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평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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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42.♡.♡.150)ㆍ2024-06-22 11:3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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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20-21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미국독립선언문의 기본신념은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며 생존권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과 생존권, 자유, 행복추구권 따위는 인간들 사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일까요? 나는 무슨 목적으로 지음 받아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요? 과연 나에게는 나의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인 자에게 그가 그렇게 된 것은 부모의 죄도 자신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또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며 진흙과 같은 인생을 하나님이 그 뜻대로 사용하신다고 누가 하나님께 뭐라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합니다. 어떤 진흙은 귀한 그릇으로 만들고 어떤 진흙은 아무렇게나 사용할 천한 그릇을 만들고 어떤 진흙은 도기를 구울 가마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해서 진흙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임 받든지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지음 받고 쓰임 받는 것이 영광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항상 함께 행동한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 세 사람은 변화산에도 주님과 함께 올라갔고, 겟세마네 동산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그 중 야고보는 제대로 쓰임 받지도 못 하고 헤롯왕에게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에 비하여 그 동생 요한은 90세가 넘도록 생존하면서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 주님을 뵙고 이 세상의 마지막날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을 남깁니다. 이 같은 불공평이 어디 있습니까?
1890년 무렵 프린스턴 신학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여러 교회가 앞 다투어 목회자로 초빙해가려던 인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여 선교사 훈련을 받고 인도로 가는 배에 올라 뉴욕을 떠나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희망봉을 돌아 두 달이나 걸리는 먼 행해를 거쳐 인도로 갑니다. 그러나 그는 인도 본토에 상륙도 못 해보고 인도 가까이 한 섬에서 풍토병으로 죽고 맙니다. 그 아까운 사람을 그렇게 준비시켜서 거기서 그토록 허망하게 죽게 하시다니,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원망할 만 한 일입니다.
귀히 쓰고 천하게 쓰고,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쓰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내가 기껏 이런 보잘것없는 일에나 쓰임 받다니 하는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생각이다 싶습니다. 척박한 사막에서 피어난 꽃도 메마른 돌 틈에서 피어난 꽃도 하나님을 향하여 온몸으로 찬양하고 향기를 뿜습니다. 시들어 죽는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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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선언문의 기본신념은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며 생존권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과 생존권, 자유, 행복추구권 따위는 인간들 사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일까요? 나는 무슨 목적으로 지음 받아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요? 과연 나에게는 나의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인 자에게 그가 그렇게 된 것은 부모의 죄도 자신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또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며 진흙과 같은 인생을 하나님이 그 뜻대로 사용하신다고 누가 하나님께 뭐라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합니다. 어떤 진흙은 귀한 그릇으로 만들고 어떤 진흙은 아무렇게나 사용할 천한 그릇을 만들고 어떤 진흙은 도기를 구울 가마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해서 진흙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임 받든지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지음 받고 쓰임 받는 것이 영광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항상 함께 행동한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 세 사람은 변화산에도 주님과 함께 올라갔고, 겟세마네 동산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그 중 야고보는 제대로 쓰임 받지도 못 하고 헤롯왕에게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에 비하여 그 동생 요한은 90세가 넘도록 생존하면서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 주님을 뵙고 이 세상의 마지막날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을 남깁니다. 이 같은 불공평이 어디 있습니까?
1890년 무렵 프린스턴 신학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여러 교회가 앞 다투어 목회자로 초빙해가려던 인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여 선교사 훈련을 받고 인도로 가는 배에 올라 뉴욕을 떠나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희망봉을 돌아 두 달이나 걸리는 먼 행해를 거쳐 인도로 갑니다. 그러나 그는 인도 본토에 상륙도 못 해보고 인도 가까이 한 섬에서 풍토병으로 죽고 맙니다. 그 아까운 사람을 그렇게 준비시켜서 거기서 그토록 허망하게 죽게 하시다니,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원망할 만 한 일입니다.
귀히 쓰고 천하게 쓰고,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쓰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내가 기껏 이런 보잘것없는 일에나 쓰임 받다니 하는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생각이다 싶습니다. 척박한 사막에서 피어난 꽃도 메마른 돌 틈에서 피어난 꽃도 하나님을 향하여 온몸으로 찬양하고 향기를 뿜습니다. 시들어 죽는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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