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0.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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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ㆍ2024-11-0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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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욥기 25:4-6]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날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욥은 왜 악인이 형통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히 징벌하지 않으시는가고 묻습니다. 그리고 욥은 악인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계표(地界標:땅의 구역경계를 표시하는 표지)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그들은 거친 땅의 들 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또한 악인들은 하나님의 광명을 피하고 어두운 길을 걷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욥의 말대로 이 세상은 악인들이 형통하고 그렇지 못 한 자들이 억울함을 당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악한 인간들을 생각하면 당장 패죽이고 싶고 갈아 마시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행은 계속되고 하나님은 눈을 감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심판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 욥은 또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고 말합니다. 욥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凡人)처럼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같이 베임을 입느니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욥은 지금은 악인이 형통하고 심판은 보이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임할 것을 믿으며 끝까지 낙심하지 아니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이 같은 대답에 대하여 수아 사람 빌닷이 다시 나섭니다.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하나님은 권능(통치권)과 위엄(두려움)을 가지신 주권자로서 땅에 평안을 주시며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받지 않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또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빌닷의 말도 옳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고 깨끗지 못합니다. 빌닷이 말한 대로 사람은 죄로 인해 죽고 썩는 존재요 인생은 벌레와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모든 인간이 추악합니다. 이것은 염세주의 사상이 아니라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형통하고 누가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억울함을 당한다 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때, 자신이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억울해 할 수조차 없는 한갓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구원의 출발점에 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벌레, 구더기처럼 죽고 낮아질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벌레, 구더기 같은 인간이 구원, 곧 인간의 존귀함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 곧 참된 지식과 의에 있는 것입니다. 그 벌레, 구더기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길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어엿이 설 수 있는 의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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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5:4-6]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날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욥은 왜 악인이 형통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히 징벌하지 않으시는가고 묻습니다. 그리고 욥은 악인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계표(地界標:땅의 구역경계를 표시하는 표지)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그들은 거친 땅의 들 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또한 악인들은 하나님의 광명을 피하고 어두운 길을 걷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욥의 말대로 이 세상은 악인들이 형통하고 그렇지 못 한 자들이 억울함을 당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악한 인간들을 생각하면 당장 패죽이고 싶고 갈아 마시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행은 계속되고 하나님은 눈을 감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심판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 욥은 또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고 말합니다. 욥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凡人)처럼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같이 베임을 입느니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욥은 지금은 악인이 형통하고 심판은 보이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임할 것을 믿으며 끝까지 낙심하지 아니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이 같은 대답에 대하여 수아 사람 빌닷이 다시 나섭니다.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하나님은 권능(통치권)과 위엄(두려움)을 가지신 주권자로서 땅에 평안을 주시며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받지 않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또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빌닷의 말도 옳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고 깨끗지 못합니다. 빌닷이 말한 대로 사람은 죄로 인해 죽고 썩는 존재요 인생은 벌레와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모든 인간이 추악합니다. 이것은 염세주의 사상이 아니라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형통하고 누가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억울함을 당한다 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때, 자신이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억울해 할 수조차 없는 한갓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구원의 출발점에 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벌레, 구더기처럼 죽고 낮아질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벌레, 구더기 같은 인간이 구원, 곧 인간의 존귀함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 곧 참된 지식과 의에 있는 것입니다. 그 벌레, 구더기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길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어엿이 설 수 있는 의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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