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에서 심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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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3-08-1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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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그 뛰어난 호기심으로 무엇이든지 잘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말과 행동을 배우고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별하고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배운 단어를 응용하는 것도 배웁니다. 어린아이들이 새로운 단어를 배워서 응용할 때 참 재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추콥스키가 쓴 『두 살부터 다섯 살까지』라는 책을 보면 아이들의 말과 표현 중에서 기발하고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타조를 기린 새라고 하고, 칼은 포크의 남편이라고 하고, 바다는 물가가 하나밖에 없고 강은 물가가 두 개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난 별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달을 만들고 남은 거로 만든 거야.’라고 하기도 합니다. 참 기발한 표현입니다. 어린아이는 기발할 뿐만이 아니라 순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깨서 어린아이를 천국을 받드는 자의 표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천국을 받드는 자의 특징 중에는 순수함과 단순함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순수함과 단순함의 특징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이런 특징 때문에 사람들은 어린아이는 누구나 시인이라고 하기도 하고 시인이 되려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기발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표현들은 어린아이들이나 시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들입니다. 문학가들은 어린아이들의 이런 순수한 표현을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어린아이의 단순하고 순수한 특징은 아이가 자라면서 그런 표현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인가를 교정받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늘 그렇게 사물을 이해하거나 표현하면 정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자의식이 조금 생기기 시작하면 단어의 뜻이나 사물의 기능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것을 부정하거나 반대 의미나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예스’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 ‘노’라고 한다든지 사물의 기능에 부적당한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즐거움을 느낍니다.
또한, 아이들은 가상의 상황을 만들기도 하고 그것을 즐기기도 하지만 가상이 비현실임을 알기에 부정하기도 합니다. 아이가 “엄마, 책상을 치웠더니, 의자가 뭐라고 말했게?”“책상이 없으니까 외로워 그랬어. 그리고 책상이 울기 시작했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버섯을 따러 가면서 버섯이 “땅에서 나와 도망가자. 사람들이 우리를 따러 왔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아이는 자기가 만들어 내는 환상을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도 있고, 재미가 없어지면 또 마음대로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즐거워합니다. 한 번은 간식을 먹을 시간에 아이가 갑자기 빵이 먹기 싫다고 하자 엄마가 아이에게 간식을 먹이기 위해 아이처럼 “저 소리 안 들려? 빵이 자기를 먹어달라고 하잖아?”라고 하자 아이는 “빵은 말 못 해, 입이 없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필요할 때면 바로 가상 현실을 거부하고 냉정한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아이들은 가상에 대해 순전히 장난스럽게 행동하며 머릿속의 놀이에 필요한 만큼만 자기 가상이나 환상을 믿는다고 합니다.
김광석이 부른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물속으로 나는 비행기 하늘로 나는 돛단배/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포수에게 잡혀 온 잉어만이 한숨을 내쉰다.// 남자처럼 머리 깎은 여자/ 여자처럼 머리 긴 남자/ 가방 없이 학교 가는 아이/ 비 오는 날 신문 파는 애/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태공에게 잡혀 온 참새만이 긴 숨을 내쉰다.// 백화점에서 쌀을 사는 사람 시장에서 구두 사는 사람/ 한여름에 털장갑 장수/ 한겨울에 수영복 장수// 번갯불에 기절하는 남자/ 천둥소리에 하품하는 여자/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독사에게 잡혀 온 땅꾼만이 긴 혀를 내두른다/ 독사에게 잡혀 온 땅꾼만이 긴 혀를 내두른다.
이 가사는 아이들이 세상을 비틀어 보는 것을 패러디하여 지은 것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모든 사물을 거꾸로 보고 적용하며 재미있어하는 것을 정말로 거꾸로 된 세상에 대한 사회적 비판으로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사회를 알아서 그렇게 뒤집고 비틀고 회화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로 그러지만, 세상은 정말로 주객이 전도되고 거꾸로 뒤집히고 뒤죽박죽이 된 요지경 속입니다.
남녀의 구별이 철폐되고 불법을 막는 것이 불법이라고 고발되고 옳은 것을 옳다고 할 수 없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어린이의 가상 세계가 아닌 현실이 김광석의 노랫말 같습니다. 가상이라면 재미있고 순수할 일들이 현실이기에 정상적 사고를 하는 이들을 힘들게 하는 요지경 세상입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한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 수준에 계속 머물면 장애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해야 하지만 계속 그 수준에 머물면 영적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소명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그 의미를 교정받고 심화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과 소명에 대해서 교정이 안 되고 심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진정성이 있고 열정이 있고 카리스마가 있어도 얼마 안 가서 상투성에 빠지거나 대중성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단들에게는 이런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어린아이가 순수하고 기발한 면이 있지만, 그 수준에 머물면 안 되듯이 그리스도인도 복음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정과 심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수준으로 자라간다는 것을 구체적 현실에서 의식하고 경험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렇게 해야 할 필연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바울의 이 진술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바울 같은 믿음의 사람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할 일이 많아서 기도의 제목도 많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믿음과 영적 수준과 경건으로 볼 때 그는 종일이라도 기도하라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개척하여 세운 교회도 많고 영적으로 돌아보아야 할 성도들도 많았습니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과 다른 입장 때문에 갈등도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 인식의 한계를 절감한다는 뜻입니다. 소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누구와도 얼마든지 논쟁을 할 자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신앙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과 소명이 교정되고 심화하는 출발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간만이 겪는 문제가 아닙니다. 롬 8:22 절은“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피조물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가리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살아가는 과정과 미래를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탄생과 성장과 소멸의 과정을 지나면서 낡고 병들고 죽고 썩고 산화합니다. 이대로라면 인생은 허무한 존재입니다. 구약 전도서 기자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되며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도 전도서 기자의 인간 실존의 허무함을 직면한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탄식과 고통은 육체적 질병을 겪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난민, 전쟁 피해자들, 테러로 가족을 잃거나 불구가 된 이들, 사업의 실패로 좌절하는 이들, 사랑에 실패한 이들, 인간관계의 파탄으로 고통당하는 이들, 자녀나 가족이 불치의 병을 앓는 이들,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된 이들, 그 외에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정으로 탄식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이런 비극적인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것들은 생각하지 말고 좋은 일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마음 불편한 일들과 우리가 나서서 해결해주지도 못할 일들에 대해서 굳이 괴로워할 게 아니라 그런 일은 가능한 한 생각하지 말고, 뜻과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면서 살아가려고 하자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험악한 세상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만 해도 상당히 괜찮은 인생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존재 자체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 하는 것을 외면하고 피하여 살아도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의 탄식과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지대한 관심을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치 문제, 경제 문제, 안보 문제, 국제 관계 문제, 문화와 예술, 언론과 학문, 직업과 실업 문제, 법과 제도와 원칙 문제, 보편 가치와 가치의 질서 문제 등 그 모든 것들이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런 문제에 관해 관심을 쏟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고통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믿는 자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복음을 이상하게 적용하는 이들 중에 믿는 자는 모든 것이 형통하고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심층적으로 다룹니다. 탄식과 고통은 끔찍한 불행을 당한 이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여전히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여기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은 죄의 욕망에 휘둘리며 마땅히 행할 길로 가지 못하고 갈등하고 실족하고 비틀거리고 있는 상태에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하게 되는 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은 이미 받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구원받은 사람 같지 않습니다. 화가 나면 이성을 잃고, 배고프면 신경이 날카로워 져서 신경질을 냅니다.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며 성인처럼 행동하다가 한순간에 수준 이하의 태도를 보입니다. 어떤 때는 남에게 넉넉하게 베풀다가도 한없이 쩨쩨하고 인색하게 변합니다. 온 세상을 다 포용하는 듯하다가 온통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에 이성을 잃고 열을 냅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모두 우울증 환자와 같습니다. 나 자신이 자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 실존을 통찰하고 뭘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없다고 절망하지 않고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해결책은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수준으로는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절망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제시합니다.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니까 어려운 일도 다 해결할 수 있다거나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주시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였지만, 본문의 문맥 전체를 통해서 이 말씀을 이해하면 성령께서 간구하신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간구하신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지존이신데 누구에게 간구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에 대한 해결책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를 더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러시아의 작가 추콥스키가 쓴 『두 살부터 다섯 살까지』라는 책을 보면 아이들의 말과 표현 중에서 기발하고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타조를 기린 새라고 하고, 칼은 포크의 남편이라고 하고, 바다는 물가가 하나밖에 없고 강은 물가가 두 개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난 별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달을 만들고 남은 거로 만든 거야.’라고 하기도 합니다. 참 기발한 표현입니다. 어린아이는 기발할 뿐만이 아니라 순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깨서 어린아이를 천국을 받드는 자의 표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천국을 받드는 자의 특징 중에는 순수함과 단순함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순수함과 단순함의 특징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이런 특징 때문에 사람들은 어린아이는 누구나 시인이라고 하기도 하고 시인이 되려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기발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표현들은 어린아이들이나 시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들입니다. 문학가들은 어린아이들의 이런 순수한 표현을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어린아이의 단순하고 순수한 특징은 아이가 자라면서 그런 표현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인가를 교정받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늘 그렇게 사물을 이해하거나 표현하면 정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자의식이 조금 생기기 시작하면 단어의 뜻이나 사물의 기능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것을 부정하거나 반대 의미나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예스’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 ‘노’라고 한다든지 사물의 기능에 부적당한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즐거움을 느낍니다.
또한, 아이들은 가상의 상황을 만들기도 하고 그것을 즐기기도 하지만 가상이 비현실임을 알기에 부정하기도 합니다. 아이가 “엄마, 책상을 치웠더니, 의자가 뭐라고 말했게?”“책상이 없으니까 외로워 그랬어. 그리고 책상이 울기 시작했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버섯을 따러 가면서 버섯이 “땅에서 나와 도망가자. 사람들이 우리를 따러 왔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아이는 자기가 만들어 내는 환상을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도 있고, 재미가 없어지면 또 마음대로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즐거워합니다. 한 번은 간식을 먹을 시간에 아이가 갑자기 빵이 먹기 싫다고 하자 엄마가 아이에게 간식을 먹이기 위해 아이처럼 “저 소리 안 들려? 빵이 자기를 먹어달라고 하잖아?”라고 하자 아이는 “빵은 말 못 해, 입이 없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필요할 때면 바로 가상 현실을 거부하고 냉정한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아이들은 가상에 대해 순전히 장난스럽게 행동하며 머릿속의 놀이에 필요한 만큼만 자기 가상이나 환상을 믿는다고 합니다.
김광석이 부른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물속으로 나는 비행기 하늘로 나는 돛단배/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포수에게 잡혀 온 잉어만이 한숨을 내쉰다.// 남자처럼 머리 깎은 여자/ 여자처럼 머리 긴 남자/ 가방 없이 학교 가는 아이/ 비 오는 날 신문 파는 애/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태공에게 잡혀 온 참새만이 긴 숨을 내쉰다.// 백화점에서 쌀을 사는 사람 시장에서 구두 사는 사람/ 한여름에 털장갑 장수/ 한겨울에 수영복 장수// 번갯불에 기절하는 남자/ 천둥소리에 하품하는 여자/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독사에게 잡혀 온 땅꾼만이 긴 혀를 내두른다/ 독사에게 잡혀 온 땅꾼만이 긴 혀를 내두른다.
이 가사는 아이들이 세상을 비틀어 보는 것을 패러디하여 지은 것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모든 사물을 거꾸로 보고 적용하며 재미있어하는 것을 정말로 거꾸로 된 세상에 대한 사회적 비판으로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사회를 알아서 그렇게 뒤집고 비틀고 회화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로 그러지만, 세상은 정말로 주객이 전도되고 거꾸로 뒤집히고 뒤죽박죽이 된 요지경 속입니다.
남녀의 구별이 철폐되고 불법을 막는 것이 불법이라고 고발되고 옳은 것을 옳다고 할 수 없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어린이의 가상 세계가 아닌 현실이 김광석의 노랫말 같습니다. 가상이라면 재미있고 순수할 일들이 현실이기에 정상적 사고를 하는 이들을 힘들게 하는 요지경 세상입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한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 수준에 계속 머물면 장애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해야 하지만 계속 그 수준에 머물면 영적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소명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그 의미를 교정받고 심화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과 소명에 대해서 교정이 안 되고 심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진정성이 있고 열정이 있고 카리스마가 있어도 얼마 안 가서 상투성에 빠지거나 대중성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단들에게는 이런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어린아이가 순수하고 기발한 면이 있지만, 그 수준에 머물면 안 되듯이 그리스도인도 복음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정과 심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수준으로 자라간다는 것을 구체적 현실에서 의식하고 경험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렇게 해야 할 필연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바울의 이 진술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바울 같은 믿음의 사람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할 일이 많아서 기도의 제목도 많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믿음과 영적 수준과 경건으로 볼 때 그는 종일이라도 기도하라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개척하여 세운 교회도 많고 영적으로 돌아보아야 할 성도들도 많았습니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과 다른 입장 때문에 갈등도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 인식의 한계를 절감한다는 뜻입니다. 소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누구와도 얼마든지 논쟁을 할 자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신앙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과 소명이 교정되고 심화하는 출발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간만이 겪는 문제가 아닙니다. 롬 8:22 절은“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피조물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가리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살아가는 과정과 미래를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탄생과 성장과 소멸의 과정을 지나면서 낡고 병들고 죽고 썩고 산화합니다. 이대로라면 인생은 허무한 존재입니다. 구약 전도서 기자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되며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도 전도서 기자의 인간 실존의 허무함을 직면한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탄식과 고통은 육체적 질병을 겪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난민, 전쟁 피해자들, 테러로 가족을 잃거나 불구가 된 이들, 사업의 실패로 좌절하는 이들, 사랑에 실패한 이들, 인간관계의 파탄으로 고통당하는 이들, 자녀나 가족이 불치의 병을 앓는 이들,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된 이들, 그 외에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정으로 탄식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이런 비극적인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것들은 생각하지 말고 좋은 일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마음 불편한 일들과 우리가 나서서 해결해주지도 못할 일들에 대해서 굳이 괴로워할 게 아니라 그런 일은 가능한 한 생각하지 말고, 뜻과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면서 살아가려고 하자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험악한 세상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만 해도 상당히 괜찮은 인생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존재 자체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 하는 것을 외면하고 피하여 살아도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의 탄식과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지대한 관심을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치 문제, 경제 문제, 안보 문제, 국제 관계 문제, 문화와 예술, 언론과 학문, 직업과 실업 문제, 법과 제도와 원칙 문제, 보편 가치와 가치의 질서 문제 등 그 모든 것들이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런 문제에 관해 관심을 쏟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고통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믿는 자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복음을 이상하게 적용하는 이들 중에 믿는 자는 모든 것이 형통하고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심층적으로 다룹니다. 탄식과 고통은 끔찍한 불행을 당한 이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여전히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여기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은 죄의 욕망에 휘둘리며 마땅히 행할 길로 가지 못하고 갈등하고 실족하고 비틀거리고 있는 상태에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하게 되는 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은 이미 받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구원받은 사람 같지 않습니다. 화가 나면 이성을 잃고, 배고프면 신경이 날카로워 져서 신경질을 냅니다.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며 성인처럼 행동하다가 한순간에 수준 이하의 태도를 보입니다. 어떤 때는 남에게 넉넉하게 베풀다가도 한없이 쩨쩨하고 인색하게 변합니다. 온 세상을 다 포용하는 듯하다가 온통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에 이성을 잃고 열을 냅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모두 우울증 환자와 같습니다. 나 자신이 자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 실존을 통찰하고 뭘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없다고 절망하지 않고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해결책은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수준으로는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절망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제시합니다.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니까 어려운 일도 다 해결할 수 있다거나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주시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였지만, 본문의 문맥 전체를 통해서 이 말씀을 이해하면 성령께서 간구하신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간구하신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지존이신데 누구에게 간구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에 대한 해결책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를 더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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