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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수는 물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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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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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사고로 바다에 표류하게 되면 그 바다가 아무리 청정 바다라고 해도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목이 마른 것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의 수분이 부족할 때 세포의 요청으로 뇌가 물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닷물을 마시게 되면 바닷물 속에 있는 소금과 염화마그네슘 같은 염분이 혈관으로 흡수되어 혈액의 이온 농도를 증가시키게 되고 세포 쪽은 상대적으로 이온 농도가 연한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이온 농도를 같게 맞추어 균형을 이루려는 성질로 인해 물만 이동이 가능한 세포막을 통해 물을 이동시키게 되어 세포에 있던 물이 혈액 쪽으로 이동하여 농도를 같게 만드는데, 이 현상을 삼투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물을 받아들인 혈관은 팽창하여 혈압이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세포는 가지고 있던 물을 잃어버려 뇌에 물을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어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포는 물이 없으면 죽게 되므로 물이 부족할수록 사람은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는데,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면 절대 바닷물을 마시지 말라는 것은 이러한 과학적 이유 때문입니다. 바닷물에서 정신없이 놀 때 갈증을 느끼는 이유는 실수로 바닷물을 먹었기 때문일 수가 있다고 합니다.

바닷물의 염분 농도가 우리 몸보다 높아서 바닷물 1리터를 마시면 조만간 1리터 이상의 수분을 배출하게 되어 탈수의 고통과 죽음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은 상식이기 때문에 누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정작 심각하게 목이 마른 상황에 부닥쳤을 때 그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인생을 고해라고 하는데, 사고로 바다에 표류하게 된 사람이 극심한 갈증으로 바닷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은 모든 인간이 겪고 있는 고해와 같은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해라는 메타포는 질병일 수도 있고 재난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 중에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인생의 극심한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극적인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그 주인공은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한 여인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시는 중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를 보면 요단강이 남북으로 흐르는데, 남쪽에는 예루살렘과 사해 바다가 있고 북쪽에는 갈릴리 호수와 예수님의 초기 활동지역인 갈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갈릴리 중간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든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든지 사마리아를 거쳐 가야만 했습니다. 이는 마치 워싱턴에서 보스턴을 가려면 반드시 뉴욕을 거쳐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먼 길을 돌아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사마리아를 거쳐 가지 않고 먼 길로 돌아다녔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스라엘에도 극심한 지역감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출신들은 미국인들과 직접 말을 섞지 않으려고 같은 영어를 사용하면서도 통역을 세워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는 영국인들이 미국인들을 낮추어 보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주 많이 업신여기고 낮추어 보았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들의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피하여 다니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데, 사마리아 지역의 유대인들은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유대인의 혈통을 순수하게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인데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지역을 경유하려고 작정하셨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여행 중에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라는 동네에 도착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거리를 구하러 마을로 들어갔고, 예수님은 목이 마르셔서 우물가로 가셨습니다. 그때는 한낮인데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중동 지역의 한낮은 너무 덮기 때문에 활동할 수 없어서 낮잠을 자거나 쉬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그 시간에 물 길으러 온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할 속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이런 장면은 흔히 있는, 낯설지 않은 장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이고 그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일은 파격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의아하게 반응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그 말을 단순히 목마른 나그네의 우물물에 관한 이야기로만 이해하고 대꾸한 것입니다. 몇 마디의 대회가 진행된 후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정색하고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이 반응이 바로 우리의 실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다시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것에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는 이 여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영생수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관심을 보인 것은 다시는 우물에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생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생수와 이 여인이 구하는 생수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는 실제의 물이 아니라 메타포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는 우물에서 얻을 수 있는 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다시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물을 구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물에 대한 이 여인의 관심은 많은 그리스도인의 관심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힘들고 곤혹스러운 일은 우물에 물 길으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물 길으러 가는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한낮에 물 길으러 가야 하는 그 여인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실존입니다.

옛날에는 우물가가 요즘으로 말하면 인터넷입니다. 거기서 온갖 뉴스를 다 얻을 수 있고 댓글이 달리기도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우물가에 가서 여러 뉴스를 듣고 여러 정보도 얻을 수 있어서 유익합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다릅니다. 자기 자신이 뉴스거리이고 가십거리임을 잘 압니다. 그래서 우물가가 싫었습니다.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다면 그처럼 반가운 일이 없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는 않을 생수! 그녀는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대박입니다. 그 여인은 그 물을 나에게 주어 다시는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과 인간의 요구가 빗나가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하지 않고 다시 물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되는 기적의 생수를 구합니다. 절대 주리지 않을 떡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 생수는 물이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그 떡은 떡이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떡을 주고 물을 주는 기독교가 되었고 기독교인들은 떡과 물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건강에 목말라 있습니다. 돈에 목말라 있습니다. 인정과 인기와 존경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할 기적을 바라고 구합니다. 나이 80이 되어도 100m를 10초에 주파할 수 있는 건강,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헌터 바이든도 괜찮습니다. 인기와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과 학문과 명예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 물을 나에게 주어 다시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보장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렇게 되었을까요? 왜 우리는 다시 물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되는 기적과 대박에 집착하게 되었고, 왜 다시는 주리지 않을 떡에 집착하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이해하고 구하는 생수는 생수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구하는 생명의 떡은 생명의 떡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왜 영원한 생명수이신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다시 땀 흘리지 않아도 될 우물물에 집착할까요?

사람들은 삶에 너무 지쳐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라는 말을 왜 다시 물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물로 오해를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혼의 실패, 인간관계의 실패, 경제적 궁핍, 형편없는 스펙, 권력도 배짱도 없고, 무시와 경멸과 왕따에 어려운 경제,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과 불편함과 제약 등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사마리아 여인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한 방에 날려버릴 비결이 있었으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람들의 그러한 수요를 잽싸게 파악하고 다시는 물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될 비결의 복음을 만들어냈습니다. 영혼이 구원 받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몸도 건강하게 되는 복음을 개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애처로우리만치 기적, 축복, 형통, 건강, 출세 등에 집착합니다. 교회의 메시지는 성경적이니 개혁이니 예배 회복이니 온갖 좋은 말로 포장되어 전해지지만 결국은 다시 물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될 대박이나 기적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게서는, 그런 것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게 하는 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마실수록 갈증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다시 물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될 물을 구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영생수이신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이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영생수이신 주님을 만나게 되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을 피하던 그 여인이 사람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늘 사람들의 비난과 따가운 눈길을 피하여 살았는데, 이제 그 여인에게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그녀의 신분이 변화되거나 말솜씨가 좋아진 것이 아니고 그 여인의 삶의 지향성과 방향성이 달라졌습니다. 그 능력의 원동력이 바로 그 안에서 생수가 영생하도록 솟아나게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그 여인은 다시 물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될 물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든지 기쁜 마음으로 물 길으러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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