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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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142.♡.♡.150)ㆍ2024-10-22 23: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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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
[욥기 3:1-5]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욥기를 깊이 음미하면서 살펴보는 것도 좋겠지만 42장까지 계속되는 욥기를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주마간산이 되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만 간단간단하게라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일까요? 무병장수, 부귀영화, 평안한 삶이 복 된 삶일까요? 가난과 질병, 반목과 다툼, 전쟁과 재앙으로 뒤덮인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 그런 재앙과 환난을 만나지 않고 평탄하고 순적하며 부유하게 사는 것도 복 된 삶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국인들은 고래(古來)로 ‘복(福)’자와 ‘희(囍)’자를 숟가락, 밥그릇, 베개, 장롱에까지 새겨 넣고 평안하고 풍족한 삶의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평생 평안히 살다 가는 것이 복 된 인생일까요?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생겨나서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 알지 못 하는 채 그저 태어나서 한 평생 잘 먹고 잘 살다 자손을 남기고 가는 것이 복이라면 인생은 동물과 무엇이 다르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복 된 인생이란 물질의 풍요와 건강과 부귀영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복된 인생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만나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인생이 무엇인지,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우주만유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인지 창조된 것인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복된 인생이란 그 진리를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 한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 한다면, 내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 한다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그것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삶이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난다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든 인생이라 할지라도 복 된 삶이라 할 것입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복되고 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욥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사단의 극악한 발톱에 할키우면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빼앗기지 아니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조그만 고통을 이기지 못 하고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을 바꾸어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욥은 가졌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엄청난 고난을 당합니다. 모든 자녀와 재산을 한꺼번에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왜 사랑하신다면서 나를 지켜주시지 않으셨는지,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혹독한 고통과 처참한 환난을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이 과연 전지전능한 능력의 하나님이신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묻거나 따지거나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갈지라. 내가 적신으로 태어났으니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 않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더욱 혹독한 시험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속담입니다만 사단이 말하는 것은 “그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겠네요, 하지만 생명을 생명으로 바꾸어 보십시오. 생명이 죽음 같이 되게 해 보십시오. 사는 게 죽는 게 되게 해 보십시오. 그 살과 뼈를 쳐 보십시오. 그러면 그도 별 수 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할 것입니다.”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손에 욥을 붙이십니다. 사단은 욥의 전신에 악창이 나게 합니다. 악창이 단순히 지독한 종기였을까요? “욥이 재 가운데 앉아 기와조각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긁고 있더니.......”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극심한 가려움 정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살과 뼈’를 쳤다면 견디기 어려운,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할 정도였으면, 욥의 세 친구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참담하고 기막혀 칠일칠야(한 주일 꼬박) 동안 한 마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였으면 욥의 몰골이 얼마나 참혹하고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단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하려고 작심하고 치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가혹한 고문보다 더 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고난을 당한다면 어떨까요? “Why me? 왜 내게?”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 내가 왜 하필이면 그 때 그랬을까? 왜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왜 종들이 일을 하고 소와 양을 치러 갈 때 무장을 한 경비병이라도 붙여 보내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왜 하필이면 그 때 그 집에 모였더란 말인가? 그 때 목조주택이 아닌 석조주택, 아니 철근콘크리트로 집을 지었더라면 이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바보였지, 건축비 얼마 아낀다고 집을 나무로 지어갖고...... 하나님도 그렇지. 내게 무슨 잘못이 있기에, 무슨 죄가 있기에 하나님이 이러신단 말인가?” 하고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헤집으며 후회하며 또 고난을 막아주지 아니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자기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자신의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죽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뼈가 으스러지고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설사 하나님이 나를 뿌리치고 내치신다 해도, 설사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하나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놓으면 소망도 생명도 다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네 입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라, 예수를 저주하라, 그리하면 살려주마.”하는 협박과 회유를 당하면서도 끝끝내 믿음을 지키고 목이 잘리고 사자밥으로 던져졌습니까? 죽어도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욥기 3:1-5]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욥기를 깊이 음미하면서 살펴보는 것도 좋겠지만 42장까지 계속되는 욥기를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주마간산이 되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만 간단간단하게라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일까요? 무병장수, 부귀영화, 평안한 삶이 복 된 삶일까요? 가난과 질병, 반목과 다툼, 전쟁과 재앙으로 뒤덮인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 그런 재앙과 환난을 만나지 않고 평탄하고 순적하며 부유하게 사는 것도 복 된 삶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국인들은 고래(古來)로 ‘복(福)’자와 ‘희(囍)’자를 숟가락, 밥그릇, 베개, 장롱에까지 새겨 넣고 평안하고 풍족한 삶의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평생 평안히 살다 가는 것이 복 된 인생일까요?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생겨나서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 알지 못 하는 채 그저 태어나서 한 평생 잘 먹고 잘 살다 자손을 남기고 가는 것이 복이라면 인생은 동물과 무엇이 다르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복 된 인생이란 물질의 풍요와 건강과 부귀영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복된 인생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만나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인생이 무엇인지,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우주만유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인지 창조된 것인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복된 인생이란 그 진리를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 한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 한다면, 내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 한다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그것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삶이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난다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든 인생이라 할지라도 복 된 삶이라 할 것입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복되고 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욥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사단의 극악한 발톱에 할키우면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빼앗기지 아니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조그만 고통을 이기지 못 하고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을 바꾸어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욥은 가졌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엄청난 고난을 당합니다. 모든 자녀와 재산을 한꺼번에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왜 사랑하신다면서 나를 지켜주시지 않으셨는지,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혹독한 고통과 처참한 환난을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이 과연 전지전능한 능력의 하나님이신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묻거나 따지거나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갈지라. 내가 적신으로 태어났으니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 않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더욱 혹독한 시험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속담입니다만 사단이 말하는 것은 “그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겠네요, 하지만 생명을 생명으로 바꾸어 보십시오. 생명이 죽음 같이 되게 해 보십시오. 사는 게 죽는 게 되게 해 보십시오. 그 살과 뼈를 쳐 보십시오. 그러면 그도 별 수 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할 것입니다.”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손에 욥을 붙이십니다. 사단은 욥의 전신에 악창이 나게 합니다. 악창이 단순히 지독한 종기였을까요? “욥이 재 가운데 앉아 기와조각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긁고 있더니.......”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극심한 가려움 정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살과 뼈’를 쳤다면 견디기 어려운,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할 정도였으면, 욥의 세 친구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참담하고 기막혀 칠일칠야(한 주일 꼬박) 동안 한 마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였으면 욥의 몰골이 얼마나 참혹하고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단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하려고 작심하고 치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가혹한 고문보다 더 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고난을 당한다면 어떨까요? “Why me? 왜 내게?”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 내가 왜 하필이면 그 때 그랬을까? 왜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왜 종들이 일을 하고 소와 양을 치러 갈 때 무장을 한 경비병이라도 붙여 보내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왜 하필이면 그 때 그 집에 모였더란 말인가? 그 때 목조주택이 아닌 석조주택, 아니 철근콘크리트로 집을 지었더라면 이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바보였지, 건축비 얼마 아낀다고 집을 나무로 지어갖고...... 하나님도 그렇지. 내게 무슨 잘못이 있기에, 무슨 죄가 있기에 하나님이 이러신단 말인가?” 하고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헤집으며 후회하며 또 고난을 막아주지 아니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자기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자신의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죽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뼈가 으스러지고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설사 하나님이 나를 뿌리치고 내치신다 해도, 설사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하나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놓으면 소망도 생명도 다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네 입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라, 예수를 저주하라, 그리하면 살려주마.”하는 협박과 회유를 당하면서도 끝끝내 믿음을 지키고 목이 잘리고 사자밥으로 던져졌습니까? 죽어도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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