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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페이지 정보

짐보 (108.♡.♡.226)2018-05-08 09:51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흔히들 깨어있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로마로 가서 제도(制度)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 문화(文化)가 되었고 미국으로 가서 기업(企業)이 되었고
마침내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大企業)이 되었다.”
고 비아냥거리며 비판한다.
옳은 말이고 잘못된 신앙의 공동체의 현실을 풍자하기에
정곡(正鵠)을 찌른 비판에 감탄하지만
현실은 이 주장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성경이 믿음의 기준이라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교회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라면서
그리스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한 지체라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고
수많은 설교와 주장을 들어왔기에 새 신자자도 교회를 다 안다 하지만
사실 안다는 깊이 없는 앎은 온전한 분별이 못됨은
교회가 제도가 되어 직분이 믿음의 척도(尺度)가 되면
한 지체가 아니라 분리가 되기에
우열을 가리는 직분이 되었고
직분이 권력이 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누어
이미 직분은 세상적인 계급이 되어 하나님의 의(義)에서 떠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는 상실(喪失)되어 권위와 권력이 된 종교화한
믿음이라는 사상은 한 시대의 종교적인 이데 오르기가 되어 법이 되거나
불문법(不文法)으로 관행과 전통이 되면
이미 교회는 성경의 교회와 담을 쌓고 분리되어
신앙의 공동체가 아니라 그 시대가 만든 외식된 조직이 되었으면서
신앙을 파는 종교행위를 거룩한 척 가장하기에
좁은 문으로 간 신앙인들은 외식된 조직에 늘 대항하였기에 박해를 받았고
교회사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오늘날의 현실이 증거이며
예수님 당시 성전 제도와 직분이 그러했기에
예수님은 제도와 직분의 근본이 된 성전을 헐 우신다 하셨다.

오늘날 예수님 당시와 무엇이 다른지
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 우신다 하셨는지
근본적인 믿음으로 기초적이고 순수한 신앙의 양심으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이제 라도 분별을 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안다 하면서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한 그리스도의 초보라
그런 자들은 선지지 노릇을 하거나 선생이 되거나 가르치는 직분을 맡으면
본인에게 화가 있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도 마찬가지라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4]

이 말씀은 교회에 출석만 하여도 집사 된 사람도 설교로 듣고
수 없이 반복되어 인용한 말씀이라 수 없이 들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주님의 말씀을 옳게 적용하여 인도하는 사람은 상상 의외로 적다.
왜 그럴까.
위선에 무감각하여 비리와 죄에 대하여 관대한 것 같지만
사실은 외식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오늘날로 적용한다면
“주여 주여 하는 자”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부인하는 자들이 아니라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한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드리는 목사든 장로든 그 누구든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하셨다.
왜 ‘믿음’ 으로 천국 간다고 하시지 않으시고
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라 하셨을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義)가 믿음이 되어 행하는 자,
그런 자들을 그리스도 주님께서는
‘믿음’ 에서 ‘행위’ 를 분리하셨나?
그리스도 예수님은 ‘구원’ 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으신다 하셨고
행위는 어떻게 하든 이차(二次)적이고 부차적이라 하셨는가?
아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난 교회사에서 성경을 비틀었고
오늘날도 성경을 비틀어 어설픈 구원론에 행위를 제외한 자들과
교회의 예배만이 예배로 아는 맹신자들이
“주여 주여” 말로만 부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는 말 뿐인
앵무새 같이 노래하는 사람들을 보라.
이런 자들이 지도자라면 ‘구원’의 구원론을 반복 반복으로
끝없이 이런 구원 설교를 하여 구원론에 벗어나지 못하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설교가 아닌가.

구원 받은 자들이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할지
그리그도 주님의 제자로 살아야 할지
분별력으로 가르치지 못하고 듣는 자들도 이와 같아
현실은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에서 멀어져
그리스도 복음의 정의가 사라진 현상을 보라.
그러나 주님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외식하는 자들이 그 당시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런 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빌어 카리스마 적인 존재로
주님을 부르고 많은 권능을 행하실 것을 이미 말씀하셨다.
그날에,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예언자 노릇하고
선생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을 빌려,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자기 권력과 능력의 권능을 행하였다 하더라도
특별히 자신이 택함 받은 성직자로 권능을 행하였다 하더라도
교회를 부흥시켰다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나님 뜻인 하나님의 자녀로의 의(義)로 행하지 않았기에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그리스도 주님의 고귀한 사랑에
배신이며 그리스도 복음의 어그러진 길이라
“주의 이름” 으로 권능을 행하였다 하더라도
일시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허락하셨듯이
이는 하나님께서 욥의 시험을 사탄에게 허락하셔서 사탄을 사용하시듯이
어는 때는 주님도 악한 자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거룩하신 그리스도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파는 일을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들이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였고
자신의 핑계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육체를 위하여 사용하였기에
‘주의 종’ 이라면서 자신을 성도와 분리한 분리주의 자들이
구약으로 돌아가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면서
마치 제사장이 된 듯이 예배를 제사로 여겨서
제도로 담을 쌓고 조직으로 벽을 만든 장벽(牆壁)으로 분리하고도
하나 되는 그리스도 복음의 의에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갔으면서
하나님의 종이라니
종이 아니라 상전이 되어 자신을 높이는 자들은
주의 종은 하나님과 주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였기에
특별히 죄를 지어도 특별히 용서하신 다는 자들은
유명한 부흥사나 설교자만이 아니라 주위에 수 없이 많고
이런 자들을 따르는 맹신자들과 더하여 광신자들은 이들의 대변인이 되어
변명하고 비판하는 자들에게 대항하고도 모자라
사이비나 이단으로 취급하여 내 쫓는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다만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
“다만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가
“누구든지” 로 예외가 없어 공평하신 주님의 말씀을
성경을 읽어도 이해할 수가 없어 주님의 같은 말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50]
이 같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같은 말씀을 인용한 황당한 설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그 날에” 그 날은 세상의 끝으로 세상의 심판 날 이라
주님의 일을 한다 하던 자들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타락하는 자들이
많음을 예언 하셨기에
오늘날 교회 출석하고 직분을 맡아 교회 일을 한다고
모두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무서운 말씀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꼭 지키려는 계명이 되지 못하면
믿음이라는 위선은 실체가 없이 허공을 쳐서
그 울림이 자신을 쳐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소리와 같아
자신이 자신에게 도취하여 말씀을 말하나
말씀을 도적질하여 취하는 도취(盜取)자가 된 자들이 선생이라니.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5:19]
예수님의 “행하며 가르치는 자” 는 선생(목사)라 할 수 있지만
주님은
근본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합당한 행위를 하면서 가르치기를 원하셨지만,
교회를 오래 동안 출석하고 직분을 받고도 아직도 단편적인 설교에 의지하기에
설교를 자기 입맛대로 단정하여 자기의 감각대로 설교자를 판단하는 자나,
믿음을 행위로 분별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초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도
성경을 가르치는 자가 되고도 ‘열매로 그 나무를 알라’ 고 설교하는
이 비정상적인 이치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진정 모르겠으면 그들이 어떻게 은퇴하나 보라.
은퇴 없는 원로목사가 되어 명예를 탐하는가.
은퇴 시 얼마나 많은 재물을 챙겼는가.
목회의 열매가 그런 건가.
명예 장로나 명예 권사는 도대체 무엇인가.
아직도 하나님은 교회의 직분을 따라 판단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가.
하나님은 교회의 직분을 따라 심판을 하시는 차별되신 하나님이신가.

행위는 믿음으로 비롯되고 믿음의 외적인 열매가 행위라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정의를 분리할 수 없기에
성경은 이를 진리라 하며 믿음은 분별이라 하는데
성경을 읽고 공부하기 게으른 자들은
아직도 배워야 하는 처지에 놓인 자들은
스스로 공동체의 직분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우선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아직도 직분이 자신의 인격과 신분을 나타내는 지위(地位)로 여겨
그리스도의 초보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오늘날 교회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 되었다.
그리스도 주님을 보라.
낮고 낮아져서 인간의 신분으로 오셨고,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의 신분을 오셨는지.
그리고도 미련하고 둔한 자들을 위하여
행하시며 가르치시고 그리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한 사랑
그 사랑으로 다시 오시고 또 오실 주님을 성경으로 바라보라.
미련한 사람을 모아 제자들로 세위시고
제자들에게 삶의 본을 보여주셨기에 제자들은 제자를 세웠고
또 바울도 이를 본받아 행하고 가르치는 자들을 세웠기에
그들은 우선 자기 자신들이 먼저 실천하며 외쳤기에 성경의 본으로 기록되었는데
아직도 목사만 주의 종이고
목사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우긴다면
당신은 ‘주여 주여’ 외치는 허황된 믿음을 가진 자 일 뿐이다.

누구나 선생이 되기를 원하나
선생은 행위로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하기에 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전의 한국 교회는 열심히 출석하고 조금 믿음이 있어 보이면
선생(목사)이 되라고 부추 키었기에 선택받았다는 사명감에
형편없는 많은 자들이 신학을 하였고 그 폐단으로 선생이라는 자들이
배워야 될 형편이 되었는데도
공동체를 세상의 조직으로 바꾸어 온 교인의 간부화가 아니라 직분 화를 만들어 오늘날 까지 이어지기에 그 제도가 개혁되어지고 새로워져야 하는데
제도가 교리를 떠받치고 교리가 조직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굳어져
복음의 의에 멀어져
복음이 세상의 복(福)이 되어가
솔직함과 정직함은 사라져가 예전의 어질고 성경에 박식한 선생과
순박한 신앙인은 찾아보기 어려운 세대라
소박한 교회를 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그러기에 야보고는 누구나 선생이 되고자 하는
이 위험한 선생의 분수(分數)를 경고 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My brethren,
be not many masters, knowing that we shall receive the greater condemnation. 야보고서 3:1]
누구나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려는 욕구에 대한 경고이며
선생이라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넘어 분수에 맞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영향력의 범위에 가두려는 욕심이 죄라
선생 된 자의 지도의 영향력은 자신이 얼마나 순종적이냐는
그리스도를 닮은 생활의 모범이 그리스도 사랑의 영역(靈域)이라
배우는 자들의 영향력의 범위라
선생의 권위는 진리에 충실하고 죄에 대하여 단호히 거부하는
모범적인 신앙인의 삶이지
단지 선생으로서의 권위는 그리스도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또한 선생 된 자는 가르쳐 선생을 세우는 의무가 있는 자라
모두가 선생 된 자로 세울 수 있는 분량으로 가르치며
동시에 자기 행위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진리로 진실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러나 불의하게도 야고보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교회사의 수많은 자들이 믿음에서 행함을 제외하여
하나 되는 믿음을 나누고 행위로 분리 하여 외식을 하였고
이 뿌리 깊은 외식을 예수님 당시로부터 오늘날 까지 행하여지고 있어
성경의 경고와 역사를 나름 진술(陳述)하는 글이 이어지겠지만
믿음에 행위를 제외한
그 분리의 근거(根據)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 주님의 이름을
언제나 사용하였음이 우연인가.
그것이 교리가 되었고 교회의 제도가 되었으며 조직이 되었기에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하는 자들이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갔으며 가고 있고
그런 자들이 내적인 믿음에 행위를 제외하였고
외적인 제도의 조직을 만들어 신앙을 종교화 하여
종교 지도자와 일반인을 나누어 성직으로 분리하였고
더하여 신분의 분리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분리를
주님을 이름으로 하고도
선지자 노릇과 선생 노릇을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상이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근본을 보자.
실체를 보자.

야보고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라는 주장이 무엇이 잘못되었나.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보고서 2:14-17]

야보고는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구원론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야보고의 주장에
반대하고 이전에도 교회사에서 수많은 자들이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 야보고의 진심을 읽으면 이해하기 쉽다.
야보고는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 말하지 않았고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표현 했다.
이 말은 참된 믿음이 있으면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 대한 말이 아니라
단지 입으로만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 대한 묘사라
믿음에 대한 증거가 행위라는 주장이라
그러기에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런 종류의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런 얄팍한 입으로만 시인하는 믿음으로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형제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말로만 위로하고 말로만 도와주랴.
요즘, 시대 말로, 기도만 하랴.
그런 믿음은 무익한
그런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입술에 머문 말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에 대한 무지이며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반역이라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야보고의 이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의미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그런 자들이 성도라 천국에 들어가고
심판은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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