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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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108.♡.♡.226)ㆍ2018-11-05 10:12관련링크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라오디게아 교회
어느 학자는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시대의 변천(變遷)에 따른 교회 변화를 주장한다.
에베소 - 초대교회
서머나 - 박해 시대 교회
버가모 - 세속화 시대 교회
두아디라 - 암흑시대 교회
사데 - 종교 개혁 교회
빌라델비아 - 재림 운동 교회
라오디게아 - 종말 교회
이렇게 시대별로 교회를 구분하면 단순하여 역사적으로 설명하기 쉬울지 모르지만
세대주의 자들 같이 결정적인 오류를 범한다.
진리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가.
교회가 시대의 변천(變遷)에 따라 변하는가.
마치 한국교회에 뿌리 깊은 세대주의자들이 성경의 계시를 임의로 재단하여
시대별로 시대에 의미를 두어 진리의 불변성을 억지 해석하듯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변천의 역사성을 띠면
이미 인간의 판단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구원하심의 계시의 과정에
인간의 범주(範疇)로
인간의 사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구원의 시간표로 속박(束縛)하는
경거망동(輕擧妄動)이라
교회의 흥망과 변천(變遷)은, 변질은
세상의 시대사상, 상황, 환경에 예속(隷屬)하여 변절된 교회사의 근본은
인간의 믿음이라는 허식(虛飾)으로
종교적인 시대의 이데올로기(ideology)를 따른 행위로 이루어졌지만
그 믿음과 행위에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시대를 이끄심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교회가 교회라는 허울의 이름만 갖고 있는 상황은
교회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의 진리를 듣던 듣지 않던
시대의 흐름의 주류에 휩싸여 함몰하든 말든
그것은 교회의 책임이라
교회의 변천을 시대로 분류하면
이는 변치 않으신 진리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변덕이 심하여 종잡을 수 없는 변화무상(變化無常)하신 하나님으로 단정하는 짓이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화 없는 진리의 불변성(不變性)을 부인하는 자라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안다는 지식이 말하나
사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거나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 이제라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배워야 한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인간의 시간표로 재단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함은
시간과 장소와 상황, 그것은 인간의 범주라
인간의 범주의 한계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을 제한(制限)하는 불의(不義)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공(不恐)이라
이런 자들이 사이비며 이단이라
이를 테면 심판이나 심판의 때는 하나님의 영역이지
인간이 개입하여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에 충분한 책이면서
성경은 역사책이라기보다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진리의 (義)의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의한 교제며 약속이며
늘 함께 하신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역사성을 부인할 수도 없지만
그 역사성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졌고 질것이라 고백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쓰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려 하시기에
하나님의 공의로 시대를 이끌고 세대와 세대로 물려줄 책임이 있기에
이 책임을 믿음이라 하며
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주님의 복음으로 시대의 소명(召命)을 받았기에
그리스도 주님의 정의로 시대를 이끌 의무가 있기에
복음은 전함만을, 선교만을 의미하지 아니하며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진리를 가진 자라
진리가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행위와 함께 한, 성령님과 동행하는 행위가 믿음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삶이 예배라,
의로운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된 삶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라,
삶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시인하는 행위는
성령님과 함께 한 삶이라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성도라 하는데
어찌 성도가 하나님을 재단하려 하겠는가.
더구나 역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을 판단하려는
어둠의 세력은
언제나 성경을 곡해(曲解)하여 자신의 성경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시간으로 계산하였고
인간의 생각으로 한정된 사고의 체제로 구체화 한 신학이라는 명분으로
하나님을 단정하려는 시도는
늘 있었고 그 때마다 정당성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팔아
그 단정의 판단이 시대마다 달리하였고
그 때마다 이단과 사이비들이 세력화 되어 엉터리 계시를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에 맞선 하나님의 의로 살려는 자들은
시대의 체계적인 사상과 인위적으로 조직된 세력과 싸웠는데,
인간의 능력의 그릇에 하나님을 가두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제(前提)로 삼아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권위와 권력과 조직의 힘으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권력이 되어 재물을 빼앗는 지배의 세력이 되어
찬탈(簒奪)하는 통치의 세력이 되었고 되고 있다.
이런 일은 교회사의 비극이면서 오늘날의 비극이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닮아가는 분별력이 믿음이라
믿음은 노력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선물이라 은혜라 하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통하여 계시한 세상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닮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충분한 만큼의 분량을 제기하기에
이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성경을 넘어선 차원의 길을 제시하시지 않으시고
성경으로 인간에게 충분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공하시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문자적이고 인위적인 해석이 위험함은
하나님의 권세를 제한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간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인간의 시대적인 한정된 사상으로 또는 성경을 시대와 세대를 인간의 자로 재단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시기와 장소와 미래를 인간의 사고로 제약하면
이미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에 구속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이 되어
인위적인 신학의 이론에 머문 왜곡되고 조작된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에
시간과 장소와 또 미래를 단정하면
하나님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오만이라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 중 대표적인 문자적인 해석으로
성경을 잘못 주장하는 베드로후서 3:7-8을 보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베드로후서 3:7-8]
성경은 장과 장을 연결하여 읽고 장에서 구절의 뜻을 해석해야 하는데
단 한 구절로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 전 구절은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신 주님의 이유는
주님은 요한계시록의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고 또 수없이 말씀하셨듯이
주님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주기 위하여 오셨기에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돌아서기를 기다리시며
혹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 받기를 원하심이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매이시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인간과 같이 구속을 받지 아니하시기에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확정하거나 예언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일이라,
크고 넓게 성령님의 인도를 바라보면
성경이 성령님의 개입하심으로 기록되었듯이
성경을 기록한 인간의 언어는 성령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교통의 통로로 만드셨고
그 인간의 언어는,
구약에 불의한 자들을 언어로 흩어놓으신 하나님 같이,
그리스도 주님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고귀한 사랑인 복음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전해졌고
이제 언어로 서로 교제함에는 성령님의 간섭이 없이는 불가하기에
한 면에서 보자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원문의 성경을 해석하자는 주장은 그럴듯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그 뜻과 의미가 시대마다 변화하였기에
문자적인 해석이 위험함은 전체적인 성경의 이미지를 왜곡하기에
성경을 자의적인 해석이 되어 진리를 굴절하여 보기에
성령님과 교제의 단절의 원인이 됨은,
전체적인 성경을 상고하지 아니하고 문자적이라 극단적인 해석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 도취한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로 교통하고 역사하심은
성경이 증거라
다시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다른 한 면에서 보자면
외국어가 아닌 혓바닥 돌아가는 소리의 방언은
서로 의사전달이 못되는 방언을 은사라 하는 자는
아직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거나 사이비 아니면 이단일 것이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통에는 인간의 언어가 작용하지만
그 언어의 사용과 선택 그리고 교제를 이끄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뿐이시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든 어떠한 계기든 수많은 동기로
복음을 받아드림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믿음이 성장하고도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찡얼거림의 방언은
그 방언은 소통이 없기에 교제할 수도 없는데
그런 자들은 천상의 방언이라 방언의 통역이 필요하다 주장하지만
성령님은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셔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지
의미 없는 소리와 같은 방언을 아직도 주장한다면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장성치 못한 믿음의 근거라
그런 자들은 올바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음은
성령님과 온전한 교통을 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한다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 되시며 더 하여 시기의 하나님이라
질투와 시기라는 단어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인간의 불의에 대하여 무감각하지 말고 예민 하라는
하나님의 의(義)를 강조한 단어라, 의와 연관한 문자라
성령님은 예민하시다는 의미의 표현과 같기에,
시기와 질투의 하나님, 예민하신 성령님 등
이런 어리석은 표현으로 하나님 되심을 예사로이 간과(看過)한다면
그런 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능멸하는 죄를 범하기에
그런 자는 선생이 되지 않았음이,
남 앞에 나서지 않음이 자신을 위해 유익하며
또 그런 자들의 말을 여과 없이 받는 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어리석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런 고질적인 병이된 세대주의에 전염되어 천년의 단위로 성경의 때를 단정하는
오만한 해석이 아니라
이는 주님의 주권이며 또 오래 참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9]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 원하시는
그리스도 주님의 고귀한 사랑이다.
개인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오늘날의 교회와 가장 가까운 교회로 바라보기에
이 글이 길어지지만
다른 여섯 개 교회가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적인 관계를 소홀히 할 수 도 없고
이제 세속화하여 교회라는 이름만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한국과 미주 한인교회가 그렇기에
한 세대도 못되어 사라질 교회가 얼마나 많을까.
세대와 세대의 믿음의 단절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의 단절이라
세상 환경의 변화로 이름 뿐 인 교회가 없어짐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여 1세들 위주의 모임이라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를 쫓아 1세대의 헌금을 중요시하여
실속 없는 허명의 성경공부 등 진리를 알고 진리로 행하는 행위를 가르치지 못했기에
교회가 정의롭지 못했기에
2세들을 등한시 하여 세대와 세대를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으로 연결하지 못하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라 하며 실제로 주님을 닮으려 몸부림치지 않았기에
정직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면서 경건이랴,
무엇이 경건인가.
무조건 ‘영 적’ 이라면 ‘영성’ 이라면 경건이 되나.
이제 돌아서서 회개하지 않는 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불렀지만
주님은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오늘날 교회를 향해 이 행위를 책망하실 것이라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 다시는 판단의 말씀을 듣는 다면
대체 믿음이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인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He that hath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
*라오디게아 교회
어느 학자는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시대의 변천(變遷)에 따른 교회 변화를 주장한다.
에베소 - 초대교회
서머나 - 박해 시대 교회
버가모 - 세속화 시대 교회
두아디라 - 암흑시대 교회
사데 - 종교 개혁 교회
빌라델비아 - 재림 운동 교회
라오디게아 - 종말 교회
이렇게 시대별로 교회를 구분하면 단순하여 역사적으로 설명하기 쉬울지 모르지만
세대주의 자들 같이 결정적인 오류를 범한다.
진리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가.
교회가 시대의 변천(變遷)에 따라 변하는가.
마치 한국교회에 뿌리 깊은 세대주의자들이 성경의 계시를 임의로 재단하여
시대별로 시대에 의미를 두어 진리의 불변성을 억지 해석하듯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변천의 역사성을 띠면
이미 인간의 판단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구원하심의 계시의 과정에
인간의 범주(範疇)로
인간의 사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구원의 시간표로 속박(束縛)하는
경거망동(輕擧妄動)이라
교회의 흥망과 변천(變遷)은, 변질은
세상의 시대사상, 상황, 환경에 예속(隷屬)하여 변절된 교회사의 근본은
인간의 믿음이라는 허식(虛飾)으로
종교적인 시대의 이데올로기(ideology)를 따른 행위로 이루어졌지만
그 믿음과 행위에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시대를 이끄심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교회가 교회라는 허울의 이름만 갖고 있는 상황은
교회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의 진리를 듣던 듣지 않던
시대의 흐름의 주류에 휩싸여 함몰하든 말든
그것은 교회의 책임이라
교회의 변천을 시대로 분류하면
이는 변치 않으신 진리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변덕이 심하여 종잡을 수 없는 변화무상(變化無常)하신 하나님으로 단정하는 짓이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화 없는 진리의 불변성(不變性)을 부인하는 자라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안다는 지식이 말하나
사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거나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 이제라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배워야 한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인간의 시간표로 재단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함은
시간과 장소와 상황, 그것은 인간의 범주라
인간의 범주의 한계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을 제한(制限)하는 불의(不義)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공(不恐)이라
이런 자들이 사이비며 이단이라
이를 테면 심판이나 심판의 때는 하나님의 영역이지
인간이 개입하여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에 충분한 책이면서
성경은 역사책이라기보다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진리의 (義)의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의한 교제며 약속이며
늘 함께 하신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역사성을 부인할 수도 없지만
그 역사성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졌고 질것이라 고백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쓰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려 하시기에
하나님의 공의로 시대를 이끌고 세대와 세대로 물려줄 책임이 있기에
이 책임을 믿음이라 하며
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주님의 복음으로 시대의 소명(召命)을 받았기에
그리스도 주님의 정의로 시대를 이끌 의무가 있기에
복음은 전함만을, 선교만을 의미하지 아니하며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진리를 가진 자라
진리가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행위와 함께 한, 성령님과 동행하는 행위가 믿음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삶이 예배라,
의로운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된 삶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라,
삶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시인하는 행위는
성령님과 함께 한 삶이라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성도라 하는데
어찌 성도가 하나님을 재단하려 하겠는가.
더구나 역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을 판단하려는
어둠의 세력은
언제나 성경을 곡해(曲解)하여 자신의 성경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시간으로 계산하였고
인간의 생각으로 한정된 사고의 체제로 구체화 한 신학이라는 명분으로
하나님을 단정하려는 시도는
늘 있었고 그 때마다 정당성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팔아
그 단정의 판단이 시대마다 달리하였고
그 때마다 이단과 사이비들이 세력화 되어 엉터리 계시를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에 맞선 하나님의 의로 살려는 자들은
시대의 체계적인 사상과 인위적으로 조직된 세력과 싸웠는데,
인간의 능력의 그릇에 하나님을 가두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제(前提)로 삼아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권위와 권력과 조직의 힘으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권력이 되어 재물을 빼앗는 지배의 세력이 되어
찬탈(簒奪)하는 통치의 세력이 되었고 되고 있다.
이런 일은 교회사의 비극이면서 오늘날의 비극이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닮아가는 분별력이 믿음이라
믿음은 노력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선물이라 은혜라 하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통하여 계시한 세상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닮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충분한 만큼의 분량을 제기하기에
이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성경을 넘어선 차원의 길을 제시하시지 않으시고
성경으로 인간에게 충분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공하시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문자적이고 인위적인 해석이 위험함은
하나님의 권세를 제한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간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인간의 시대적인 한정된 사상으로 또는 성경을 시대와 세대를 인간의 자로 재단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시기와 장소와 미래를 인간의 사고로 제약하면
이미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에 구속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이 되어
인위적인 신학의 이론에 머문 왜곡되고 조작된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에
시간과 장소와 또 미래를 단정하면
하나님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오만이라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 중 대표적인 문자적인 해석으로
성경을 잘못 주장하는 베드로후서 3:7-8을 보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베드로후서 3:7-8]
성경은 장과 장을 연결하여 읽고 장에서 구절의 뜻을 해석해야 하는데
단 한 구절로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 전 구절은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신 주님의 이유는
주님은 요한계시록의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고 또 수없이 말씀하셨듯이
주님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주기 위하여 오셨기에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돌아서기를 기다리시며
혹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 받기를 원하심이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매이시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인간과 같이 구속을 받지 아니하시기에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확정하거나 예언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일이라,
크고 넓게 성령님의 인도를 바라보면
성경이 성령님의 개입하심으로 기록되었듯이
성경을 기록한 인간의 언어는 성령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교통의 통로로 만드셨고
그 인간의 언어는,
구약에 불의한 자들을 언어로 흩어놓으신 하나님 같이,
그리스도 주님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고귀한 사랑인 복음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전해졌고
이제 언어로 서로 교제함에는 성령님의 간섭이 없이는 불가하기에
한 면에서 보자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원문의 성경을 해석하자는 주장은 그럴듯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그 뜻과 의미가 시대마다 변화하였기에
문자적인 해석이 위험함은 전체적인 성경의 이미지를 왜곡하기에
성경을 자의적인 해석이 되어 진리를 굴절하여 보기에
성령님과 교제의 단절의 원인이 됨은,
전체적인 성경을 상고하지 아니하고 문자적이라 극단적인 해석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 도취한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로 교통하고 역사하심은
성경이 증거라
다시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다른 한 면에서 보자면
외국어가 아닌 혓바닥 돌아가는 소리의 방언은
서로 의사전달이 못되는 방언을 은사라 하는 자는
아직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거나 사이비 아니면 이단일 것이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통에는 인간의 언어가 작용하지만
그 언어의 사용과 선택 그리고 교제를 이끄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뿐이시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든 어떠한 계기든 수많은 동기로
복음을 받아드림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믿음이 성장하고도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찡얼거림의 방언은
그 방언은 소통이 없기에 교제할 수도 없는데
그런 자들은 천상의 방언이라 방언의 통역이 필요하다 주장하지만
성령님은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셔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지
의미 없는 소리와 같은 방언을 아직도 주장한다면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장성치 못한 믿음의 근거라
그런 자들은 올바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음은
성령님과 온전한 교통을 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한다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 되시며 더 하여 시기의 하나님이라
질투와 시기라는 단어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인간의 불의에 대하여 무감각하지 말고 예민 하라는
하나님의 의(義)를 강조한 단어라, 의와 연관한 문자라
성령님은 예민하시다는 의미의 표현과 같기에,
시기와 질투의 하나님, 예민하신 성령님 등
이런 어리석은 표현으로 하나님 되심을 예사로이 간과(看過)한다면
그런 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능멸하는 죄를 범하기에
그런 자는 선생이 되지 않았음이,
남 앞에 나서지 않음이 자신을 위해 유익하며
또 그런 자들의 말을 여과 없이 받는 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어리석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런 고질적인 병이된 세대주의에 전염되어 천년의 단위로 성경의 때를 단정하는
오만한 해석이 아니라
이는 주님의 주권이며 또 오래 참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9]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 원하시는
그리스도 주님의 고귀한 사랑이다.
개인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오늘날의 교회와 가장 가까운 교회로 바라보기에
이 글이 길어지지만
다른 여섯 개 교회가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적인 관계를 소홀히 할 수 도 없고
이제 세속화하여 교회라는 이름만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한국과 미주 한인교회가 그렇기에
한 세대도 못되어 사라질 교회가 얼마나 많을까.
세대와 세대의 믿음의 단절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의 단절이라
세상 환경의 변화로 이름 뿐 인 교회가 없어짐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여 1세들 위주의 모임이라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를 쫓아 1세대의 헌금을 중요시하여
실속 없는 허명의 성경공부 등 진리를 알고 진리로 행하는 행위를 가르치지 못했기에
교회가 정의롭지 못했기에
2세들을 등한시 하여 세대와 세대를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으로 연결하지 못하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라 하며 실제로 주님을 닮으려 몸부림치지 않았기에
정직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면서 경건이랴,
무엇이 경건인가.
무조건 ‘영 적’ 이라면 ‘영성’ 이라면 경건이 되나.
이제 돌아서서 회개하지 않는 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불렀지만
주님은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오늘날 교회를 향해 이 행위를 책망하실 것이라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 다시는 판단의 말씀을 듣는 다면
대체 믿음이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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