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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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42.♡.♡.150)ㆍ2024-05-24 07:06관련링크
본문
(갈라디아서 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
갈라디아서는 영어로 Galatians, 곧 ‘갈라디아인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는 에베소나 고린도, 빌립보처럼 도시 이름이 아니고 지금의 터키 수도 앙카라 동쪽의 넓은 나타톨리아 고원지역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고니온, 비시디아, 루스드라 등이 갈라디아 남부지역에의 속하는 도시들입니다. 종이가 없던 그 시대에 편지들은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되었고 수신자들은 돌려가면서 읽고 또 편지를 여럿 베껴 써서 여러 사람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복음서나 서신서들은 사본이 많지 않은 구약성경과 달리 많은 사본들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시 서신서들은 일종의 형식이 있어서 서두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명시하여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보내는 것인지를 적고 인사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쓴다면 “바울과 형제들이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축복하노라.”인데, ‘사람이 세우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라고 발신자 바울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고 또 ‘자신을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축복을 하노라’고 인사말을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길게 적은 서두를 통하여 사도바울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드리신 것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들어가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나는 경악했다.”라는 강한 표현입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빨리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곧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좇아가느냐고 기겁하여서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그것은 다른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혼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는 것이다. 설사 우리라 할지라도,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니라.” 복음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빨리 복음을 버리고 엉뚱한 이단, 사이비로 기울어지고 따라가는 것인지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다고 강렬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이단과 사이비가 들끓는 것은 오늘날 뿐 아니라 복음이 막 전해진 그 당시에도 그랬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쉽게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좇아가는 것일까요? 인간이란 그토록 어리석고 악한 존재입니다. 원수들은 복음 위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가라지는 인간의 악한 심성의 바탕에 뿌리를 내리고 창궐합니다. 주님께서도 씨 뿌리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가라지들이 추수(심판) 때까지 함께 자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바탕이 악한 인간들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싫어하였고 날마다 내리는 만나를 ‘박한 식물’이라고 싫어했습니다. 애굽의 가마 곁에서 먹던 마늘과 부추, 수박과 외, 생선과 고기를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루하고 단조롭게 여기고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자극적인 것을 좇아가고 색다른 것을 찾는 악한 인간심성이 가라지, 이단을 자라게 하는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그렇습니다. 예배마저 인간을 즐겁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A. W. Tozer 목사님(1897-1963)은 일찍이 그의 저서 ‘예배인가, 쇼인가.’를 통하여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쇼 같은 예배를 하고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듣기에 달콤하고 즐거운 말, 보기에 멋있고 화려한 것, 무엇인가 더욱 색다르고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을 찾아 유행을 찾듯 찾아 헤매는 악한 세대의 악한 취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라지로 뒤덮이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인 채 죽음을 앞두고 쓴 디모데후서에서 토해낸 경고의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3-8).”
이 싸움은 믿는 자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싸움일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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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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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는 영어로 Galatians, 곧 ‘갈라디아인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는 에베소나 고린도, 빌립보처럼 도시 이름이 아니고 지금의 터키 수도 앙카라 동쪽의 넓은 나타톨리아 고원지역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고니온, 비시디아, 루스드라 등이 갈라디아 남부지역에의 속하는 도시들입니다. 종이가 없던 그 시대에 편지들은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되었고 수신자들은 돌려가면서 읽고 또 편지를 여럿 베껴 써서 여러 사람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복음서나 서신서들은 사본이 많지 않은 구약성경과 달리 많은 사본들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시 서신서들은 일종의 형식이 있어서 서두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명시하여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보내는 것인지를 적고 인사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쓴다면 “바울과 형제들이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축복하노라.”인데, ‘사람이 세우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라고 발신자 바울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고 또 ‘자신을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축복을 하노라’고 인사말을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길게 적은 서두를 통하여 사도바울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드리신 것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들어가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나는 경악했다.”라는 강한 표현입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빨리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곧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좇아가느냐고 기겁하여서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그것은 다른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혼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는 것이다. 설사 우리라 할지라도,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니라.” 복음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빨리 복음을 버리고 엉뚱한 이단, 사이비로 기울어지고 따라가는 것인지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다고 강렬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이단과 사이비가 들끓는 것은 오늘날 뿐 아니라 복음이 막 전해진 그 당시에도 그랬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쉽게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좇아가는 것일까요? 인간이란 그토록 어리석고 악한 존재입니다. 원수들은 복음 위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가라지는 인간의 악한 심성의 바탕에 뿌리를 내리고 창궐합니다. 주님께서도 씨 뿌리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가라지들이 추수(심판) 때까지 함께 자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바탕이 악한 인간들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싫어하였고 날마다 내리는 만나를 ‘박한 식물’이라고 싫어했습니다. 애굽의 가마 곁에서 먹던 마늘과 부추, 수박과 외, 생선과 고기를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루하고 단조롭게 여기고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자극적인 것을 좇아가고 색다른 것을 찾는 악한 인간심성이 가라지, 이단을 자라게 하는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그렇습니다. 예배마저 인간을 즐겁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A. W. Tozer 목사님(1897-1963)은 일찍이 그의 저서 ‘예배인가, 쇼인가.’를 통하여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쇼 같은 예배를 하고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듣기에 달콤하고 즐거운 말, 보기에 멋있고 화려한 것, 무엇인가 더욱 색다르고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을 찾아 유행을 찾듯 찾아 헤매는 악한 세대의 악한 취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라지로 뒤덮이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인 채 죽음을 앞두고 쓴 디모데후서에서 토해낸 경고의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3-8).”
이 싸움은 믿는 자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싸움일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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