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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게시판

35.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페이지 정보

짐보 (96.♡.♡.163)2017-02-16 10:39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성경을 매일 습관처럼 읽다가 어느 문장이 이해를 못해
골몰하다 성경의 다른 장에서 답을 찾을 때가 많아질수록 장과 구절이 연결되어 같은 의미와 뜻의 내용임을 알게 되면서
성경의 오묘함과 심오함을 알게 되어 읽기가 버릇이 된 적이 있었고
또 읽어야 한다는 의무가 같은 구속감도 있었는데
6개월이면 한번 통독하고 다음 읽을 때는 정독을 했었는데 언제 부터인가
정독만 하고 있고 성경 읽기도 얼마만큼을 읽겠다는 강박관념을 떠나
편하게 되니 주제를 찾아 이리 저러 읽는 일이 많아졌고 무엇보다
정든 개역개정과 KJV 로 서로 비교하면서 의미를 더 알고 뜻이 더 확실해 짧고
간략히 정곡을 찌르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재주도 없어
글이 길어 져서 다시 줄이면 서로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아
차라리 책을 썼으면 좋겠다는 핑계도 생긴다.
글을 쓰면서 글이 무엇보다 언제나 자신을 먼저 찌르기에
때로는 고통의 아픔이 있고 힘들지만 글을 쓰게 힘주시며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감사하며 작은 가슴을 가진 자에게 넓은 마음을 주시며
나름 성경을 풀이하고 고백하고 외치라는, 가슴의 울림이 있어 글을 쓰지만
다시 언급하지만 이글이 완벽한 글이 아니며, 진리를 혼자 알고 있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쓴 글도 아니라  자신의 신앙의 고백이면서
조금 더 한다면 신앙인으로서 복음의 길로 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면, 그런 심정이기에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하여,
교회사에서 잘못된 오류와 알려지지 않았던 전통화되어 굳어진 의식 등을
비교하여 성경의 의,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자신의 신앙의 언어로 쓰고 있다.

평강은,
하나님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 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Be perfect, be of good comfort,
be of one mind, live in peace;
and the God of love and peace shall be with you.
Greet one another with an holy kiss.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Amen. 고린도 후서 13:11-13]
‘사랑’ 과 ‘평강’ 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사랑의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랑과 평강을 성경은 늘 같이
표현했으며 깊은 성경의 의미로는 사랑과 평강은 같은 의미이며 ‘평안’ ‘평강’
‘평화’ 는 ‘Peace' 로 같은 의미로 쓰였기에
‘사랑’은 ‘평강’을 의미하고 ‘평강’도 ‘사랑’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이 신앙은,
사랑은 평강과 함께 하고 평강도 사랑과 함께 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서로 평강하기를 원하시기에
신앙인이, 공동체가 사랑과 평강이 없다면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없다는 말로
아직 맹신자거나 광신자, 아니면 도취의 믿음에 취한 그런 개인이나 공동체는
사랑과 평강이 없음은
수치심은 신앙의 양심의 척도이기에
수치(羞恥)를 잃은 마음은 이미 죄에 맞닿은 영혼이기에
성경은 수없이 경고하고 자백하도록 기록되었기에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을
망각하였기에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없어 스스로 깨끗하다는 순수를 외치지만
이미 자정(自淨)의 능력을 잃었기에 성령님의 능력을 소멸한 자나 집단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진 황폐한 개인과 공동체를,
어찌 세상의 양심과 윤리와 도덕보다 못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진리는 높고 낮은 곳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세상보다 못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당연한 양 설득(說得)하려는 언행은
수치를 잃어
복음의 걸림돌이 된 이 현상을,
그런 자들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그 말씀의 뜻과 의미를 망각하였거나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인이거나 종교 집단이다.

태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음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된 평안이 없고
참된 사랑을 할 수 없기에,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죄’ 로 ‘평화’ 가없기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려고 이미 계획하셨다.
이는 태조에 창조의 하나님께서 안식을 하셨듯이
사람을 사랑하사 세상에서 평안의 안식을 주셨기에
이는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나그네 적인 시간적인 개념(槪念)이 아니라
철학적인 인생의 막바지를 향하여 궁극의 근본원리를 깨닫는 터득이 아니라
이런 관념을 넘어서 신앙은
오늘을 회피(回避)하고 천국을 바라보는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도외시한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 이 시간, 이 순간
감사하고 기쁨을 누리는 삶에서 평안을 누리는
그 평안을 위하여 평안을 잊지 않도록 안식일을 주셨는데,
세상에 어떠한 종교가 ‘안식’을 주는 종교가 있는가 보라.
그러나 수많은 이들은 이 안식을, 이 평안을 누리지도 못하면서
죄의식에 사로잡혀 늘 죄인임을 강조하고 고백하게 함으로
늘 죄의식에 벗어나지 못하여 울고불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설교로 강조하며
감정이 믿음을 지배하는 감성적이 되어 고함치듯 시끄러운 모임의 예배는
믿음으로 비롯된 이성의 모임이 아니라 감성의 도취로 치우친 모임은
복음의 의로 신앙의 개신(改新) 다지는 모임이라기보다
열심과 헌신을 서로 외치는 열정이 있으나 
그러나 분별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듯이
소리는 요란하나 자기와 자기의 모임을 위한 모임도 못됨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더욱이 하나님을 귀머거리로 기만하는 소란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신 감성의 위함의 위로를
믿음으로 둔갑한 자신도 모르는 병의 앓는 소리인 통성(痛聲)을
받아주시겠는가.
그런 요란과 소란을 떠는 자들의 공통점은 평안이 없다.
그러기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없기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기에 정직하지도 않고
성령, 성령 하면서 자기 감성의 도취를 성령 충만으로 착각하고
마음의 중심에 쌓은 모래성 같은 도취의 믿음으로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시끄럽고 거칠어 쉰 소리를 내며 자극적이라
이내 흥분하고 감격하는 자극적인 감정에 습성이 되어
부흥회에 중독된 양 버릇이 된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모임에 위안을 갖지만
그 위안은 대중(大衆)속에 느끼는 대중의식이며
군중(群衆)속에 느끼는 군중심리라서
평안(平安)이 아니라서 불안에 평강(平康)을
혼란한 마음과 심리에 평강(平康)에 굶주린 욕구의 표출(表出)이며
진리에 목 바름을 나타내면서 한편으로 감추는 행위라
그런 자들의 행위인 거룩을 흉내 낸 영음(詠吟)과 경건을 도용한 영성(靈性)을
부추김에 분별하지 못하여 판단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보라!
그런 자들이 수치를 알겠는가? 정직하겠는가?
그런 자들의 영혼에는 안식이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은 평안에 거하고
평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으며
평강은 성령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기에
안식은
최종적인 안식은 ‘천국’을 향하기에
천국을 하나님나라 라 하며 하나님나라는 ‘평강’을 의미하며
‘사랑’을 의미하기에
하나님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사도바울의 작별인사는 마음을 움직인다.
그의 가슴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저서 가슴을 울리고 흔든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끝으로 형제여 잘 지내길’
farewell, Fare you well,
잠시 떨어져 있을지라도 형제여 잘 있기를.
Be perfect, (성령님으로) 온전하며
be of good comfort, (성령님의)위로를 받으며
be of one mind,(한 성령님 같이) 한 마음으로
live in peace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and the God of love and peace shall be with you,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형제들과 함께 하리니.
Greet one another with an holy kiss,
서로 거룩한 성령님 안에 한 가족으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All the saints salute you,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성령님과 교제로 모든 성도의 문안이, 모두 같은 형제들과 함께
성령님께서 형제들과 함께 하길.
이를 작별의 인사를 한 사도바울에게는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받은 권능으로 말씀을 받은 기쁨이 있었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인 되어 위로를 받으며 평안을 누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나타난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이기에 그의 작별인사는
세상에서 형제로 또 하늘나라에서 형제로 만날 것을 믿기에
이 세상에서의 죽음마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맺어진 형제의 사랑이
끊어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바울의 외침이 눈에 선하게 들린다.
“끝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이 하나 되어 평안에 거하라”

평안은
우리 각 사람이 천국의 부르심에 참석한 영혼에 깃드는 평화이기에
이 땅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끼치는 평화이며 평강이기에
서로 사랑하므로 서 평안을 끼치다
종당에 갖는 평강이라
사도바울의 사심이 없는 작별인사는 마음을 움직인다.
그의 가슴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의 가슴에 간작한 형제자매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저서
가슴을 울리고 흔든다.

평강은
성령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이며 실상이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사랑으로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그 사랑을 보여주셨고 성령님은 이를 증명하시기에
평강은 성령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끄시는
실상이기에,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이제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자
은혜며 이 은혜를 우리가 믿음으로 쟁취한 적이 없으며
이 믿음마저도 선물이라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게 아니지만
믿는 자의 도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하나님의 사랑인 공의를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삶이 예배이기에
예배 자, 신앙인(believer)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를 뜻하기에
성경의 신자는 늘 복수인 공동체이며
공동체의 시작과 끝은 ‘평안’ 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평안은 ‘공평’ 인 것은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한 몸을 이룬
공동체 구성원인 형제와 자매의 부족한 지식에 지식을 더하고
부족한 물질을 나누는 일 등은 공평하신 하나님의 공평을 이루려는 예배이며
신앙인의 도리라 이 행위까지를,
공동체에 참석하여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행위까지를 믿음이라 하며
행위의 분량이 믿음의 분량이 되는 것이 ‘평강’ 인 것은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 이시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의 나라이기에
평강은 하나님의 정의(正義)이며
정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포함한 ‘공의’ 이며
공의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반복 반복하여 진리의 길, 복음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 소망의 삶이기에
현재의 삶이 괴로움과 어려움이 있어 극복하기 힘든 시련의 시간일 지라도
감당하지 못할 환난 중에서 평안을 누리려 함은 ‘평강의 하나님’ 이 주시는
평안의 소망을 알기에, 평안의 복음임을 알기 때문에
이미 참석한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이며
공동체가 서로사랑하지 못하는
분리 적이라 공평하지 못하며 정직하지 못하고 불의를 일삼으면
정의롭지 못하여 공평하지 못한 공동체는 이미 성령님과 함께 하는
하늘나라의 모형이 못되기에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의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된
공동체는, 이미 복음의 어그러진 현상으로
끼리끼리 자기들 끼리 함께하여 모든 이가 참석하지 못하는
어그러진 공동체는
형제자매로 거리끼게 한다.

로마서 14:17은 형제로 거리끼게 하지 말라 한다.
거리끼게, ‘stumbles’ 비틀거리게, 실족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마저도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meat and drink;
b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Ghost.]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righteousness,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뜻이기에 평강을 이룬다.
그래서 야보고서 3:18절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s sown in peace of them that make peace.]
평안, 평강하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평화로
예수님을 닮아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성령님의 평안으로 평안을 끼쳐
화평으로 씨를 심어 의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며
먹고 마시는 것도 형제를 거리끼게 하지 말고 실족하게 하는
모든 차별과 구별을 버려야 함은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동등하여 공평하고
차별이 없는 의의 나라이며 평강의 나라이며 기쁨의 나라이기에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와 공동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For he that in these things serveth Christ is acceptable to God,
and approved of men.
Let us therefore follow after the things which make for peace,
and things wherewith one may edify another. :18-19]
그러기에 덕을 세우는, one may edify another
‘edify’ 은 세우는, 건물을 세우듯 building,
화평으로 화평의 일로 건물을 세우듯이 덕을 세워서
이것이 은사라,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음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Wherefore comfort yourselves together, and edify one another,
even as also ye do. 데살로니가전서 5:11]

댓글목록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24.♡.♡.100

글 쓰는 자가 자기 마음에 먼저...
라는 서문에도 동의가 되고
구구절절....가슴에 와닿습니다
"평강은
성령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이며 실상이며"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으로 임하셨는데...
잘 읽고 많이 느끼고 돌아갑니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돌아가신다 시니
어디로 가시나이까?
평안에 거하여 화평케 하시고
평강에 깃드는 주말 되십시요.

김정한님의 댓글

김정한 114.♡.♡.146

우리를 부르심이 사실, 평강으로도의 부르심인데
이것을 누리는 것은
진리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겠지요.
거기에 대해선
잠동님도 동의하리라 봅니다 ^^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저는 어느 특정인을 상대로 글을 쓰지 않았는데
요즘 겨울눈에 잠겨 두문불출 잠긴 동산님을 왜 부르시는지
의도인지 의지인지 음습한 동기인지
동지섣달도 지난날에 느닷없는 겨울하늘의 날벼락 소리같이
동지섣달에 베잠방이를 입을망정 다듬이 소리는 싫다 던데
들볶음을 사서 고생하시려는지
뭔 이이제이, 비기 싫은 자, 비기 싫은 자로 대항하시는
눈에 훤한 가시거리 권법인지 검술인지 알다가 모를
술법 같기도 한데 실수 착오하신 것 같습니다.

준비 없는 이별과 예상하지 못한 괴이한 변고는
이변을 낳습니다.

최소한 검선이 되려면
찬밥 쉰밥 볶음밥 다 먹고 걸식을 하여 체질을 바꾸어야 하는데
(몸이 부실하신 것 같으시던데 체력을 키우소서)
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고통과 슬픔과 애통의 밥그릇에 쇠를 담아
대장쟁이 님의 대장간에서 풀무질하고 담금질한 검을 만들어
철로 철을 다루듯 면박 받고 면박을 받아 면박수련으로 다듬질한
정순한 보검으로 만들고 경전을 읽고 외우고 묵상하고
때로는 쓰러졌다 일어나는 괴로움과 참음의 인고의 세월 속에
심신을 수련하여 합일 일치 기도로
일격 필살의 검법을 연마하고
갑작스런 기습과 시험에 대비 하여 몸을 전신갑주로 보호해야
하는데 준비 없는 시련과 도전은 필패를 하기 쉽다는 별똥별님의 글
‘글이라 하여 다 글이 아니며 말이라 하여 다 말이 아니니라’ 는
글을 읽지 않으셨으며 그 뜻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진정 모르시는지요.
아무튼 저는 이 댓글과 상관없음을 게시판 지인들과 운둔 지인들
앞에 명백하고 명확히 밝히는 바이며
만약에 누군가 저를 연루시키거나 가담을 강요 한다면
참조 참고할 글을 이제 남기고 댓글을 떠납니다.

저는 묵을 좋아하지 않아 묵사발도 좋아하지 않지만
코배기들 사는 서쪽 나라 중원에 같이 사는 제 아내 객은
묵을 좋아하여 도토리를 줍는 유연한 몸놀림과 메밀 사서 돈 내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묵도 제조 소비하기에
묵을 담은 그릇 묵사발을 시도 때도 없이 시현하였기에
이에 본관은 묵사발 기세의 검심과 검법을 십성 터득하였음을
친절히 그리고 주의, 유의하여 알려드리며
때로는 관용의 검술을 잊어버릴 때도 많음을 전해드리며
이제 그만 댓글의 장을 떠납니다.

아멘넷님의 댓글

아멘넷 댓글의 댓글 173.♡.♡.153

짐보님
이런 류의
대단한 내공(?)의 댓글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
같은 한국사람이지만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같은
짐보님과 잠동님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서로 인내하는 수 밖에요...

공유님의 댓글

공유 댓글의 댓글 174.♡.♡.48

죄가 있으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회개하고 죄씻음 받고 구원받은 자가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큰 복입니다. 또 평안은 성도 상호간의 화목으로 나아갑니다. 지상에서의 성도의 거룩한 교제야 말로 참으로 아름답고 복됩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하고 온전케 되고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고 평안해야 하며 또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문안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관리자 목사님도 이 말씀에 예외가 아닌 줄로 봅니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공유님,
평안이 큰 복이다는 말씀에 동의 합니다.
예수님도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하셨으니,
여기서도 평안을 서로 끼치는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넷님의 댓글

아멘넷 댓글의 댓글 173.♡.♡.153

좋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님들을 주로 취재하는 사람이지 목사님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제가 까까머리였을 때
수업시간에 무협지를 읽다 들켜
무협지를 입에 물고 복도에서 쉬는 시간까지 벌을 받았습니다.
복도에서 아이들에게 놀림도 받았지만
놀림보다 다음 글이 더 궁금해서,
벌 받았으니 무협지를 돌려 달라 선생님께 사정하여
다 읽고 나니
그제야 아이들에게 놀림당한 일이 기억이나 어찌 무안한지.
뼈있는 댓글인데 과한면도, 주의, 환기하자며 쓰자니
그때 생각이 나서 ㅎㅎㅎ
잠긴동산님과 저와 원수진 일도 없고
지난날 다중아이디로 저를 험담한 일과 제 I.P 가 이중이라
비난도 했지만
제 I.P 가 아니라는 댓글만 남겼듯이 그런가 보다 넘어갔듯이
지금도 특별한 감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여간 출두하시게 하여 죄송하고 이 때 한마디 소견,
새 사이트에서 조금 더 개혁적이며 개방적인 사이트가
되었으며 아멘넷 발전에 도움이 될까 싶습니다.
구체적이면 제가 참견하는 것 같아
참고 하셨으면 합니다.

아멘넷님의 댓글

아멘넷 댓글의 댓글 173.♡.♡.153

제안이 있으시면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감사하죠. 저도 제 생각과 한계와 그리고 어려움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김정한님의 댓글

김정한 댓글의 댓글 114.♡.♡.146

짐보님의 갈고 닦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검술
짐작은 하고 있지만 역시로군요.
구경꾼들이야 이곳 논객님의 다양한 고검절기
구경해야 다른 동네에 가서라도 써 먹지요
크게 혼내지 말아주십시오.  ☻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그러니 조심하십시요.
제가 마음에 둔 생각을 감추는 스타일이 못되서
과한 면도 있습니다.
제가 어찌 혼을 낸다 시니요.
오히려 제가 과했습니다.

잠긴동산님의 댓글

잠긴동산 댓글의 댓글 73.♡.♡.91

태극기의 아이콘이신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님은 정직하시고 거짓과 편벽이 너무나 없어서, 세상에나 해도해도 너무 하는 이런 천치 바보 취급을 당하며, 파고 또 파 내어도 나올게 없는 백치 수준의 순백의 정직의 아이콘이 되심이 온 세계 만방에 널리 전파되고 있습니다. 잠자던 보수 세력을 일깨워 주신 종북 빨갱이님들이시여^^ 고맙고도 참으로 고맙습니다^^

짐보님 피차에 허벅지는 적당히 꼬집으시고 촛불 집회에 대한 고견 한마디 하시면^^ 싶습니다^^

잠긴동산님의 댓글

잠긴동산 댓글의 댓글 73.♡.♡.91

이번 글 부터는 댓글 tap이 존재하지도 않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가 봅니다!^^

태극기를 들면 애국자고
촛불을 들면 매국노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짐보님은 아멘넷에서 촛불 아이콘의 공인으로 우뚝 세워짐이 당당하고 자랑스럽습니까?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같은
짐보님과 잠동님은
이 땅에서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서로 인내할 수는 있어도
주 앞에서 서로 간지르며 사랑을 나누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촛불과 태극기에는 깊은 구렁이 있어 서로 오고 갈 수가 없다오. 복음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촛불족에 구원이 있겠느냐? 짐보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최순실 국정농단이란 언론조작과 JTBC 태블릿PC조작, 고영태 국정농단에 놀아나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며 하야하라 자살하라 좌익들의 굿판놀이에 같이 놀아 난자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당신이 목사이든지, 평신도이든지 교회의 직분 고하를 막론하고 조작에 놀아날 수 있는 귀가 얇은 자들, 귀에 들리는대로 흥분하며 대한민국의 대통령에게 저주를 퍼부은 자라면 과연 당신이 받아들인 복음이 그 진리의 순도가 구원에 이룰만한 충족에 이르겠습니까? 정의의 잣대가 불분명한 자들에게, 구원의 잣대 역시 불분명하여 구원이 무엇인지조차 진리를 제대로 알 길이 없는자들일게요. 그대들 몸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박근혜 대통령이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노라 하더이까?

짐보님에게 성령께서는 무엇이라 말씀 하셨습니까?
성령이 누구이신지 거부하는 뭘 모르는 님에게 성령이 무엇이라 하셨는지 묻는자가 오히려 문제가 있겠네요?

짐보님의 댓글

짐보 댓글의 댓글 96.♡.♡.163

에그, 왜 이글에 박대통령을, 보수와 종북 빨갱이를 언급하시다니...
저도 좀 지난 일을 꺼내 미안한 마음에, 주제와 상관없지만
주제와 8촌 4돈 간 연관이 있다 가정하고
우선 잠긴동산님의 신앙 프레임에 저를 가둘 수도 없으시고
저도 마찬 가지 입니다만 이제 정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까요?
한국인의 대체적인 신앙의 차원이 정치를 논 할 만 한 신앙의 수준 입니까?
정치 얘기하다 침 튀기며 언성을 높이며 고함치고 예수님을 팔아먹을 사람들 의외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태극기를 들면 애국자고
촛불을 들면 애국자 입니까?
아님 매국노 입니까?

진리는 온갖 이데 오르기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한
시대에 종속되고 예속된 관념도 아니고 견해도 아니라,
이를 테면
오늘날의 혼란은 좌, 우의 진영의 싸움으로 볼 수 있고
세대의 대립이라 볼 수 도 있지만
그런 진영과 대립의 현상은,
이 시대의 한 현상일 뿐입니다.
물론 양쪽 다 옳다 외치겠지만...
제 심정을 조금 만 드러낸다면
사회와 문화(사회의 도덕과 윤리라는 기준, 정신적인 가치관인 틀의 문화)의
정의가 실종된 현상일 뿐 입니다.

저를 님의 이데 오르기의, 기독교의 프레임에 가둘려 한다고 동의하지 않듯이 강요될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신앙인 이라면.

님이 좋아 할 얘기도 들려드리지요.
오래 전에 U.N 에 북한 인권법이 상정되었고
그 법이 정권에 의해 기권할 때 열 많이 받았습니다.
결국은 통과 되었고 국회에서도 통과 되었지만,
제가 북한 사정 좀 압니다.
지하 교회의 실상과 환상도 조금...
더불러 군사, 무기 체제도 관심이 있어서.

인간적으로 미안하고 거북한 마음이 서로 다시 들지
않게 서로 허벅지는 꼬집는 일 없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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