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를 내고 욕을 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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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01-0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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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저 앞에서 차장이 승객들의 승차권을 검사하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리 승차권을 꺼내 보여주려고 주머니를 뒤졌지만 아무리 찾아도 승차권이 없었습니다. 승차권이 없어진 것을 안 그가 매우 당황해하며 여기저기를 뒤지고 있는데 차장이 다가와 아인슈타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누구신지 잘 압니다. 틀림없이 표를 사셨을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고맙다는 듯이 빙긋 웃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며 좌석 아래와 이곳저곳을 뒤지며 승차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차장은 “박사님, 걱정하실 것 없다니까요. 저는 선생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지는 나도 잘 알아요. 그런데 승차권이 없으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천재 물리학자가 승차권을 잃어버려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며 당황해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인지 누가 만들어 낸 유머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2020년은 역사에서 빼버리고 싶다고 하였는데, 2020년은 우리 모두에게 잃어버린 한 해였습니다. 잃어버린 2020년 때문에 우리는 아인슈타인처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새해를 맞아서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나누긴 하지만 대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코로나 백신은 언제쯤 맞게 될지, 백신의 효과는 있을지, 부작용은 없을지, 경제 폐쇄는 언제쯤 풀릴지, 여행은 언제쯤 자유로워질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떤 놈인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지속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모든 것들이 2020년으로 막을 내리고 말 그대로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송구영신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송구영신이란 사람들이 임의로 의미를 만들어 붙여 놓은 것이지 사실 모든 것은 새해가 된다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이어지듯 역사는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는 것입니다.
2020년 한 해 동안 사람들은 날마다 불안했습니다. 일상의 질서가 깨어져서 내일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안했습니다. 질서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고, 예측이 가능하면 안심할 수 있는데 정치 경제 외교 등 어느 분야의 어떤 전문가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안했습니다. 질서를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는 법입니다. 모든 사람이 법을 잘 지킨다고 모든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법을 잘 지키면 문제가 발생하고 재난이 닥쳐도 불안을 어느 정도 줄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2020년은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키지 않아 불안을 몇 배로 증폭시켰습니다. 정치인을 비롯하여 너무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관행으로 불법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해왔던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건국자들은 자신을 희생해가며 애국을 했는데 지금은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며 나서는 자 중에 애국은커녕 망국적 행태를 일삼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세계화라는 명분 아래 나라에 엄청난 손실을 끼치며 개인의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한 정치인과 글로벌 기업인과 언론인이 부지기수인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코로나 재난과 혼란한 대선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벌집을 쑤셔놓은 듯 조용하고 평온한 데는 한 곳도 없습니다. 한국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미국 사회의 정치, 경제, 군사, 언론, 교육, 외교, 무역, 환경, 의료 등 모든 분야가 얼마나 심각한 관료주의와 불법과 부정에 찌들어 있는지가 폭로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에 비유한다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습니다. 인권과 자유를 우선 가치로 여기는 미국이 그 인권과 자유를 위해 제정된 법을 이렇게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라고 있습니다. 나라와 국민과 인류를 위해 좋은 일 한다며 나서는 자들에 의해 법과 질서와 보편 가치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개인의 성도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해 놓았고 가족 관계도 해체하려고 하는 판국에 국가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할 리가 없습니다. 세계와 인류를 위한다며 가정과 국가의 정체성도 허물어버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가족을 먼저 사랑해야 하고, 다른 나라도 위해야 하지만 자기 나라를 먼저 위하는 것이 질서입니다. 내 가족과 내 나라를 먼저 사랑하는 것과 더 불쌍하고 더 약한 자를 먼저 사랑해야 하는 사랑의 우선순위는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입니다. 자기 가족을 잘 돌보지 않는 자가 애국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나라에 현저한 손해를 끼치며 세계화를 부르짖는 것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지금의 글로벌 기업들이나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들은 세계화주의를 부르짖는 이기적인 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온 세계를 위협하는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백신 개발조차도 그런 이기적인 자가 독점하려고 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이기적인 욕심이 비단 세상 정치와 경제와 언론 등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의 중대한 핵심 교리를 논하는 종교회의조차도 세상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정치적 결탁과 이해관계로 인하여 심각하게 왜곡되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정치적인 욕망이나 사적인 이기심으로 왜곡된 종교회의를 통해서도 매우 소중한 교리를 채택하게 하셨고 지금까지 교회가 그 덕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종교회의가 최초의 종교회의인 니케아회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는데,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미국 사회는 온갖 불법과 거짓이 난무하지만 악한 자들과 거짓된 자들의 못된 행동이 지배적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온통 불법과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중요한 우리의 과제입니다. 불법과 거짓이 판을 쳐도 일절 못 본 체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구약의 의로운 선지자들처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불법과 불의에 맞서서 싸울 것인지, 우리는 오늘도 망설이고 갈등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비겁하고, 그렇다고 의로운 선지자들처럼 나설 용기도 없습니다. 어쩌면 엘리야 때에 드러나지 않았던 칠천 명 의인들의 처신이 지혜로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다 의로운 선지자처럼 나설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엘리야 때에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철천 명이라고 자처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불의를 보고 외쳐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잠잠하고 기다릴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그 두 경우를 딱 부러지게 구별하기란 사실상 어렵습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인데, 성령님의 인도를 분별하는 것도 역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시고 종합하게 하시고 결정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매 순간 성령님이 그렇게 하도록 간섭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내가 성령님을 따라 행하다가 잘못하면 성령님께서 그 잘못을 깨닫게 해주시고 바로 잡아 주시겠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생각하고 결심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믿음과 분별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리를 위하는 일에 온유하면서 용기도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우리를 너무 화나게 하고 입을 거칠게 만듭니다.
지난 2020년 한 해 동안 사람들의 마음과 입은 몹시 거칠어졌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온갖 거짓 뉴스와 정보를 접할 때마다 화가 나고 욕이 절로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강도를 향하여 화를 내고 욕을 해도 비난하니까 그런 비난이나 욕이나 위협은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대적들을 향하여 화를 많이 냈고 욕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의로운 선지자들도 악한 백성들을 항하여 독설을 쏟아냈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도 때로는 화를 내시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의로운 주님은 화를 내시고 욕을 하셔도 괜찮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 될까요? 설교자인 목사에게는 언제나 떨쳐버릴 수 없는 부담이 있습니다. 강단에서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큰 소리로 선포하지만, 강단을 내려오는 순간 수많은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며 “너는... ?”라고 하는 것 같아서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런 부담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누가 의도적으로 악하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진리를 파괴하려 한다면 그렇게 하는 자를 향하여 화를 내고 욕을 할 것입니다.
나는 화를 내고 욕을 할테다
별 이유 없이 미운 사람이 있다
보기만 해도 욕이 나오는 인간이 있다
거짓말 하는 목사가 있다
공부하지 않는 무식한 교수가 있다
돈 힘 명예 좋아하는 정치인이 있다
관료주의에 농익은 공무원이 있다
여자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
아부하는 판사가 있다
더러운 국회의원이 있다
걸레 같은 기자가 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무지랭이 국민이 있다
누가 달을 쳐다보며 복수를 다짐할까
누가 별을 쳐다보며 증오심을 키울까
누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남을 욕할까
누가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불평할까
누가 아름다운 꽃을 보며 남을 미워할까
누가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까
바람의 색깔을 분별할 줄 몰라도
햇볕의 수를 셀줄 몰라도
진리 학위 없어도
정의 라이센스 없어도
늘 사랑에 서툴러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이 있다
진리 편을 들지 않으면
착한 사람을 비난하면
힘 없는 사람을 괴롭히면
빽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험담하면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면
뇌 없는 인간들이 패거리를 지으면
무신론을 감추고 정의 코스프레하면
큰 일은 축소하고 작은 것을 과장하면
화나는 일을 보면서 화를 내지 않으면
나는 화를 내고 욕을 할테다
죄인이 죄인에게 화내고 욕하는 것을 용서하소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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