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 성동격서(聲東擊西)가 성공의 비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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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0-12-2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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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은 살아남고 싶으면 남을 속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나만 손자병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배우기 때문에 나 또한 남에게 속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남을 속여서 이기고 이득을 취하거나 살아남으려면 내가 남을 속이되 나는 속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속지 않으면서 남을 속여서 이기는 것이 손자병법의 전술 전략입니다. 내가 남을 속인다는 것은 속일 상대가 있다는 것인데 상대도 나처럼 손자병법을 배웠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더 잘 속이는 자가 이길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온통 거짓과 모함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이전투구의 난장판이 되고 있습니다.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란 상대를 속이는 것이 병법이라는 뜻입니다. 힘이 있으면서 없는 듯이, 쓰면 쓰지 않는 듯이, 가까우면 먼 듯이, 멀면 가까운 듯이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적을 이롭게 하여 적을 유인하고, 적을 혼란하게 하여 이를 취하며, 적이 충실하면 대비하고, 적이 강하면 피하라고 합니다. 적을 노하게 하여 교란하고, 나를 낮추어 적을 교만하게 하며, 적이 편안하면 힘들게 하고, 적이 누구와 친하면 그 사이를 이간시키라고 합니다. 적이 대비를 소홀히 하는 곳이나 예기치 못한 곳을 공격하여 적의 판단을 혼란시켜 공격하여 이기는 것이니까 거짓말을 하든지 과장을 하든지 엄살을 부리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병자 궤도야인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성동격서(聲東擊西)입니다. 성동격서란 동쪽에서 소리를 내면서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의미이며, 적을 유인하여 한쪽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그 반대쪽을 치는 전술입니다.
병법이란 적과 싸우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술 전략입니다. 전쟁은 특수한 상황이기에 병법에 윤리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무리인 것이 사실입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범이지만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는 말이나,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라는 말은 전쟁과 일상이 전혀 다른 판단 기준에 의해 평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을 이끌었던 로버트 리 장군은 “전쟁이 끔찍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전쟁을 너무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참혹하고 끔찍한 전쟁을 선호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함락한 후 철저히 파괴하였습니다. 전쟁 전 카르타고의 인구는 25만 명이었으나 전쟁에서 패한 뒤에는 5만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자는 힘없는 노인이나 어린이와 부녀자였는데, 로마군은 이들을 아프리카의 외진 곳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흔적을 없애려고 성벽, 신전, 민가, 선착장, 창고 등 모든 건물을 부쉈으며 돌덩어리와 흙밖에 남지 않은 땅을 가래로 갈아 엎어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려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로마에서 땅에 소금을 뿌리는 것은 신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고대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리브는 바빌론을 함락시킨 뒤 모든 사람을 죽여 바빌론 시가지는 시체로 가득 찼습니다. 집과 사원, 성벽 등 건물을 천장부터 바닥까지 부수고 불을 질렀으며 바빌론 한복판에 운하를 파고 그곳의 물을 도시로 넘치게 해서 홍수를 일으켰습니다. 14세기 말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티무르는 이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직접 정벌에 나서 주민 7만 명을 죽이고 성 밖에 해골로 피라미드를 쌓았습니다. 티무르는 인도 정벌에서 델리를 점령한 뒤 10만 명이나 되던 포로를 모두 처형하는 잔혹함을 보였습니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것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성을 막아보려고 국제법을 만들어 민간인을 죽이는 것이나 대량학살을 법으로 금지하였습니다. 하지만 국제관계에서는 힘이 곧 정의이기에 법이란 것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다른 많은 사람이 죽게 될 특수 상황이라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적을 속이라는 손자병법이라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집에 침입한 강도가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윤리나 법을 곧이곧대로 적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손자병법을 일상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국제관계에서 일어나는 전쟁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이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손자병법을 성공과 출세를 위한 비법으로 배우고 가르치지만 기독교인들도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일상의 현장이 전쟁터와 같으니까 병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성경도 그리스도인의 일상이 전쟁이라고 하니까 개인의 일상의 현장이나 국제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전쟁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일상이나 국제관계에서의 무역이나 외교가 무기로 싸우는 전쟁과 같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쟁이나 외교나 심지어 국내 정치에서조차 전쟁의 방법인 손자병법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님은 목사들도 손자병법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손자병법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과 그것을 삶이나 목회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서조차 손자병법이 지혜와 능력으로 취급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손자병법 같은 거짓말이나 속이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 세상의 모든 분야가 손자병법으로 대표되는 전술 전략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정치와 언론에서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말이 자주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이는 손자병법이 정치와 언론 같은 데서 공공연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이기기 위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CNN 방송국에서는 편집회의를 통해 손자병법을 최대한 활용하였습니다. 대통령을 정상인이 아닌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지난 4여 년 동안 줄기차게 대책회의를 하여 전술 전략을 세웠고 그와 같은 전술 전략에 의해 방송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CNN 뉴스를 본 많은 사람은 트럼프를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트럼프를 생각 없는 사람, 아무 말이나 즉흥적으로 내뱉는 사람, 백인 우월주의자, 좌충우돌하는 인격 장애자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득권층이 트럼프를 싫어하는 이유는 트럼프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으로 있으면 자기들의 기득권에 손해가 되기 때문에 손자병법을 써서라도 그를 대통령에서 끌어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적을 물리치기 위해 사용하는 병법을 정적과 국민을 상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을 사용하면 온갖 거짓말과 모함과 음모가 정당화 됩니다.
어떤 얌전한 여성이 친구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은 동의 하지만 트럼프의 인간성은 싫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친구가 트럼프의 인간성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묻자 그녀는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렇게나 생각 없이 말하고 교양 없이 행동하는 게 맘에 안 든다고 하였습니다. 친구가 또 물었습니다. 트럼프가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교양 없이 행동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거야 모든 언론이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CNN의 성동격서에 속은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트럼프를 옹호하거나 지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트럼프를 욕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성동(聲東)일 뿐이고 격서(擊西)의 대상은 교회와 기독교, 나아가서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나 계몽주의나 과학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이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동쪽에서는 인권, 자유, 평등, 정의, 문화, 예술, 차별금지, 복지 등을 큰소리로 주장하지만 그 소리에 사람들이 인상을 받고 정신을 빼앗길 때 서쪽에서 기독교와 교회의 영향을 모든 영역에서 지워버리려고 공격해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계몽주의가 반대했던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의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그로 인해 나타난 교조주의였다고 하지만 그것도 결과적으로 사탄의 성동(聲東) 전술 전략으로 이용되었고 격서(擊西)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화석화된 정통주의로 변질한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까지 계몽주의 성동(聲東)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교회 안에 무신론이 둥지를 틀게 되었고 교인들이 병법까지 지혜와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실제적 무신론자가 된 것입니다. 실제적 무신론이라 함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전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무신론적 방법론을 선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정치인의 발언이나 정당의 정책 또는 언론에서 전하는 정보와 소식들은 성동(聲東)일 가능성이 큽니다. 갑자기 어떤 사건 사고나 새로운 정책의 소식이 전해지면 다른 쪽에서 무슨 일이 덮이거나 축소되거나 과장되거나 왜곡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만큼 윤리와 도덕이 무시된 병법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전략은 계몽주의를 통해 신학과 철학과 사상을 이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이성에 비춰 합리적인지를 판단하는, 종교와 이성의 타협적 형태로서 18세기의 주된 사조인 이신론(Deism)의 등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신론자들은 창조의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그 하나님의 인간사에 대한 개입은 부정합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구별하였으며, 하나님도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신론이 일반 대중에게 끼친 영향력은 미미하였지만 18세기 말에 이르러 무신론이 그 배턴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교회는 초자연적인 성경 계시나 하나님 존재에 대한 설명이나 가르침을 포기하고 합리주의자들도 인정하는 도덕적 이야기나 사회 정의나 기후나 환경 문제 같은 류의 이야기로 메시지를 바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셨는데, 이는 불신 세상을 향하여서 하신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세상보다 교회가 먼저 결정하였고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의 주장도 기독교인들에게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병법을 정치와 경제에 도입할 뿐 아니라 교회까지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온갖 그럴듯한 주의 주장을 앞세우거나 성동격서의 병법을 사용하여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예수님이 아닌 산타인 것도 어쩌면 사탄의 전력인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3,2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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