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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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42.♡.♡.150)ㆍ2023-03-11 16:3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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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의 신앙은 어찌 보면 눈물겨우리 만치 애절합니다.
브라만(승려, 사제계급), 크샤트리아(무사계급), 바이샤(농. 상민), 수드라(노예)로 나누이는 캐스트 제도에 따라 신분이 정해집니다. 수드라 중에도 ‘메괄’이라 부르는, 몸에 손도 댈 수 없다는 가장 비천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까지도 운명에 순종해 살아가면서, 천한 계급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前生)의 업보(業報)로 신(神)이 정한 것이요, 여기에 순종하여 착하게 살아야 다음엔 깊은 명상과 수도를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높은 신분인 브라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들은 시신을 화장(火葬)한 다음 그 뼛가루를 갠지스강에 뿌립니다. 갠지스강에 뿌려진 영혼은 흘러서 바다로 갑니다. 그리고 구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갑니다. 눈이 되어, 비가 되어 히말라야의 봉우리 위에, 또 대지에 내립니다. 이 빗물이 곡식을 자라게 하고 농작물의 열매가 됩니다. 이 곡식을 남자가 먹으면 그 영혼은 남자의 정액을 통하여 여자에게 들어가서 새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전생의 업보에 따라 높은 신분이나 천민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그나마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 하고 짐승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환생을 주관하는 신은 히말라야의 만년설 위에 존재하는 시바神이라고 합니다. 시바神 외에도 무서운 크리슈나神, 인간의 운명을 지키는 강가神, 티무르神, 두르가女神, 그리고 원숭이神인 하누만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神들을 섬깁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산채로 함께 火葬됩니다. ‘사띠’라고 하는 이 잔인한 풍습을 그러나, 아내는 당연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남편의 뒤를 따라 불 속에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의 진노가 떨어지니까요.
불교(佛敎)에는 육도(六道)라는 것이 있습니다. 죽으면 생전의 업보에 따라 여섯 가지 중 하나로 태어납니다. 여기엔 천상계(天上界), 아수라(阿修羅), 인간, 짐승, 아귀(餓鬼), 지옥이 있습니다. 인간은 죽어서도 이 육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생전에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자는 아귀로 태어나는데, 배는 남산만 하나 목구멍은 바늘구멍 같아 배고픔을 면할 수 없고, 벌거벗은 해골 같은 몰골로 뜨거운 고통을 받으나 물을 마시려고 하면 그 물이 불로 변하는 바람에 물도 못 마신다고 합니다. 이들이 먹을 것을 두고 싸우는 것을 아귀다툼이라 한답니다.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육도(六道)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답니다. 이 굴레를 벗어나는 길은 도를 구하여 깨달음을 얻고 해탈(解脫)의 경지에 들어가 부처가 되는 것뿐이랍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해탈하여 부처가 되기 위하여 속세를 떠나고 칠정오욕(七情五慾)을 끊고 수도(修道)를 한답니다. 그러나 “나는 가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알쏭달쏭한 선문답, 그리고 수십, 수백 과의 사리를 남기고 열반한 고승들은 과연 육도의 그 굴레를 벗어나 부처가 되고 천상계에 가셨을까요?
아아, 무서운지고,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고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요? 구천길 헤메이는 혼백이 되어, 두고 온 사람을 향해 서럽게 울고 또 울어야 할까요? 윤회를 통하여 다시 태어날까요? 그런 거 없어! 죽으면 영혼이고 뭐고 끝나는 것일까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천길 암흑의 종말, 그것이 죽음의 밑바닥일까요? 저토록 애절한 인도인들의 신앙과, 삼천이 넘는 경전(經典)의 심오한 도를 가르치는 불교가 진정 인생의 해답이요, 죽음의 저편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진리일까요? 힌두교도가 죽으면 그 영혼이 히말라야 하늘 위에서 다시 비로 내리고, 불교도가 죽으면 육도에 따라 다시 태어나게 될까요?
만일 시바神이 창조주요, 부처가 된 싯달타 왕자가 우주만유 주재자라면 그리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창조주도 주재자도 아니라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과 죽음은 창조주, 만유의 주재자에게 있음이요, 아무리 수양과 명상이 깊고 신비스러우며 아무리 높은 지혜와 가르침이 있다 해도 죽음의 저편을 주재하지 못 하는 종교라면, 다만 이생에서의 수양과 명상과 인격도야일 뿐, 결국 헛수고요, 스스로의 삶을 속박할 뿐이 아니겠습니까? 진리가 아니라면, 유일하신 조물주, 참신(神)에게 의탁하지 못 하는 종교라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런즉, 당신의 영혼을 향하여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신, 인생을 지으신 분이 정말 계신가? 계시다면 그분은 누구이신가? 나의 인생, 나의 죽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는 영혼의 진실한 울림을 따라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오십시오. 다른 곳에 가서 참신 아닌 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고귀한 당신의 영혼을 내어 맡기지 마십시오. 죄악 된 인생, 당신이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죄값을 치르고 대속(代贖)하신 사랑의 하나님, 그분이 천지만물과 우리 인간, 바로 당신을 지으신 창조주요, 심판주요, 만유의 주재이시며, 당신이 지금 만나야 할 분입니다. 그분이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고 당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처럼 지금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 저 너머를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를.
<생물들의 혼(魂)과 인생들의 영(靈)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욥기 12장 10절>
브라만(승려, 사제계급), 크샤트리아(무사계급), 바이샤(농. 상민), 수드라(노예)로 나누이는 캐스트 제도에 따라 신분이 정해집니다. 수드라 중에도 ‘메괄’이라 부르는, 몸에 손도 댈 수 없다는 가장 비천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까지도 운명에 순종해 살아가면서, 천한 계급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前生)의 업보(業報)로 신(神)이 정한 것이요, 여기에 순종하여 착하게 살아야 다음엔 깊은 명상과 수도를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높은 신분인 브라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들은 시신을 화장(火葬)한 다음 그 뼛가루를 갠지스강에 뿌립니다. 갠지스강에 뿌려진 영혼은 흘러서 바다로 갑니다. 그리고 구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갑니다. 눈이 되어, 비가 되어 히말라야의 봉우리 위에, 또 대지에 내립니다. 이 빗물이 곡식을 자라게 하고 농작물의 열매가 됩니다. 이 곡식을 남자가 먹으면 그 영혼은 남자의 정액을 통하여 여자에게 들어가서 새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전생의 업보에 따라 높은 신분이나 천민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그나마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 하고 짐승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환생을 주관하는 신은 히말라야의 만년설 위에 존재하는 시바神이라고 합니다. 시바神 외에도 무서운 크리슈나神, 인간의 운명을 지키는 강가神, 티무르神, 두르가女神, 그리고 원숭이神인 하누만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神들을 섬깁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산채로 함께 火葬됩니다. ‘사띠’라고 하는 이 잔인한 풍습을 그러나, 아내는 당연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남편의 뒤를 따라 불 속에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의 진노가 떨어지니까요.
불교(佛敎)에는 육도(六道)라는 것이 있습니다. 죽으면 생전의 업보에 따라 여섯 가지 중 하나로 태어납니다. 여기엔 천상계(天上界), 아수라(阿修羅), 인간, 짐승, 아귀(餓鬼), 지옥이 있습니다. 인간은 죽어서도 이 육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생전에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자는 아귀로 태어나는데, 배는 남산만 하나 목구멍은 바늘구멍 같아 배고픔을 면할 수 없고, 벌거벗은 해골 같은 몰골로 뜨거운 고통을 받으나 물을 마시려고 하면 그 물이 불로 변하는 바람에 물도 못 마신다고 합니다. 이들이 먹을 것을 두고 싸우는 것을 아귀다툼이라 한답니다.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육도(六道)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답니다. 이 굴레를 벗어나는 길은 도를 구하여 깨달음을 얻고 해탈(解脫)의 경지에 들어가 부처가 되는 것뿐이랍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해탈하여 부처가 되기 위하여 속세를 떠나고 칠정오욕(七情五慾)을 끊고 수도(修道)를 한답니다. 그러나 “나는 가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알쏭달쏭한 선문답, 그리고 수십, 수백 과의 사리를 남기고 열반한 고승들은 과연 육도의 그 굴레를 벗어나 부처가 되고 천상계에 가셨을까요?
아아, 무서운지고,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고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요? 구천길 헤메이는 혼백이 되어, 두고 온 사람을 향해 서럽게 울고 또 울어야 할까요? 윤회를 통하여 다시 태어날까요? 그런 거 없어! 죽으면 영혼이고 뭐고 끝나는 것일까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천길 암흑의 종말, 그것이 죽음의 밑바닥일까요? 저토록 애절한 인도인들의 신앙과, 삼천이 넘는 경전(經典)의 심오한 도를 가르치는 불교가 진정 인생의 해답이요, 죽음의 저편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진리일까요? 힌두교도가 죽으면 그 영혼이 히말라야 하늘 위에서 다시 비로 내리고, 불교도가 죽으면 육도에 따라 다시 태어나게 될까요?
만일 시바神이 창조주요, 부처가 된 싯달타 왕자가 우주만유 주재자라면 그리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창조주도 주재자도 아니라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과 죽음은 창조주, 만유의 주재자에게 있음이요, 아무리 수양과 명상이 깊고 신비스러우며 아무리 높은 지혜와 가르침이 있다 해도 죽음의 저편을 주재하지 못 하는 종교라면, 다만 이생에서의 수양과 명상과 인격도야일 뿐, 결국 헛수고요, 스스로의 삶을 속박할 뿐이 아니겠습니까? 진리가 아니라면, 유일하신 조물주, 참신(神)에게 의탁하지 못 하는 종교라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런즉, 당신의 영혼을 향하여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신, 인생을 지으신 분이 정말 계신가? 계시다면 그분은 누구이신가? 나의 인생, 나의 죽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는 영혼의 진실한 울림을 따라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오십시오. 다른 곳에 가서 참신 아닌 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고귀한 당신의 영혼을 내어 맡기지 마십시오. 죄악 된 인생, 당신이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죄값을 치르고 대속(代贖)하신 사랑의 하나님, 그분이 천지만물과 우리 인간, 바로 당신을 지으신 창조주요, 심판주요, 만유의 주재이시며, 당신이 지금 만나야 할 분입니다. 그분이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고 당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처럼 지금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 저 너머를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를.
<생물들의 혼(魂)과 인생들의 영(靈)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욥기 12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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