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 밧데이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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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72.♡.♡.208)ㆍ2019-08-29 08:0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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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와 플리머스에 내린 102명의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신대륙의 고난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 해 겨울을 넘기며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 하고 죽었다.
1903년 1월 13일, 상선 갤릭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호놀루루에 도착한 조선인 사탕수수 노동자도 102명이었다. 1902년 12월 23일 제물포항을 출항하여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에 오는 그 배 안에서 인천 내리교회 교인이었던 김이채, 안정수 두 사람이 전도를 하고 성경을 가르쳐 호놀루루에 도착할 때는 절반 넘는 사람들이 감리교인이 되어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로 고난의 사탕수수 노동자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일당은 남자는 하루 65센트, 여자는 50센트였고 아침 해뜰 때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그들은 '루나'라고 불리는 십장의 채찍질을 당하며 고된 일을 해야 했다.
그 해부터 1905년까지 3년 동안 하와이로 온 사탕수수 노동자의 수는 7,200명이 넘었다.
3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다음 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계속 일할 것인지,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고 수천 명의 조선인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다시 쿠바로,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 그리고 캘리포니아 철도노동자로 옮겨갔다.
이것이 한국인의 최초 미국이민이다.
하와이의 그 열악한 사탕수수 노동자의 삶 가운데서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냈고 수십 개의 교회를 세웠다.
밧데이의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대부분 아이티로부터 온 불법체류자들이다. 2010년 1월 13일에 발생한 아이티의 지진은 10만명인지 30만명인지 알 수 없는(공식발표는 16만명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고 한다) 희생자를 내었고 아이티는 회생이 불가능한 피해를 입었다.
그 때 국경을 넘어 도미니카로 온 아이티인들은 도미니카 국민도 아니고 자녀를 낳아도 출생증명도 신분도 없다. 끝이 안 보이는 드넓은 사탕수수 밭 군데군데 마을을 이루고 사는 그들의 숫자는 100만 명을 헤아린다는데 서류나 신분이 없으니 정확한 통계도 없다고 한다.
그들은 하루 3~4 달러의 임금을 받는다고 한다. 사탕수수 재배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기계화 영농에 의하지만 도미니카 밧데이에서는 아직도 인력에 의존한다. 워낙 아이티 불법체류자들의 임금이 싸기 때문에 굳이 기계화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기계화로 인력을 줄이면 아이티 불법체류자들의 처리가 골칫거리가 되기 때문이란다.
사탕수수 대는 옥수수 대나 수숫대 보다 훨씬 껍질이 단단하다. 사탕수수를 베기 위하여는 꽤 길다란 칼을 휘둘러 사용한다. 그 칼을 온종일 휘둘러 사탕수수를 베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밧데이의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그리 힘들게 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선교팀이 갔을 때 마을에는 노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무그늘에 모여 한가로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기도 했다. 그들은 더러 오토바이도 타고 다녔고 더러는 말을 타고 다니기도 했고 핸드폰도 있고 더러는 자동차도 몰고 다녔다. 우리 선교팀이 온다고 교회로 모여 들어 함께 찬양도 하고 예배 드린 후 선교팀이 나누어주는 선물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밧데이의 드넓은 사탕수수밭을 바라보며 나는 116년 전의 조선인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이민들을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시간을 넘어 선교여행을 간다면 밧데이 보다 더 힘들고 열악했을 하와이 조선인 사탕수수 노동자 마을로 갔어야 하는 것 아닐까?
왜 하필이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츄세츠로 온 청교도도 102명이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온 조선인 이민자도 102명이었을까?
왜 그들이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날짜는 1월 13일이었고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발생일도 1월 13일이었을까?
우린 어떻게 한국인으로써 미국에 와서 살면서 도미니카 밧데이의 아이티인들을 찾아가게 되었을까?
과연 미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해방이 되었을까? 6.25 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지금 이렇게 미국에 살면서 도미니카로 선교여행을 갈 수가 있었을까?
1903년 1월 13일, 상선 갤릭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호놀루루에 도착한 조선인 사탕수수 노동자도 102명이었다. 1902년 12월 23일 제물포항을 출항하여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에 오는 그 배 안에서 인천 내리교회 교인이었던 김이채, 안정수 두 사람이 전도를 하고 성경을 가르쳐 호놀루루에 도착할 때는 절반 넘는 사람들이 감리교인이 되어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로 고난의 사탕수수 노동자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일당은 남자는 하루 65센트, 여자는 50센트였고 아침 해뜰 때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그들은 '루나'라고 불리는 십장의 채찍질을 당하며 고된 일을 해야 했다.
그 해부터 1905년까지 3년 동안 하와이로 온 사탕수수 노동자의 수는 7,200명이 넘었다.
3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다음 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계속 일할 것인지,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고 수천 명의 조선인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다시 쿠바로,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 그리고 캘리포니아 철도노동자로 옮겨갔다.
이것이 한국인의 최초 미국이민이다.
하와이의 그 열악한 사탕수수 노동자의 삶 가운데서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냈고 수십 개의 교회를 세웠다.
밧데이의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대부분 아이티로부터 온 불법체류자들이다. 2010년 1월 13일에 발생한 아이티의 지진은 10만명인지 30만명인지 알 수 없는(공식발표는 16만명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고 한다) 희생자를 내었고 아이티는 회생이 불가능한 피해를 입었다.
그 때 국경을 넘어 도미니카로 온 아이티인들은 도미니카 국민도 아니고 자녀를 낳아도 출생증명도 신분도 없다. 끝이 안 보이는 드넓은 사탕수수 밭 군데군데 마을을 이루고 사는 그들의 숫자는 100만 명을 헤아린다는데 서류나 신분이 없으니 정확한 통계도 없다고 한다.
그들은 하루 3~4 달러의 임금을 받는다고 한다. 사탕수수 재배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기계화 영농에 의하지만 도미니카 밧데이에서는 아직도 인력에 의존한다. 워낙 아이티 불법체류자들의 임금이 싸기 때문에 굳이 기계화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기계화로 인력을 줄이면 아이티 불법체류자들의 처리가 골칫거리가 되기 때문이란다.
사탕수수 대는 옥수수 대나 수숫대 보다 훨씬 껍질이 단단하다. 사탕수수를 베기 위하여는 꽤 길다란 칼을 휘둘러 사용한다. 그 칼을 온종일 휘둘러 사탕수수를 베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밧데이의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그리 힘들게 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선교팀이 갔을 때 마을에는 노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무그늘에 모여 한가로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기도 했다. 그들은 더러 오토바이도 타고 다녔고 더러는 말을 타고 다니기도 했고 핸드폰도 있고 더러는 자동차도 몰고 다녔다. 우리 선교팀이 온다고 교회로 모여 들어 함께 찬양도 하고 예배 드린 후 선교팀이 나누어주는 선물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밧데이의 드넓은 사탕수수밭을 바라보며 나는 116년 전의 조선인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이민들을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시간을 넘어 선교여행을 간다면 밧데이 보다 더 힘들고 열악했을 하와이 조선인 사탕수수 노동자 마을로 갔어야 하는 것 아닐까?
왜 하필이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츄세츠로 온 청교도도 102명이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온 조선인 이민자도 102명이었을까?
왜 그들이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날짜는 1월 13일이었고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발생일도 1월 13일이었을까?
우린 어떻게 한국인으로써 미국에 와서 살면서 도미니카 밧데이의 아이티인들을 찾아가게 되었을까?
과연 미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해방이 되었을까? 6.25 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지금 이렇게 미국에 살면서 도미니카로 선교여행을 갈 수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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