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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이 부자 되면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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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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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사촌이 부자가 되면 춤을 춘다.”라는 유대인의 속담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이 속담은 한국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두 속담을 비교하면 한국인은 매우 이기적이고 유대인은 아주 이타적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영어에 “Turning green with envy.”라는 표현은 “부러움 때문에 질투심이 생긴다.”는 뜻인데, 이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한국 속담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배 아파하는 것은 한국인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배가 아프다고 하니까 옆에 있던 친구가 ‘빨리 사촌에게 전화해 봐. 혹시 땅을 샀는지. 아니면 병원에 가봐야지.’라고 하였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한국인의 시기심이 다른 나라 사람보다 심하다고 해도 사촌이 땅을 산 사실을 알기도 전에 배가 아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촌이 부자가 되면 춤을 춘다고 하니 은근히 배가 아파지는 것 같은 느낌이 오는데, 그 이유는 “사촌이 땅을 사면 춤을 춘다.”는 속담이 유대인의 이타심이나 성숙한 인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유대인의 이 속담이 성경의 가르침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볼 때 유대인의 민족성이나 인격적 성숙도가 다른 민족보다 훌륭하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도 다른 여느 민족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악하고 변덕이 심하고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미련하고 교활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춤을 춘다.”는 그들의 속담도 “... 춤을 춘다.”인지 “... 춤을 추라.”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것이 되었건 이는 경험을 통한 생존의 지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나라 원리는 아닙니다.

셰익스피어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매우 고약한 고리대금 업자 샤일록은 유대인입니다. 그는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약속한 날까지 갚지 못하면 안토니오의 심장 가까이에 있는 살 1파운드를 베어 갖기로 약속을 하고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안토니오는 비즈니스에 문제가 발생하여 약속한 날에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어 빌린 돈의 세 배를 줄테니 살을 베지는 말아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도인 안토니오를 극도로 미워한 샤일록은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계약을 변경할 수 없다고 하며 칼을 들고 안토니오의 살을 베겠다고 하여 안토니오는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이윽고 재판이 열리고 판사는 안토니오가 빌린 돈을 약속한 날까지 갚지 못하였으니 약속대로 샤일록에게 안토니오의 살 1파운를 베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샤일록에게 안토니오의 살을 베되 한 방울의 피도 흘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1파운드의 살을 베야지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무게라도 더 베면 샤일록의 전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판결하였습니다. 이 재판에서 샤일록은 패소하여 재산의 절반을 국가에 몰수당하고 절반은 안토니오에게 피해 보상으로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오는 피해 보상으로 받은 샤일록의 재산 절반은 샤일록의 딸 제시카가의 결혼자금으로 돌려주고 만일 샤일록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더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자 샤일록은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하고 재판장을 나오게 됩니다. 유대인 샤일록은 피도 눈물도 없는 욕심 많은 고리대금업자이고 자신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했던 샤일록에게 은혜를 베푼 안토니오는 기독교인입니다. 샤일록은 비록 셰익스피어라는 작가에 의해 묘사되는 인물이지만 이 내용은 그 시대에 유대인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는 오랜 역사에 걸쳐 개인과 민족과 사회에 의해 서로 다른 입장에서 제기되고 비판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차별과 학대의 대상이기도 하고 또한 지역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기도 합니다.《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터널》의 울프, 《유대인 쥐스》의 쥐스 등은 유대인에 대한 악의적인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고 비판되기도 합니다. 기름과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 과도한 육욕, 오리엔트적 외모 등으로 그려지는 것이 그런 예라고 지적되고 있습니다.‘시온 산 현인들의 의정서’는 유대인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증거로 이용되고 있고, 〈영원한 유대인〉,〈로스차일드 가문〉같은 영화는 사이비 다큐멘터리로서 모든 경제적 정치적 난제들이 유대인 때문에 발생했다고 매도한 것으로 비판되기도 합니다. 일련의 이런 것들로 인해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문화적 편견이 사람들에게 반유대주의적 적의를 심어주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특유의 배타적 종교 생활 형태와 지나치게 이기적인 경제 관념은 지역 사회인들에게 비호감을 사기에 충분한 원인 제공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사회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게 마련인데, 1달러를 벌기 위해 지옥까지 내려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유대인들의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비난이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기부 전통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식들에게 물려주어 흥청망청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수입의 10%를 의무적으로 기부하고, 20%는 보통, 30%는 좀 하는 정도이고, 40% 이상은 많이 하는 사람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돈 많은 부자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기부 많이 하는 부자를 존경하는 것도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자기 자녀가 공부하기 싫어하면 남의 자녀를 공부시킨다는 그들의 태도는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사려 깊고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도 그들만의 기준이 있는데, 자립하지 못한 사람을 대상으로 돕되 아내, 부모, 성년의 자녀, 형제자매, 친척, 동네 사람, 민족, 나라 밖에 있는 민족, 다른 민족 순으로 돕는다고 하니 그들은 부자가 자기 동네에 이사를 오면 동기야 어찌 되었건 춤을 출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촌이 부자 되면 춤을 춘다는 것은 덕 보기를 기대해서이지 남이 잘되는 것을 나의 기쁨으로 삼으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별수 없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 한국인이나 사촌이 부자 되면 춤을 추는 유대인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사촌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것은 사촌에게 물질적 손해를 끼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부지리를 기대하여 사촌이 부자 된 것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배 아파하는 것보다 나쁜 것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볼 때 이런 것 따져서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일 것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다르지 않은 한 가지 공통점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이지만,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면 죄인끼리라도 서로에게서 배울 점도 많고 유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공자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하여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촌이 땅 사는 것을 배 아파해서도 안 되고, 무임승차나 어부지리를 기대하며 춤을 추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복을 헤아리며 감사하는 것도 귀하지만, 주위의 다른 사람이 받은 복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은 더 귀한 감사입니다. 자기가 받은 복을 헤아릴 줄 아는 것도 귀한 것입니다. 현재의 상태를 과거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보기도 하고, 뒤집어 보기도 하고, 무엇보다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평가할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속 썩이는 자녀가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집을 나가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속 썩이는 남편이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고, 내야 할 세금이 많다면 수입이 많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해 불평이 많다면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고, 일이 많아 피곤하다는 것은 아직 일할 힘이 있다는 것이고, 빨랫감이 많다는 것은 옷이 많다는 것이고, 나에게 불평하는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나에게 관심이 있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무엇이든지 불만스러울 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오히려 감사의 이유와 조건이 생깁니다. 관점을 달리하면 불평할 이유가 감사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스러운 일이 있다면 다른 각도에서 그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감사해야 할 일을 불평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중에는 하루 두 끼 먹는 것이 꿈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 두 끼 먹는 것이 꿈인 사람들에 비하면 하루 두 끼를 먹든지 세 끼를 먹든지 자기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스러운 일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감사할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감사가 이 정도의 수준에 머물면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일어난 일을 통하여 감사하였습니다. 자기 일이 잘되어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일로 감사하는 것도 귀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하나님께 복 받은 것으로 감사했고(고전 1:4),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받은 복을 인하여 감사했고(엡 1:16), 빌립보 교회 교우들이 받은 은혜와 복을 기억하며 감사했고(빌 1:3), 골로새 교회 교우들이 받은 복을 인하여 감사했고(골1:3),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을 이하여 기뻐하며 감사하였습니다(살전 1:2). 바울은 교우들을 생각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고 감탄사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감사가 얼마나 큰 감사인가를 말해줍니다.

우리의 감사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우리의 감사에는 하나님의 뜻이나 이웃의 복이나 다른 사람의 형통보다 나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내용이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은 기뻐해줄 수 있지만 구체적이고 가까운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수준은 못됩니다. 나라 경제가 부흥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뻐하고 감사 하지만 형제나 친구가 나보다 잘 되면 셈을 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좋은 일 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감사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코로나19 펜데믹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남의 복을 기쁨과 감사의 이유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삽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까?”(살전 3:9)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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