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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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00.♡.♡.223)ㆍ2018-05-15 02:4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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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생물에게 주어진 감각과 감정은 진화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진화론자들은 무기물질과 물이 태양의 빛과 열을 받아 광합성을 일으켜 유기물질이 생겨나고 이 유기물질들이 결합하여 DNA와 생명체가 생겨났다는 가설을 신봉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DNA가 상상을 초월하는 작은 크기의 30억 개의 핵산, 아미노산 단백질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무려 200여종의 다양한 핵산, 아미노산의 질서정연한 결합체라는 사실은 자연적이고 우연한 진화에 의한 생명기원설을 반박하기에 충분합니다.
진화론자들은 물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물에 비친 햇빛이 무기물질을 변화시켜 유기물질을 만들고, 그 유기물질들이 결합, 연합하여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가설을 신봉합니다. 그러나 물은 물에 섞인 것들을 녹이고 흩어서 분산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수 백 종류의 핵산, 아미노산이 물 속에서 한 자리에서 생성되어 30억 개가 질서정연하게 조립, 연결되어 DNA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수분이 있으면 다 녹아서 흩어져 버리고 물이 없으면 말라붙어 버립니다. 물속에서 생명체가 탄생했다는 가설은 억지입니다.
좋습니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대로 물에서 그런 식으로 DNA가 생겨나고 또 원시생명체가 생겨났다고 칩시다. 그러나 생명이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생명이란 어떤 현상도 아니요 유형적 존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전기작용도 아니고, 화학작용이나 물리작용도 아니고, 형체도 없고 부피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도대체 생명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 미세한 조직이 생겨난다고 해도 그것이 살겠습니까? 저절로 생명이 생기겠습니까? 죽은 세포가 도로 살아나지도 못 하는데 어떻게 생명이 저절로 생겨난단 말입니까? DNA가 생기고 생명체조직이 생겨나면 저절로 생명이 부여되거나 생긴다고 가정하는 것은 비약적 억지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생명운동과 감각과 감정의 문제입니다. 처음 생겨난 생명체가 생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는 생명운동이 필요합니다. 먹고 배설하고 먹은 것을 소화시키고 이를 산소와 결합시켜 에너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먹기 위하여는 먹고자 하는 의욕이 필요합니다. 아무 의욕이나 감각이 없이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조그만 생명체에도 주어진 먹고 생존하려는 본능과 생명활동은 결코 절로 생겨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든지, 뜨겁게 느껴지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라든지, 부드럽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든지, 맛으로 독성을 구별하는 능력도 생명체가 저절로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도대체 뜨겁다, 차갑다 하는 개념조차 있을 턱이 없을 테니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진화론의 억지는 계속됩니다. 그렇게 생명활동을 시작한 생명체가 분열하여 그 개체수가 증가하는 현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이를 단순히 "분열", “진화”라는 말 한 마디로 비판 없는 맹신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열이라니요? 쪼개면 죽어버려야 하는데 어떻게 분열하여 똑같은 개체로 늘어나서 다시 살아난단 말입니까? 이보다 신기한 마술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신비한 생명체의 분열증식의 신비한 과정은 전혀 설명조차 않고 '분열'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니 진화론자들은 참으로 뻔뻔스러운 양심불량자들입니다. 생명체의 분열 뿐 아니라 생식과 온갖 생명작용이 온통 신비인데 진화론자들은 전혀 이를 설명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에게 주어진 감각과 감정은 더욱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감성과 이성은 모든 다른 생명체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으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놀라운 지적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영적세계를 감지하고 영원을 추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자, 이제부터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슬픔, 사랑과 그리움, 분노와 질투까지도, 모든 감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랑이 많은 사람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한의 것입니다.
슬픔과 아픔과 분노와 격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격정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감정도 하나님이 근원이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인자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자비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으로만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를 진노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질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때로 욱하는 성질을 낼 때가 많습니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새파랗게 화를 내는 것 말입니다.
저는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감정을 분출하시고 새파랗게 화를 내시며 욱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보았습니다.
모세를 길에서 만나 죽이시려고 하신 것도 그런 한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복지까지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실로에다 처박아(?)놓고 각기 소견에 선한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며 더 이상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수백년 동안 실로에서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일부 신실한 백성들은 일 년에 한 차례 실로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겨우 일 년에 한 차례 말입니다. 마치 마지 못 해 일년에 한 번 성탄예배에 나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엘가나와 그 아내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 의하여 모멸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먼저 먹고 가로채고 빼앗았으며 수종 드는 여인들을 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멸 받던 하나님의 법궤는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까지 강제동원됩니다. 그 날 이스라엘 보병 3만이 추풍낙엽처럼 블레셋 족속에게 엎드러집니다. 수 백 년 동안 홀대받던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 해결사로 투입되자 지금까지 참으셨던 하나님의 분노는 폭발하였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 당하고 법궤는 빼앗기고 엘리 제사장은 그 소식을 듣고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고 그 며느리는 고통중에 아들을 낳고 죽어갑니다. 엘리 제사장 집안은 하루에 멸문지화를 당하였습니다.
법궤가 탈취당하여 간 곳 아스돗과 가드와 에그론에서 하나님은 다곤신상을 치시고 불레셋 족속을 독종과 재앙으로 치심으로 진노하시고 화를 내셨습니다. 놀란 블레셋 족속들은 금으로 독종과 쥐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사하고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더러운 낯짝들을 어디다 들이미는 거냐?”
그리고 20년 후 사울왕이 죽고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이 법궤를 모시고자 했을 때, 이번에는 소가 뛰는 바람에 수레가 흔들리자 법궤를 붙잡았던 웃사를 치셔서 그 자리에서 죽이셨습니다. “감히 나를 붙잡아?”
기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려 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이렇게 표독하리만치 신경질적인 반응에 놀라서 법궤를 모시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머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벧에돔과 그 집에 복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다윗왕은 다시금 법궤를 모셔오게 되는데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춤을 추었던지 옷이 내려가 벌거벗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한 감정을 지니셨는지를 생각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조그만 행동에까지 웃고 우시고 토라지시는 것을 생각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을 슬프게 만들어드리는 일을 쉽게 저질러 버립니다.
못 본 체 외면하고, 무시하고, 내버려둡니다.
자녀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뒷방에 내팽개쳐두었다가 한 주일에 겨우 한 번 주일예배에 마지 못 해 나갑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욱 섬세하시고 더욱 예민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노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 분과 더욱 가까이 교제하십시오.
우리에게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이십니다.
한없이 다정다감하시고 사랑 많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감정이 그분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근원이십니다.
댓글목록
이준님의 댓글
이준 49.♡.♡.13
시37:23
잠16:9
잠19:21,
잠20:24
렘10:23
이것은 천국의 알곡 성도들만 믿게 하십니다
바나바님의 댓글
바나바 108.♡.♡.52
맞아요 목사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민하시고 섬세한 감정을 지니셨는지를 생각하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데 이러신 하나님을 가볍게 지나칠때가 많지요 너무나 죄송하고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별수 없이 우리는 회개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목사님 감사합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해 주시는 글 입니다 주께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