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3/6) 기가 막히는 반전(反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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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42.♡.♡.150)ㆍ2021-04-17 17:5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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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책, 유대인들이나 부림절로 지키면서 읽는 책,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 할 뻔 했던 구약성경 에스더서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승리의 모습이 여자인 에스더를 통하여 이처럼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일간의 금식을 마친 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의 앞에 나아가는 에스더의 모습에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왕은 에스더를 보고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에스더에게 내밉니다. 왕이 금홀을 내밀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만일 왕이 에스더를 보고 “심히 사랑스럽지” 아니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만일 왕이 에스더를 보고 “이 당돌한 것이 감히?”라고 생각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 만일 하나님께서 주님을 기뻐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요?
왕은 “심히 사랑스러운” 에스더에게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자기 앞에서 춤을 춘 살로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하던 미친 왕 헤롯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사랑에 눈 먼’ 왕의 모습에서 또한 우리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자기 몸으로 드린 화목제물을 받으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신 ‘사랑에 눈 먼’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무엇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까? 무엇으로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었습니까? 오직 주님의 ‘심히 사랑스러움’으로 인하여서입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그 자리에서 바로 왕에게 하만을 고자질하고 유대인의 사면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자신의 베푸는 잔치에 하만과 함께 참석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잔치는 즐거움을 주는 자리입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잔치를 베풀어줌으로써 왕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청을 받아들여주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왕으로 하여금 에스더의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하면서 그 청을 거절할 수 없도록 하려는 치밀한 계획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빈손으로 나아가 은혜를 베풀어주기만을 바라지 아니하고 왕의 기뻐하는 것을 먼저 해드리는 에스더의 모습은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는 주님의 모습의 예표라 할 것입니다.
에스더는 첫 번째 잔치자리에서 왕에게 청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잔치에 재차 초청을 합니다. 아마도 처음 베푼 잔치의 기쁨을 더욱 큰 즐거움으로 이어가게 하려고 그랬는지, 왕에게 드리는 잔치와 자신과 유대인을 위한 청을 드릴 잔치를 구분하는 현명함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잔치는 단순히 기쁨과 즐거움만의 자리만이 아니라 심판과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라든지, 임금의 잔치자리 초청(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라든지, 바깥 추운 곳에 내어던지라든지 하는 성경의 여러 잔치,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혼인잔치 같은 모든 잔치는 오직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참예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웃기는 것은 그 잔치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는 원수 하만이 왕과 함께 초청받았다고 으쓱대며 기고만장하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착각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전개과정에서 하나님의 한 치도 틀림없는 섭리하심이 진행됩니다. 에스더 왕후의 잔치에 왕과 함께 단 둘이 초청 받았다고 기고만장하여 퇴궐하던 하만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르드개를 보고 기분을 잡치고 머리끝까지 화가 나게 됩니다. 하만이 집으로 돌아와 아내 세레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고, 세레스는 하만에게 높이 오십 규빗의 나무를 세운 다음 왕에게 청하여 모르드개를 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날 밤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왕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내사들에게 역대일기를 읽도록 하였고 그 역대일기에서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모의를 밝혀내어 자신의 목숨을 구하였다는 사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편 이를 알 길 없는 하만은 그 다음날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를 청하기 위하여 왕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자기 꾀에 빠져 욕을 당하게 되는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쩌면 이렇게도 오묘한지요. 하나님의 지혜를 누가 당하리요.
왕은 “심히 사랑스러운” 에스더에게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자기 앞에서 춤을 춘 살로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하던 미친 왕 헤롯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사랑에 눈 먼’ 왕의 모습에서 또한 우리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자기 몸으로 드린 화목제물을 받으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신 ‘사랑에 눈 먼’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무엇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까? 무엇으로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었습니까? 오직 주님의 ‘심히 사랑스러움’으로 인하여서입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그 자리에서 바로 왕에게 하만을 고자질하고 유대인의 사면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자신의 베푸는 잔치에 하만과 함께 참석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잔치는 즐거움을 주는 자리입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잔치를 베풀어줌으로써 왕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청을 받아들여주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왕으로 하여금 에스더의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하면서 그 청을 거절할 수 없도록 하려는 치밀한 계획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빈손으로 나아가 은혜를 베풀어주기만을 바라지 아니하고 왕의 기뻐하는 것을 먼저 해드리는 에스더의 모습은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는 주님의 모습의 예표라 할 것입니다.
에스더는 첫 번째 잔치자리에서 왕에게 청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잔치에 재차 초청을 합니다. 아마도 처음 베푼 잔치의 기쁨을 더욱 큰 즐거움으로 이어가게 하려고 그랬는지, 왕에게 드리는 잔치와 자신과 유대인을 위한 청을 드릴 잔치를 구분하는 현명함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잔치는 단순히 기쁨과 즐거움만의 자리만이 아니라 심판과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라든지, 임금의 잔치자리 초청(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라든지, 바깥 추운 곳에 내어던지라든지 하는 성경의 여러 잔치,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혼인잔치 같은 모든 잔치는 오직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참예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웃기는 것은 그 잔치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는 원수 하만이 왕과 함께 초청받았다고 으쓱대며 기고만장하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착각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전개과정에서 하나님의 한 치도 틀림없는 섭리하심이 진행됩니다. 에스더 왕후의 잔치에 왕과 함께 단 둘이 초청 받았다고 기고만장하여 퇴궐하던 하만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르드개를 보고 기분을 잡치고 머리끝까지 화가 나게 됩니다. 하만이 집으로 돌아와 아내 세레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고, 세레스는 하만에게 높이 오십 규빗의 나무를 세운 다음 왕에게 청하여 모르드개를 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날 밤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왕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내사들에게 역대일기를 읽도록 하였고 그 역대일기에서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모의를 밝혀내어 자신의 목숨을 구하였다는 사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편 이를 알 길 없는 하만은 그 다음날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를 청하기 위하여 왕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자기 꾀에 빠져 욕을 당하게 되는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쩌면 이렇게도 오묘한지요. 하나님의 지혜를 누가 당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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