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과 낭비를 지원하는 복지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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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0-10-3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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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만큼 인류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있는 동안에는 가난한 자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지어 타락한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리는 노동을 통해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만 하게 되었고 성실한 노동은 인간을 부요하게 하고, 게으른 자는 빈곤하게 되어 같은 환경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직면한 빈곤의 문제는 게으름 때문만은 아닙니다. 자연재해나 전쟁이나 질병도 많은 사람을 빈곤하게 만듭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빈곤의 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성경은 그 근본적 원인을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빈곤의 원인이 자연재해거나 전쟁이거나 질병이나 장애거나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다 인간의 범죄 때문입니다. 빈곤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 때문인데, 따라서 이 범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의 어떤 문제도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빈곤의 문제도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빈곤의 문제는 인간이 극복해야만 할 문제이지만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가난한 자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을 줍니다. 빈곤 문제뿐 아니라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빈곤과 질병으로부터 아무도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인류는 빈곤을 제거하기 위한 온갖 방법을 연구하고 해결책을 개발하였지만, 빈곤을 완전하게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 하고 빈곤의 해결책이 또 다른 부작용을 발생시킵니다.
인간은 타락 이후 생존을 위해 물질적 결핍이나 부족을 해결해야만 하는 숙명적 과제를 안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인류의 역사는 빈곤의 문제에 대처하고 이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 혁명을 분기점으로 근세 유럽 사회의 생산능력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물질적인 결핍 현상이 크게 완화되어 빈곤 문제가 상당할 정도로 해결되었습니다. 산업 혁명에 성공하여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나라의 중산층들은 과거의 왕족들보다 나은 수준의 풍요를 누리고 있어 이들 선진국에서는 빈곤의 문제가 거의 해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빈곤의 그림자는 풍요를 누리고 사는 현대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도 산업 혁명을 이루지 못한 나라가 많고, 그들의 빈곤 문제를 산업 혁명에 성공한 나라들이 자기들이 누리는 혜택을 어느 정도 나누어주어 상쇄시키고는 있지만,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는 말이 있듯이 선진국의 후진국 구제는 역부족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진국 안에도 빈곤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새로운 빈곤 문제인 상대적 빈곤층이 확산하여 사회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빈곤의 문제는 생존을 위협받는 수준의 저개발 국가의 절대 빈곤뿐 아니라 산업 혁명과 자유시장 경제가 창출하는 잉여 소득의 편중된 분배로 인하여 적게 가진 자를 상대적 빈곤자로 생각하는 것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산업 혁명과 경제 발전의 혜택은 주로 선진국의 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OECD 회원국들에 집중되어 있고 아직도 지구촌 인구의 절반 이상이 경제적 절대 빈곤으로 산업 혁명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구촌 인구는 약 77억 명인데, 그중 하루 1.25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 12억 명(26%), 하루 2달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 26억 명(48%) 이상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약 절반 정도가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빈곤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빈곤의 현상적 이해와 철학적 이해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빈곤이 인류에게 얼마나 절실한 보편적 문제인지 그리고 빈곤의 본질적 원인에 대한 이해와 이에 대한 처방이 금욕과 욕망 또는 경쟁과 나눔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가치 판단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는 것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빈곤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빈곤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간단하고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 빈곤을 측정하는 지표에는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소득분배의 집중도를 측정하는 다양한 지표가 있고, 정치적 빈곤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단지 소득이 부족한 것이 빈곤 문제의 전부가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은 주거, 고용, 교육, 건강, 시민권 및 정치 참여의 기회 등 다차원의 결핍 상태도 당연히 빈곤의 범주에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빈곤(poverty)이라는 용어 대신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소득과 분배가 균등하지 않은 것은 제도와 정치적 문제일 수도 있지만 성실한 노력이 더 많은 부를 창출한다는 원리적 차원에서 볼 때 정상적이고 건강한 상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가난한 자를 외면하게도 하지만 부를 창출하는 에너지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가난한 자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일해서 부를 창출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도 남을 구제할 수 있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 노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지 정치나 경제 제도의 윈리로 삼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 원리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수준 때문에 그 원리를 정제에 직접 적용할 경우 이익의 창출은 현저히 줄어들어 모두가 빈곤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빈곤에 대한 정치의 대응을 사려 깊게 예의 주시하여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는 빈곤을 정의하는 것부터 정치적입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중위소득의 50% 이하 소득자를 빈곤층으로 분류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회에서는 30% 이하만을 빈곤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원액(예를 들면 최저생계비)의 액수가 얼마일지도 나라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이렇듯 누구를 빈곤층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지원을 할지 정하는 것은 모두 다 정치적으로 결정됩니다. 누구를 빈민으로 볼 것인지, 그리고 그들에게 얼마만큼을 지원할 것인가에 관한 판단에는 절대 불변의 잣대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빈곤층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나 정당들은 유권자나 영향력 있는 집단의 요구에 따른 정책을 펴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빈곤 해결을 위한 정책에 특정 정치 세력이나 어떤 계층이나 집단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면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 빈곤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내 일처럼 걱정하는 경우가 아닌 정치 지도자나 다수의 국민은 복지 정책이 늘어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복지를 위한 지출은 점점 늘어나게 되어 결국에는 국가 경제는 파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 국가의 경우를 볼 때 한 번 채택한 복지 정책을 되돌리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복지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점점 늘어나기 때문에 과도한 복지는 필연적으로 국가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복지 정책을 채택할 때는 다음 세대와 정부를 배려해야 하지만 세계 경제와 정치가 세계화를 추구하는 대세인 데다 이상하게도 세계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다음 세대나 정부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몇몇 정치 지도자나 글로벌 기업 오너들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데만 집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향 때문에 경제적으로 일어서려다 주저앉아버리는 나라들이 생겨나고 미국 같은 초거대 경제 대국도 힘을 잃고 휘청거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어려웠던 2019년과 2020년 초 세계 경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 엄청난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의 정부는 경제 정책과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으로 좌충우돌하고 있으며 팬데믹(pandemic)이라 불리는 세계적 재난을 정쟁의 승기를 잡을 기회로 이용하고 있어 속이 상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정부지원금이 지급되면 주월리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는 현상도 복지 정책 부작용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민 모두가 어려운 때 국가가 돈을 준다면 싫어할 국민은 없겠지만, 재난을 극복하는 고전적인 지혜는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인데 정당들은 자기들의 정치 생명 연장을 위해 더 많이 주려고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국민에게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 어려운 때를 견디고 극복하자고 요구할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1980년대 초에 네덜란드는 국가적 파산에 직면하였습니다. 파업과 과소비, 방만한 재정운영, 복지국가의 의존자 문화가 전 국민의 마음을 지배하여 결국 국가적 파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국가적 파산을 당하여 황망하기만 하던 1983년 총선에서 기독교 민주당후보인 루돌프 루베르스가 총리에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총리에 당선되자마자 최초로 한 일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대 국민 성명을 발표하여 온 국민들에게 땀과 눈물과 피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1차 조치로 모든 노동자의 임금을 1%씩 깎았습니다. 또한“바세나르합의”라는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 그 합의를 통하여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단행하여 복지국가의 한 모퉁이를 헐고 개혁주의의 근검절약 정신으로 10년 만에 네덜란드는 불황의 겨울에서 헤어났습니다.
버나드 맨더빌은“다른 방도가 있다면 어느 누구도 가난해지기를 원치 않으며 어느 누구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이다. ... 결핍이 없다면 어느 누가 고생하면서 노동하려고 할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를 싫어하는 이들은 버나드 맨더빌의 이 같은 주장에 경기를 하겠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땀 흘리며 노동하게 하는 동기 부여가 이기심에 호소하는 부의 획득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게으른 생활습관 및 가치체계를 뜻하는 빈곤문화론이 단순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활 능력이 없는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아보아야 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가장 우선 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은 신구약 모두에서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도우라고 강조합니다. 정부의 복지 정책은 재난을 당하거나 질병 때문이거나 또는 사회 제도나 특별한 사정에 의하여 일정 기간 직업을 잃은 실직자를 도와주는 것이어야 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자나 낭비하는 데 쓰도록 지원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지 정책은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지만 사람들을 게으르게 하고 낭비를 돕는 부작용의 원인이 될 수 있는데, 현대의 국가들의 복지 정책들은 그런 위험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비가 미덕인 시대라고 하여도 개인이나 정부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과 근검절약 정신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빈곤 문제에 대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성경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1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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