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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석 교수 "이재철 목사 경솔함 인정하고, 노회는 이 목사 고발 철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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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9-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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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석 교수 "이재철 목사 경솔함 인정하고, 노회는 이 목사 고발 철회해 

"죽은 자의 기도, 매우 조심하고 자제해야"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교 교수인 이정석 박사가 이재철 목사의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기도' 논란과 관련 자신의 홈페이지에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매우 조심하고 자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목회자로서 불가피한 상황에서 단순한 기원을 하는 경우는 이해될 수 있으나 이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 한다든지 확산시키려 하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소극적으로 단순히 기원의 차원이어야 하며, 결코 적극적인 간구의 성격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이재철 목사는 자신의 글이 일부 경솔했음을 인정하고 억울한 나머지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서울 서노회에 대해서는 " 노회는 이단적 행위라고 정죄한 고발을 철회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래서 서로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고,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하여 이 문제를 잘 정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정석 교수의 글 전문.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대하여

 

요즘 이재철 목사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 고난받는 종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에 관한 여러 소문들의 진상은 하나님만이 정확히 아시겠지만, 교권에 희생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욱이 그가 소속된 노회에서 그에게 이단적 행동이라는 죄목을 붙여 소환한 고발장은 뭔가 잘못되었다. 그의 죄목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조장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교재에서 사도신경을 설명하는 중에, 예를 들어 목회자가 신자의 돌아가신 부모를 위한 추도모임에 초청받았을 경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하면서,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따뜻하게 기도해주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의 정신이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이 왜 정죄를 당하고 고발을 당해야 하는 그리 큰 잘못이란 말인가? 심지어 그 부모들이 불신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양이 그토록 사랑하고 잊지 못하는 분들인데 목자의 심정에서 왜 따뜻한 기도 한번 못해주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인정의 문제이며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목회자 중에도 믿지 않고 돌아가신 어머니나 아버지를 차가운 교리적 잣대로 심판하고 완전히 정죄하고 외면할 수 있는 냉정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가슴 아픈 것은 교권을 가진 사람들이 함부로 이단시비를 하며 정죄하는 행태이다. 이단이란 극단적인 악인으로서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구원이 거부되는 극형을 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단이란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지, 일부 교단이나 교파가 자기들의 신조와 맞지 않는다고 하여 정죄할 수 없다. 자기 교단법을 어기고 교단의 질서를 위반했다면 오로지 그 교단 내부에서만 효력을 갖는 조치를 취하며 교단법 위반자라고 부를 수는 있겠으나 이단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런데 고발장에 목회자로서 행한 인정적 행위를 “이단적 행위”라는 죄목으로 정죄한 것은 근본적으로 무지한 행위이며 교회의 우주적 일치를 부정하는 잘못이다. 실로, 고발장을 작성하고 정죄하는 고발자들의 도덕성이 더 이단적 행위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는 우주적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고 파벌적 신조에 근거하여 이단이 아닌 형제를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범죄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엄격히 말하자면, 우리는 사실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장례식의 긴 절차에 있어서 기도할 때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고인을 위해 평화와 자비를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기원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시점으로부터 일체 기도를 금지하지 않는다. 묘비나 조시에도 기도의 성격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따뜻한 인정의 표현이며 죽은 자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의 마음이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인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도 무방한가? 심지어 죽은 불신자를 위해 간절히 오래동안 기도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런데 왜 개신교회는 공식적으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금지하는가? 거기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로,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를 강력히 명령하고 있으며,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도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라든지 기도했다든지 하는 구절이 없다. 고전 15장에서 육체적 부활을 논증하면서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언급하고 있다(29절). 이는 아마도 당시 고린도교회 내에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세례구원설이 유포되자 살아서 믿었으나 세례를 미처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 가족이나 친지가 대신 세례를 받은 사례를 들어 육체적 부활이 없다면 왜 그런 노력까지 하겠느냐는 반박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런 세례는 그 후에 나타나지 않으며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로 거론되는 한 구절은 딤후 1장 18절이다: “원하건데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하여 주옵소서.” 바울이 옥중에 있을 때 성심껏 도왔던 오네시보로를 위해 기도한 것인데, 이 때 그가 살아 있었는지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그의 도움이 과거형이고 또 기도문 가운데 “그 날에”라는 미래가 나와있다는 정황에 근거하여 이미 죽은 자로 추정하는데 불과하여 죽은 자를 위한 기도라고 단정할 수 없다. 설령 그가 이미 죽었다고 할지라도 기도의 내용이 단순히 “주의 긍휼”을 기도한 것이다. 교부시대에도 그런 사례들이 있었으나, 동방정교회나 로마 카톨릭교회와 같이 오래된 교회들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허용할 뿐 아니라 다양한 의식과 기도문을 개발하였고 시기를 정하여 정례화되었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은 단순히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의 표현에 그치는 것이지 구체적으로 산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같은 중보기도는 삼가하고 있다. 기도는 우리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 마음이 그들에게 향하고 따라서 그들을 위해 단순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주님의 긍휼을 기원하는 기도가 크게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될 기도가 있으며 기도를 잘못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죽으면 감정이 절박한 장례식으로부터 얼마동안 혹은 추모일에 그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원하는 단순한 기도만으로 제한하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일상화하는 비성경적인 행동을 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특히 기복신앙이 강한 한국교회에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신앙생활의 모범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이 권장하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기도는 자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로, 성경은 죽은 후에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구원은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sola fide) 가능하며, 믿음은 아직 내세를 보지 않은 살아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이재철 목사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은 자를 위해 기도조차 해줄 수 없다면 그것이 과연 복음인가!”라고 강변했는데, 이 말에는 어패가 있다. 우리 정서에 안 맞는다고 “그것이 과연 복음이냐!”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개신교회는 성경을 중시하고(sola Scriptura) 우리 정서나 논리에 맞지 않아도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그대로 따른다. 우리 인정으로는 모두 구원받았으면 좋겠고 지옥이나 영원한 형벌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운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요 3:16-21절에서 보는 대로, 복음은 항상 심판을 포함한다. 복음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복음 없는 심판도 없고 심판 없는 복음도 없다. 안타깝지만, 예수를 믿지 않고 죽으면 정죄와 형벌을 당하게 된다. 우리 정서상 그것을 강조하거나 표명하지는 않지만, 심지어 그분이 우리가 사랑하는 분이라 할지라도 복음적인 신자는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정할 것이다. 물론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선조에 대한 문제는 다른 신학적 이슈로서 많은 논의를 요한다.

 

세 째로, 음부와 연옥은 다르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죄를 대죄와 소죄로 나누고, 대죄를 범한 사람은 지옥으로가는 반면, 소죄를 범하고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 가는 곳으로 연옥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죄의 인위적인 구별이 스스로를 얽매이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제도를 향유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교회에 얽매이도록 만드는데 활용하였다. 그리고 연옥을 만들다보니 거기에 갈 사람을 구별하는 심판이 필요하였고, 그래서 성경적 근거가 없는 즉시심판론을 고안해 내었다. 한 가지 잘못을 범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하면 끝없는 잘못을 연쇄적으로 범하게 되어있다. 

 

성경에서는 최후의 심판에서 천국으로 갈 자와 지옥으로 갈 자를 구분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때까지 심판이 지연되면 사실상 연옥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즉시 심판을 받는다는 이론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좋은 신자는 천국으로 가고 명백한 불신자는 지옥에 가게 되지만 그 어느쪽이라고 확실히 단정할 수 없는 불성실한 신자는 중간에 있는 연옥에 가서 상당기간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카톨릭교회는 타인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추가공로설을 주장하기 때문에 성자나 공로가 많은 신자들이 그들의 연단기간을 감소시켜줄 수 있고, 헌금과 같은 공적이나 산 자들의 기도도 그와 유사한 효과가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연옥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을 따라 최후의 심판에서 오로지 두 가능성, 즉 영복과 영벌,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된다고 믿는다. 음부란 그때까지 죽은 영혼들이 기다리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구약에서는 모든 죽은 자가 음부에 간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중간기를 거치면서 신약에서는 음부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신자와 의인이 가는 낙원과 불신자와 악인이 가는 음부가 있다고 언급한다. 물론 이는 기술적 구분일뿐, 낙원에서 대기하는 자는 모두 천국에 가게 되고 음부에서 대기하는 자는 모두 지옥에 가게 된다고 생각하며, 이는 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위한 대속을 믿고 감사하며 살았는지 그것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살았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즉 음부와 낙원에 간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까지 단순히 대기하는 것일뿐 연옥과 같이 신분상승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단지 최후의 심판이라는 절차만 남아있을뿐 그들의 운명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 따라서 연옥을 믿는 사람들은 죽은 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지만 음부를 믿는 사람은 아무런 기도의 효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분명히 가르친다(히 9:27).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해 기도를 하라고도 명령하지 않고 기도를 하지 말라고 금지하지도 않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다음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다른 명백한 가르침이나 교리와 위배되는지 조화를 이루는지를 살펴보면서 판단해야 한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경우에는 오로지 살아서 믿음으로만 구원받으며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기독교의 중심교리와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사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후손이나 목회자의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면 기독교의 구원체계는 흔들리게 될 것이다.  

 

둘째로 고려할 것은 그 결과에 대한 예상이다. 만일 죽은 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그것이 널리 확산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불교나 샤마니즘과 같이 죽은 자를 위해 헌금하고 명복을 비는 제도가 정착되고 확산된다면 그러지 않아도 기복신앙이 한국교회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매우 조심하고 자제해야 한다. 목회자로서 불가피한 상황에서 단순한 기원을 하는 경우는 이해될 수 있으나 이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 한다든지 확산시키려 하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이다. 즉은 자를 위한 기도는 소극적으로 단순히 기원의 차원이어야 하며, 결코 적극적인 간구의 성격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재철 목사는 자신의 글이 일부 경솔했음을 인정하고 억울한 나머지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중단해야 하며, 노회는 이단적 행위라고 정죄한 고발을 철회해야 한다. 그래서 서로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고,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하여 이 문제를 잘 정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김철영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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