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재 방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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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3-08-0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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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이시고 사랑은 행동이나 마음의 성격을 나타내는 명사 혹은 동사입니다. 사랑이란 아끼고 베풀며 따뜻하게 여기는 마음이고, 남녀가 서로 애틋이 그리워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이나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사랑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건 하나만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의 구속의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의 완성이고 또한 사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킬 때 율법만 보지 않고 율법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였습니다. 그 언약 너머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있고, 구원의 역사 너머에 하나님 자신이 계시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구체적인 율법을 지켰습니다. 성경이 그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였다면 그 사랑이란 바로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심도, 이스라엘을 선택하심도, 율법을 주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일반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햇볕을 주심도, 비를 내려주심도, 공기와 이산화탄소와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원소와 원리와 법칙을 주심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사랑이고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사랑이고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사랑이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손길이 사랑입니다. 의인화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모든 언행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타락하여 그 형상이 좀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처럼 그 존재 방식이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처럼 사랑의 존재 방식을 취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우리의 상황이고 현실이며 수준이고 한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경쟁하고 교만하고 싸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씀일까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본으로 당신 자신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지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사이좋게 지낼 능력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할 마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는 자신을 실현하려는 일에만 집착합니다. 실존주의는 복음을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메시지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온통 그런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돈 인기 건강 집 자동차 여행 옷 신발 음식 화장품 영화 게임 등등 이런 것이 우리의 존재 방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실현의 모든 노력이 우리의 존재 방식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집착하는 그런 것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 추구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들 자체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관심을 두고 집착하는 그런 것들을 사랑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좋아하는 것들은 아무리 고상해도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도 좋은 것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사랑을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이 말은 사랑은 수단이 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은 사랑에 아무런 보상이 없다고 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본으로 제시하신 사랑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씀을 보면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고 그것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평생에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상황이나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달리는 열차에 치이게 될 위험에 처한 친구를 구하고 대신 자신이 죽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렇게 친구를 구하고 죽은 사람만 요 15:13절 말씀을 지킨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려면 열차에 치일 위험에 처한 친구를 구하고 죽어야 하고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은 이미 창조 명령 가운데서 주어진 것과 같이 서로를 지키고 돌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그것이 쉬운 거라면 오늘날 정치와 경제가 이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마다 정부가 있고 법이 있고 국회가 있고 수많은 조직과 시스템이 있는 것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것입니다. 정치와 사회 제도가 그렇게 복잡한 것은 인간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다시 오시기 전에 이 문제를 어느 정도는 풀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풀면, 즉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면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인정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사를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해 옥에도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고 장담하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은 어쩌면 명분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위한다는 것은 멋진 명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을 요구하기도 하셨지만, 또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을 위하는 것은 멋있고 명분이 있으니까 기꺼이 하겠다고 나서지만, 친구를 위하고 아내를 위하고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일은 소홀히 합니다. 왜 주님께서 “나를 위해..”라고 하지 않으시고 “친구를 위해...”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을 위한다는 것은 구체적 실체가 없이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나 자신의 신앙의 수준은 먼저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드러나고 그다음은 직장에서 드러나고 대 사회생활에서 드러납니다. 신앙의 수준과 위선을 가장 잘 감출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믿음이 없이도 믿음이 좋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곳이 교회이기도 합니다. 믿음과 위선을 가정에서 가족들에게는 숨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 가정이지만 또한 가장 쉬운 곳이 가정이기도 합니다. 가족은 서로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숨길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실하기가 쉬운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진실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다가 실수할까 봐 크게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약점이 탄로 날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즉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학습장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것은 곧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가족끼리 성도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것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전도와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론적 신분의 토대에서 서로 사이좋게 하는 삶에 집중해야 합니다. 인간 존재의 형식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듯이, 우리의 존재 방식도 사랑입니다. 우리의 왜곡된 존재 방식을 바로 세우는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그 일은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움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 더욱 사랑받게 될 것이고 영적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구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킬 때 율법만 보지 않고 율법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였습니다. 그 언약 너머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있고, 구원의 역사 너머에 하나님 자신이 계시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구체적인 율법을 지켰습니다. 성경이 그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였다면 그 사랑이란 바로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심도, 이스라엘을 선택하심도, 율법을 주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일반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햇볕을 주심도, 비를 내려주심도, 공기와 이산화탄소와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원소와 원리와 법칙을 주심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사랑이고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사랑이고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사랑이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손길이 사랑입니다. 의인화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모든 언행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타락하여 그 형상이 좀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처럼 그 존재 방식이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처럼 사랑의 존재 방식을 취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우리의 상황이고 현실이며 수준이고 한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경쟁하고 교만하고 싸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씀일까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본으로 당신 자신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지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사이좋게 지낼 능력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할 마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는 자신을 실현하려는 일에만 집착합니다. 실존주의는 복음을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메시지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온통 그런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돈 인기 건강 집 자동차 여행 옷 신발 음식 화장품 영화 게임 등등 이런 것이 우리의 존재 방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실현의 모든 노력이 우리의 존재 방식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집착하는 그런 것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 추구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들 자체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관심을 두고 집착하는 그런 것들을 사랑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좋아하는 것들은 아무리 고상해도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도 좋은 것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사랑을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이 말은 사랑은 수단이 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은 사랑에 아무런 보상이 없다고 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본으로 제시하신 사랑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씀을 보면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고 그것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평생에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상황이나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달리는 열차에 치이게 될 위험에 처한 친구를 구하고 대신 자신이 죽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렇게 친구를 구하고 죽은 사람만 요 15:13절 말씀을 지킨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려면 열차에 치일 위험에 처한 친구를 구하고 죽어야 하고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은 이미 창조 명령 가운데서 주어진 것과 같이 서로를 지키고 돌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그것이 쉬운 거라면 오늘날 정치와 경제가 이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마다 정부가 있고 법이 있고 국회가 있고 수많은 조직과 시스템이 있는 것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것입니다. 정치와 사회 제도가 그렇게 복잡한 것은 인간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다시 오시기 전에 이 문제를 어느 정도는 풀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풀면, 즉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면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인정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사를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해 옥에도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고 장담하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은 어쩌면 명분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위한다는 것은 멋진 명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을 요구하기도 하셨지만, 또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을 위하는 것은 멋있고 명분이 있으니까 기꺼이 하겠다고 나서지만, 친구를 위하고 아내를 위하고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일은 소홀히 합니다. 왜 주님께서 “나를 위해..”라고 하지 않으시고 “친구를 위해...”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을 위한다는 것은 구체적 실체가 없이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나 자신의 신앙의 수준은 먼저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드러나고 그다음은 직장에서 드러나고 대 사회생활에서 드러납니다. 신앙의 수준과 위선을 가장 잘 감출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믿음이 없이도 믿음이 좋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곳이 교회이기도 합니다. 믿음과 위선을 가정에서 가족들에게는 숨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 가정이지만 또한 가장 쉬운 곳이 가정이기도 합니다. 가족은 서로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숨길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실하기가 쉬운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진실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다가 실수할까 봐 크게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약점이 탄로 날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즉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학습장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것은 곧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가족끼리 성도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것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전도와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론적 신분의 토대에서 서로 사이좋게 하는 삶에 집중해야 합니다. 인간 존재의 형식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듯이, 우리의 존재 방식도 사랑입니다. 우리의 왜곡된 존재 방식을 바로 세우는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그 일은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움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 더욱 사랑받게 될 것이고 영적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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