사상과 예술의 금자탑을 쌓았을지라도 그것은 바벨탑처럼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휴머니즘과 하나님 나라 가치를 혼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예술과 문학을 매개로 교회와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17세기 이후 자연과학 휴머니즘의 눈부신 발전에 지나친 인상을 받고, 18세기에는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에게 주눅이 들고 위축되며,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에 설득되고, 20세기에 이르러서 실존주의 휴머니즘에 위로를 받고, 지금은 생태학적 환경론을 신학적 종말론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휴머니즘이 이루어 낸 업적들에 매료되어 그 무신론적 뿌리를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학문과 이념과 예술과 문명, 정치와 경제와 교육 등 모든 것에서 어느 것이 더 무신론적인지 분별하고 어느 사상과 제도와 이념이 창조 질서와 보편 가치에 부응하는지를 판단하여 대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아무리 휴머니즘을 내세워도 결국은 인간을 이용의 대상이나 소모품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무신론에 눈이 가려져서 인간 이성과 휴머니즘의 한계를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비록 약점과 실수가 많아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눅 18: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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