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 목사 "세속적 율법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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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3-08-2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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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저자가 어떤 형편에서 어떤 마음으로 기록했는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했던 시대적 상황을 상상해보면 글을 쓴다는 것이 요즘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필기도구가 요즘처럼 다양하지 않았고 편하게 앉아서 글을 쓸 책상이나 걸상도 변변치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는 전체가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2천 년 전 필기도구가 열악했던 시절에 이 정도의 긴 글을 쓰려면 오늘날 책 한 권을 쓰는 것보다 힘들었을 것입니다.
글을 쓰는 일은 창조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장면을 탈고하면서 39번을 고쳐 썼다고 합니다. 글이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줄줄 흘러나오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은 기자가 헤밍웨이에게 "선생님, 글 잘 쓰는 비결을 알려주십시오”라고 하자 “글을 잘 쓰는 비결은 따로 없고, 타자기 앞에 앉아서 피를 철철 흘릴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글 쓰는 일을 마치 무슨 숙련된 기술처럼 생각하여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싶어 합니다. 글 쓰는 일이 기술처럼 숙련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글을 쓰는 일은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이고 가치관의 실현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소명의 몸부림입니다. 글 쓰는 일은 단순한 기술이 아닙니다.
바울은 늙었고 시력도 좋지 않아 글 쓰는 일을 혼자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로마서를 혼자 책상에 앉아서 직접 쓴 게 아니라 그의 옆에는 글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얼마나 열악한 형편에서 이 편지를 기록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로마서 16:22절을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대필한 더디오는 바울이 말하는 걸 받아쓰다가 마지막 인사 대목에서 자기 개인 인사말을 덧붙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읽다가 보면 당시 바울의 심정이 매우 격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쓰다가 울컥하는 격정의 순간이 있었고 그런 심경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로마서 9:3절은 매우 격앙된 바울의 심경을 엿보게 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은 유대민족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는 보통 유대인이 아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 할 정도로 유대교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유대교에 대한 열정이 철저했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박해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그는 여러 번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뒤로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나 베드로보다 더 열정적인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갈라디아서 1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초기 기독교 안에서 누구보다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야고보와 베드로와도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절 이하에 따르면 바울은 베드로를 위선자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이런 갈등의 중심에는 율법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로마서에서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유대교에 속한 이들은 율법으로 의로워진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데는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된다고 믿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강경한 태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유대인들을 생각할 때 견딜 수 없이 답답한 마음으로 격정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정통 유대인의 눈에 율법을 포기한 사람일 뿐만이 아니라 유대교를 배신한 배교자로 보였습니다. 사실 정통 유대교인들이 볼 때 로마서 전반부에는 비난받을만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율법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그런 비난이 오해에서 불거졌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동족이나 유대교를 배신하거나 율법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로마서 9:3절에서 격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은 유대인 형제자매를 위한 일이라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말은 일종의 문학적 표현입니다. 바울의 믿음과 믿음 안에서 바라는 장래에 대한 소망에 대한 그의 고백과 여러 진술을 생각할 때 그 자신이 실제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후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포기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다음에는 자기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5~8). 바울의 격정적인 태도와 진술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바울을 배신자로 여겼고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 유대인들도 바울의 그러한 태도를 과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격정적인 태도 즉 과격하다면 과격한 발언을 이해하려면 그 발언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배경은 로마서 8:31~39절입니다. 이 단락에는 9:3절과 대구를 이루는 구절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롬 8: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야.”
8:39절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 끊어질지라도’라고 하였지만, 그 전에 바울은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하며, 그 어떤 세상의 세력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고 단언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이런 진술은 논리적이지 않고 말이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울의 진술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가 주장한 대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려는 세력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입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려는 것들입니다.
38절과 39절에는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 현재 일과 장래 일, 능력, 높은, 깊음, 다른 피조물도 그런 세력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오늘의 우리 일상적인 개념으로 바꾸면 삶을 포기하게 할 수 있는 가난, 실직, 비난, 고독, 허무, 오해받음, 죽음, 장애, 난치병, 악한 권력자 등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 총망라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 떨어지면 사람들은 삶에 대한 의욕이나 열정을 잃게 됩니다. 이런 요인 때문에 신앙까지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저주스러운 상황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서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31~39에서 ‘끊을 수 없다.’라는 표현 못지않게 또 다른 강한 표현을 반복했습니다. 로마서를 집필하면서 격앙된 바울의 격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31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고, 33절에서는 ‘누가 고발하리요.’라고 했으며, 34절에서는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세력도 대적하지 못하고, 고발하지 못하고, 규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강렬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바울의 확신이고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옳다.’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더는 율법이나 세상이 말하는 기준으로부터 인정받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입니다. 이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에게 진실하게 사랑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아쉬울 게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글을 쓰는 일은 창조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장면을 탈고하면서 39번을 고쳐 썼다고 합니다. 글이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줄줄 흘러나오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은 기자가 헤밍웨이에게 "선생님, 글 잘 쓰는 비결을 알려주십시오”라고 하자 “글을 잘 쓰는 비결은 따로 없고, 타자기 앞에 앉아서 피를 철철 흘릴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글 쓰는 일을 마치 무슨 숙련된 기술처럼 생각하여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싶어 합니다. 글 쓰는 일이 기술처럼 숙련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글을 쓰는 일은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이고 가치관의 실현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소명의 몸부림입니다. 글 쓰는 일은 단순한 기술이 아닙니다.
바울은 늙었고 시력도 좋지 않아 글 쓰는 일을 혼자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로마서를 혼자 책상에 앉아서 직접 쓴 게 아니라 그의 옆에는 글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얼마나 열악한 형편에서 이 편지를 기록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로마서 16:22절을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대필한 더디오는 바울이 말하는 걸 받아쓰다가 마지막 인사 대목에서 자기 개인 인사말을 덧붙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읽다가 보면 당시 바울의 심정이 매우 격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쓰다가 울컥하는 격정의 순간이 있었고 그런 심경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로마서 9:3절은 매우 격앙된 바울의 심경을 엿보게 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은 유대민족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는 보통 유대인이 아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 할 정도로 유대교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유대교에 대한 열정이 철저했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박해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그는 여러 번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뒤로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나 베드로보다 더 열정적인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갈라디아서 1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초기 기독교 안에서 누구보다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야고보와 베드로와도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절 이하에 따르면 바울은 베드로를 위선자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이런 갈등의 중심에는 율법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로마서에서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유대교에 속한 이들은 율법으로 의로워진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데는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된다고 믿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강경한 태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유대인들을 생각할 때 견딜 수 없이 답답한 마음으로 격정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정통 유대인의 눈에 율법을 포기한 사람일 뿐만이 아니라 유대교를 배신한 배교자로 보였습니다. 사실 정통 유대교인들이 볼 때 로마서 전반부에는 비난받을만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율법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그런 비난이 오해에서 불거졌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동족이나 유대교를 배신하거나 율법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로마서 9:3절에서 격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은 유대인 형제자매를 위한 일이라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말은 일종의 문학적 표현입니다. 바울의 믿음과 믿음 안에서 바라는 장래에 대한 소망에 대한 그의 고백과 여러 진술을 생각할 때 그 자신이 실제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후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포기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다음에는 자기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5~8). 바울의 격정적인 태도와 진술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바울을 배신자로 여겼고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 유대인들도 바울의 그러한 태도를 과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격정적인 태도 즉 과격하다면 과격한 발언을 이해하려면 그 발언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배경은 로마서 8:31~39절입니다. 이 단락에는 9:3절과 대구를 이루는 구절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롬 8: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야.”
8:39절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 끊어질지라도’라고 하였지만, 그 전에 바울은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하며, 그 어떤 세상의 세력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고 단언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이런 진술은 논리적이지 않고 말이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울의 진술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가 주장한 대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려는 세력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입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려는 것들입니다.
38절과 39절에는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 현재 일과 장래 일, 능력, 높은, 깊음, 다른 피조물도 그런 세력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오늘의 우리 일상적인 개념으로 바꾸면 삶을 포기하게 할 수 있는 가난, 실직, 비난, 고독, 허무, 오해받음, 죽음, 장애, 난치병, 악한 권력자 등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 총망라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 떨어지면 사람들은 삶에 대한 의욕이나 열정을 잃게 됩니다. 이런 요인 때문에 신앙까지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저주스러운 상황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서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31~39에서 ‘끊을 수 없다.’라는 표현 못지않게 또 다른 강한 표현을 반복했습니다. 로마서를 집필하면서 격앙된 바울의 격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31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고, 33절에서는 ‘누가 고발하리요.’라고 했으며, 34절에서는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세력도 대적하지 못하고, 고발하지 못하고, 규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강렬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바울의 확신이고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옳다.’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더는 율법이나 세상이 말하는 기준으로부터 인정받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입니다. 이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에게 진실하게 사랑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아쉬울 게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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