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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에 갇힌 교회, 츠빙글리의 개혁신학에 귀 기울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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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ㆍ2021-02-08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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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뿌리 츠빙글리를 읽다』를 

출판한 주도홍 교수 파워인터뷰  

 

백석대 부총장과 기독교통일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송천(松川) 주도홍 교수(역사신학자)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개혁신학의 뿌리 츠빙글리를 읽다』를 출판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츠빙글리는 1519년 1월 1일로 본다. 루터는 면죄부 반박문 95조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붙이는 것으로, 츠빙글리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 강단에서 마태복음 강해설교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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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도홍 교수      

 

주 교수가 츠빙글리의 1차 자료를 분석하고 해설한 이 책은 츠빙글리의 생명신학, 성례신학, 공공신학을 다룬 책이다. 

 

주 교수는 한국개혁신학회 회장과 아시아신학연맹(AEA) 신학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테오도르 운데어아익 연구의 권위자이다. 

 

주 교수는 개혁교회 종교개혁500주년기념대회의 대회장을 역임했다.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독일 보쿰대학교(Ruhr-Uni. Bochum) 신학박사(Dr.theol.)를 취득한 역사신학자로 남북화해와 교류 그리고 통일 문제에 있어서 좌우이념을 뛰어넘어 오직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하여 올곧은 목소리를 내왔다. 오는 3월부터는 총신대 평화통일개발대학원 초빙교수로 위촉을 받아 2023년까지 강의를 한다. 

 

『개혁신학의 뿌리 츠빙글리를 읽다』를 읽고 추천한 학자들의 평가는 후하다. 

 

개혁신학회 회장 이은선 교수님(안양대)는 “개혁신학의 진수를 아주 쉽게 해설”한 역작이라고 평가하고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공공신학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며 추천했다. 

 

백석대신학원장을 지낸 류호준 교수는 “츠빙글리의 글들을 중심으로 목회자로서의 그의 인품, 행동가로서 그의 정치적 종교적 투쟁 일화, 신학자로서의 그의 사상과 신학 등을 적절하게 적출하여 스케치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평가했다. 

 

주 교수도 "1차 자료에 근거해서 츠빙글리의 신학 전체를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한국 저자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며 자부심을 나타냈다.  

 

주 교수는 뉴스파워와 서면 인터뷰에서 ‘츠빙글리가 지금 우리 시대에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한국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요?’라는 질문에 “청빈을 강조할 것 같다.”며 “한국교회가 더 가난해지라는 말이다. 그래야 복음의 소리가 선명하고 물질주의에 빠진 세상을 향해 갈 길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남북분단에서 복음에 서서 행동하라고 말할 것 같다. 이념을 따르지 말고 십자가의 복음의 음성을 교회가 낼 때, 분단을 극복하고 하나 되는 날이 올 거라는 것”이라며 “제발 교회가 트러블메이커가 되지 말고, 피스메이커가 될 것을 요청할 것 같다.”고 했다. 

 

특히 “개혁신학의 아버지 츠빙글리는 분명하게 공공신학자”라며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을 통해 루터와는 다르게 신앙개혁 교회개혁 뿐 아니라, 모든 삶의 개혁을 이루려 했다. 그래서 용병문제, 세금문제, 교육문제, 이자(利子) 등 경제문제를 성경을 근거로 개혁하려 노력했다. 곧 츠빙글리를 공적 신학의 출발자”라고 평가했다. 

 

주 교수는 “예배당에 갇힌 교회, 수도원 같은 교회는 츠빙글리의 개혁신학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츠빙글리의 성령에의 강조, 뜨겁기까지 한 성찬이해, 교회의 세상에서의 역할에 주목했으면 한다. 성령 충만하면서도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교회”라며 “한국의 개혁신학이 더 깊어지고, 기본이 튼튼한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더 활발히 역사적 츠빙글리의 연구가 확장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먼저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한국교회 안에 ‘종교개혁자’ 하면 마르틴 루터와 요한 칼빈을 듭니다. 상대적으로 츠빙글리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츠빙글리는 어떤 분입니까? 

 

장로교회 개혁신학이 다수인 한국 장로교에서는 그런 현상은 정상이 아닙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함께 양대 종교개혁자이고, 개혁교회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현상으로, 이제라도 개혁신학이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사실 칼빈은 종교개혁의 후 세대입니다. 정확히 한 세대 후에 종교개혁에 참여합니다. 개혁신학은 츠빙글리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이 책에 보면 츠빙글리는 151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5년 후에는 취리히 시 의회를 통해 저항에 부딪히게 되고, 연방정부 사절단이 취리히를 항의방문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츠빙글리는 1519년 1월 1일로 봅니다. 루터는 면죄부 반박문 95조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붙이는 것으로, 츠빙글리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 강단에서 마태복음 강해설교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루터는 행동으로, 츠빙글리는 인식으로 종교개혁을 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525년은 스위스 종교개혁의 위기이기도 했는데, 종교개혁 신앙에 맞서 구(舊)신앙, 舊敎(구교)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스위스 칸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복음에 의한 공적 삶의 변화를 역설하면서 그들을 설득하게 됩니다. 

 

한 예가 돈을 받고 젊은 청년들을 파는 용병제도였습니다. 이거야말로 물질주의 타락이라고 비판하면서, 성경이 원하는 바른 삶으로 돌아올 것을 역설하면서, 사람들의 각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타락한 교회와 신앙이 잘못된 삶을 불러오기에 진정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거듭나 영적 삶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반대로 루터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운동에 대해 비판도 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가장 현격한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둘은 종교개혁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지혜를 모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두 달 차이로 태어난 두 사람은 하나님의 종교개혁으로의 부르심에 화답하며 기뻐했습니다. 특히 츠빙글리는 루터를 귀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했습니다. 중세 천 년 역사에서 루터 같은 인물이 나온 것은 최초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성찬에의 이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츠빙글리는 성찬은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이 중요하기에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기억하며 기념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츠빙글리는 승천하신 주님은 우리를 떠나가셨기에, 그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찬에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가 츠빙글리에게 강조됩니다. 

 

첫째, 주님의 구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고전 11:24) 둘째는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고전11:26),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구원받은 성도, 믿음의 공동체를 굳건히 합니다. 주의 몸 된 교회가 성찬에 함께 참여하며 성도의 교제로 천국을 맛보는 것입니다(고전 10:16; 요6:63). 교회는 성만찬의 교제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루터의 공재론에 동의할 수 없었던 츠빙글리는 루터로부터 이단시당하며, 끊임없이 본인의 성찬론을 전개시킵니다. 곧 성례신학자로 부르게 될 정도입니다. 특히 1529년 마르부르크종교담화가 결정적으로 둘을 가르는 출발점이었다 하겠습니다. 이후 독일 루터교회와 스위스 개혁교회는 멀어지게 됩니다. 

 

츠빙글리 역시 종국에는 루터교회를 무신론으로까지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루터교회 후대 역시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1563년)까지도 이단시하며 칼빈파(Calvinismus)라고 매도할 때, 칼빈은 너무 가슴 아파했습니다. 오늘까지도 그 간격이 메꿔지지 않고 있습니다. 

 

츠빙글리가 요한 칼빈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 같습니다.

 

칼빈(1509-1564)은 츠빙글리(1484-1531)보다 정확히 25년 후에 태어났습니다. 츠빙글리가 1531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칼빈은 1536년 『기독교강요』로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고, 츠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와 만나게 됩니다. 

 

취리히신앙고백은 취리히와 제네바교회의 합작품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칼빈은 츠빙글리의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주해』에서 등장하는 신인식과 사람인식으로 『기독교강요』를 시작하고 있는 점에 학자들은 주목합니다. 

 

거기다 츠빙글리의 하나님 절대주권신학은 칼빈에게 반영되고 있습니다. 칼빈은 츠빙글리에게 한 루터의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은 스위스 개혁교회를 형성한 두 기둥이라 할 것입니다. 

 

저 역시 개혁신학자로서 츠빙글리를 공부하며 그의 신학에서 전혀 어색함이나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특히 성령의 강조, 신앙의 공적 역할에로의 강조는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칼빈의 신학은 개혁교회 신학의 총체라 하겠습니다. 

 

츠빙글리, 루터, 칼빈의 성례전에 대한 인식과 주장이 흥미롭습니다. 

 

루터의 공재론에 찬성할 수 없었던 츠빙글리의 성찬론은 성령이 함께 영적 임재론을 칼빈이 성령임재론으로 완성했다고 볼 것입니다. 사실 루터, 츠빙글리, 칼빈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성만찬의 공동체, 주의 몸의 교제 공동체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츠빙글리는 1531년 ‘기독교신앙선언’에서 유언과 같은 성만찬에 관한 이해를 새롭게 제시합니다. 저의 책 [개혁신학의 뿌리 츠빙글리를 읽다] 350쪽 이하에서 성찬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4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청각이 세상의 온갖 잡음에서 멀어지고,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둘째, 그리스도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성도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찬란한 아름다움에 빠져 그리스도를 흠모한다. 셋째, 이 때 성찬의 빵을 잡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있어 그리스도를 잡는다. 마지막으로는 그 순간 성도의 미각과 후각은 주님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알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주님이 초대하는 자리로 나가 천국소망으로 기뻐 환호한다.” 

 

츠빙글리의 성찬이해가 결코 메마르거나 이성적으로 끝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한국교회가 이런 면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곧 천국잔치로서의 성찬의 극대화입니다. 

 

츠빙글리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교회개혁과 사회개혁, 지도자와 공공선 등 공공신학적인 관점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개혁신학의 아버지 츠빙글리는 분명하게 공공신학자입니다.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을 통해 루터와는 다르게 신앙개혁 교회개혁 뿐 아니라, 모든 삶의 개혁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래서 용병문제, 세금문제, 교육문제, 이자(利子) 등 경제문제를 성경을 근거로 개혁하려 노력했습니다. 곧 츠빙글리를 공적 신학의 출발자라 하겠습니다. 

 

예배당에 갇힌 교회, 수도원 같은 교회는 츠빙글리의 개혁신학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개혁신학의 역사적 정체성입니다. 그렇다고 목사와 정치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직분에서 분명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복음의 음성을 들려주고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로, 정치인으로 각각 부름 받은대로 성경을 기준으로 사명을 다할 때 양쪽 다 주의 종이 됩니다. 혼동이나 혼합해서는 안 됩니다. 츠빙글리는 목사로서 복음 선포자의 위치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한국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복음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거기다 츠빙글리는 성령의 신학자입니다. 공공신학자이면서 성령의 신학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는 쉽게 보지만, 둘을 균형적으로 제시하는 츠빙글리에 놀라움을 가집니다. 특히 개혁신학이 무엇인가를 츠빙글리에게서 역사적으로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한국교회는 달라지리라 기대합니다. 

 

츠빙글리가 지금 우리 시대에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한국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요? 

 

청빈을 강조할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더 가난해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복음의 소리가 선명하고 물질주의에 빠진 세상을 향해 갈 길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예배가 어려워지고 성도들의 헌금이 줄어들 때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리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더 가난해지고 홀쭉해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 버리고 주를 따랐던 제자들을 기억하라고 츠빙글리는 말할 것 같습니다. 마스크를 잘하고, 입을 다물어 침묵하고, 더 묵상하며 고독하고, 가난한 이웃을 더 섬겨라 라고 할 것 같습니다. 

 

츠빙글리는 부를 하나님이 이웃을 섬기라고 부여한 청지기 직분을 가로채서 사유재산으로 만든 것으로 정죄합니다. 특히 당시 수도원과 교회가 부자였지요. 이를 탐욕과 도둑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를 자진하여 기쁘게 가난한 이웃과 나눌 때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공산당처럼 무기나 폭력으로 억지로 부를 빼앗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자원하는 섬김은 북한으로, 세계로 눈을 돌리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부동산 등으로 부를 쌓아두는 교회를 츠빙글리는 책망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채찍을 들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츠빙글리는 자유, 평화와 인내로 개혁을 하는 개혁자입니다. 성경에서 가져오는 원리는 분명하나 방법론에는 전혀 과격하지 않습니다.

 

교회사에 종종 과격파 종교개혁자 그룹에 츠빙글리를 넣는데, 루터교회 신학자들에게서 출발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루터가 도리어 더 과격하지요. 어쨌든 다시금 역사적으로 츠빙글리를 이해야 하겠습니다. 

 

츠빙글리는 인내와 기다림으로 개혁하기를 원했던 평화의 종교개혁자였습니다. 게다가 남북분단에서 복음에 서서 행동하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이념을 따르지 말고 십자가의 복음의 음성을 교회가 낼 때, 분단을 극복하고 하나되는 날이 올 거라는 것입니다.

 

제발 교회가 트러블메이커가 되지 말고, 피스메이커가 될 것을 요청할 것 같습니다. 복음의 원리를 굳건히 붙잡되, 평화와 자유를 지키라는 말입니다. 

 

츠빙글리는 예배개혁도 강조했습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에는 어떤 부분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배개혁자 츠빙글리는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꾸었습니다. 단순하고 담백하게 라틴어 미사를 소통하는 독일어 예배로 바꾸었습니다. 기도나 찬송도 마음의 중심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거나 청중을 의식하는 찬송이나 기도를 멀리했습니다. 화려한 성가대 가운이나, 통성기도도 멀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우들이 함께 화답하고 참여하는 예배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엄중한 예배를 떠오르게 합니다. 

 

츠빙글리는 일치와 평화를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남북 분단 상황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앞에도 언급했지만, 츠빙글리는 평화의 개혁자입니다. 개혁은 분명한 성경적 원리와 기다림의 인내로써 평화롭게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수술은 성공했으나, 환자가 목숨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전쟁관도 정당전쟁은 어쩔 수 없지만,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재세례파에 대해서도 같이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루터와는 다르게 츠빙글리는 유아세례는 근본교리가 아니기에 관용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치관계가 복잡해짐으로 어쩔 수 없이 선을 그어야 했습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도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다수파인 그쪽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남북분단 상황에서 츠빙글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이념적이 아닌 성경적으로 참여할 것을 원할 것 같습니다. 물론 평화의 사도로서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 입장에서 이 책을 읽을 때 주목할 부분을 소개해 주시죠. 

 

중요한 물음입니다. 이 책은 500년을 건너뛰어 역사적 츠빙글리를 만나게 함에 목적이 있습니다. 장로교회 신학의 근원을 만나자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조직신학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일차자료에 근거한 교회사입니다.

 

가능한 비틀지도 필자가 원하는 대로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일부만을 보면서 츠빙글리를 아는 체 하지 않았습니다. 반복해서 성찬론 같은 주제가 나오기도 합니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면서 개혁교회의 뿌리 츠빙글리를 알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읽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츠빙글리를 가져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란다면, 츠빙글리의 성령에의 강조, 뜨겁기까지 한 성찬이해, 교회의 세상에서의 역할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서도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교회입니다.

 

한국의 개혁신학이 더 깊어지고, 기본이 튼튼한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더 활발히 역사적 츠빙글리의 연구가 확장되었으면 합니다.

 

김철영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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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정숙님의 댓글

강정숙 ()

교수님 인터뷰 내용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에 "코로나로 인해 대면예배가 어려워지고 성도들의 헌금이 줄어들 때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리치는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런 한국교회를 모독하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물론 일부 그런 교회들이나 목회자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있다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헌금이 줄어들어 소리치는 것이라구요?... 지금 한국의 상황은 좌우 이념을 떠나 공정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상식적인 개념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만큼 공의와 정의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평등을 위해서 차별금지법을 말하면서 한쪽 귀는 막고 교회를 길들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무조건 희생을 강조하면서 때로는 교회에 와서 코로나로 겁박을 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저는 개혁교단의 작은 개척교회 담임전도사입니다. 지난 주일 부활절 예배를 준비하고 있는데 공무원이 코로나19 점검을 나와서 했던 무례한 행동과 겁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헌금이 줄어들어 소리치는 것이라구요?!!.."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선입견을 내려놓으시고, 좀더 많은 곳에서 진솔한 가장 밑바닥의 소리를 귀를 열고 들으시고, 눈을 뜨고 보시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고 말씀해주시길 코로나로 상처입은 한국교회의 작은 민초같은 개척교회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교회의 한 사람의 성도로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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