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5. 하나님의 전적주권(全的主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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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ㆍ2024-10-2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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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9: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지난 글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의 내용 기억하시겠지요? 그것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방백을 의지하지 말며 인생을 믿지 말라 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여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 합니다. 아무도 죽음에까지 동행해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의지(依支)이십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에게 죄가 있을 것이라면서 회개를 촉구했지만 욥은 그의 충고가 옳지 못 하다고 반박하면서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주님, 왜 제게 이러시는 것입니까? 이제 나를 찾으실지라도 내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한 분뿐이신 주님, 주께서 나를 버리시면 내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그런데 친구들은 욥을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판단기준에 의하여 “욥에게 죄가 없고서는 이럴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욥이 엘리바스를 반박하자 두 번째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이 나섭니다. “네가 청산유수처럼 말은 잘 하는구나. 그렇지만 말이면 다 말이냐?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부당하게 이러신단 말이냐?” 그리고 이번에는 욥 본인의 죄가 아니면 욥의 자녀들의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는 것일 거라고 주장합니다. “너에게 죄가 없다면 너의 자녀들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이유 없이 이런 징벌을 하실 리가 없다. 그러니 네가 전능자에게 부지런히 빌고 청결하고 정직하면 그가 너를 돌아보고 복 주실 것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라. 네 시작은 미약하겠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옛말 틀린 거 없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는 붙들어주지 아니하신다.” (흔히 크리스천들의 업소에 이 말씀이 걸려 있는데, 사실 빌닷의 말 가운데 앞 뒤를 자르고 좋은 말씀만 쓴 것이지요.)
그러나 욥은 대답합니다. “그건 나도 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누가 하나님과 쟁변하며 누가 하나님과 맞서겠느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주(主)이시다. 하늘을 펴신 전능자, 그 행하시는 일이 기이하여 헤아릴 수 없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이 다 굴복하는 그 분이 하시면 누가 막으며 누가 왜 그러시냐고 감히 물을 수 있느냐? 그러나 나는 죄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이러신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말합니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홀연히 재앙이 내릴 때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재판관의 얼굴이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욥기에는 직설화법과 함께 은유적인 표현이 많이 나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합니다만 욥의 말뜻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全的主權)입니다. 내가 내 자신이 만든 작품이 마음에 안 들어 부숴버린다거나 애꿎은 내 소유의 물건을 밟아버릴 수 있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피조세계가 아무 잘못 없고 애처롭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그 피조세계를, 그 피조물을 사랑하실 수도 있고 내다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이 순전하고 착하면 하나님이 책임지고 돌보아 주어야 하느냐? 하나님께 그럴 의무가 있느냐? 하나님께 그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패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간섭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주만유가 하나님의 지으신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이 장난감을 만들었다가 부숴버린다고 칩시다. 그 장난감이 항의할 수 있습니까? 나는 예쁘니까, 착하니까 잘못이 없으니까 나를 버리면 당신은 나쁜 하나님이다, 하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토기가 토기장이를 욕할 수 있습니까? 나는 착하니까, 순전하니까 하나님이 내게 이러시면 안 되지,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곧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이 당연히 우리를 돌봐주시고 도와주시고 복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악한 세상과 대적 가운데서 고통 하는 우리를 구원해 내시고 보호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다면 당대의 의인인 욥이 이렇게 고통 받도록 사단의 손에 맡기실 수도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됩니까?
또 그렇습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인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 한 점의 흠도 없는 의인은 아닙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전7:20, 롬3:10). 예수님의 대속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의롭고 순전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행하였다 할지라도 욥 역시 아담의 후손이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욥의 죄성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고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행하였을 뿐이지 그 태생은 여전히 죄인의 자손이요 그 본질은 여전히 죄인인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받을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만 우리를, 또 욥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욥인들, 누구인들 버리고 짓이기고 갈아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께 항의하거나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그것을 침해하는 어떤 시도나 행동도 죄이고 말이나 생각조차도 죄입니다. 그것은 내가 심판자가 되어 하나님을 땅으로 끌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하나님께서 홀로 의로우십니다,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즐거운 모양을 하면(9장 27절) 그것도 죄입니다. 속으로는 두렵고 고통스러운데 겉으로 안 그런 체 하면(28절) 이것은 위선이 되는 것이고 헛수고 하는 것입니다(29절). 아니, 위선적인 순종, 위선적인 하나님 경외는 더 가증한 것입니다.(30, 31절)
아, 이래도 죄이고 저래도 죄라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항의해도 안 되고, 순종하는 체 해도 안 되고.....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입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행하시는 것이고 버리시면 버려질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갓 미물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옳고 그름도, 우리의 존재가치조차도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10장에 들어가면 욥은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제게 어찌하여 이러시는 것입니까? 저는 당신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직 당신의 자비와 긍휼만 바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미물 같은 자를, 이 부족하고 죄 많은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할 말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지식의 출발이고 신앙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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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의 내용 기억하시겠지요? 그것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방백을 의지하지 말며 인생을 믿지 말라 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여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 합니다. 아무도 죽음에까지 동행해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의지(依支)이십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에게 죄가 있을 것이라면서 회개를 촉구했지만 욥은 그의 충고가 옳지 못 하다고 반박하면서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주님, 왜 제게 이러시는 것입니까? 이제 나를 찾으실지라도 내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한 분뿐이신 주님, 주께서 나를 버리시면 내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그런데 친구들은 욥을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판단기준에 의하여 “욥에게 죄가 없고서는 이럴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욥이 엘리바스를 반박하자 두 번째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이 나섭니다. “네가 청산유수처럼 말은 잘 하는구나. 그렇지만 말이면 다 말이냐?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부당하게 이러신단 말이냐?” 그리고 이번에는 욥 본인의 죄가 아니면 욥의 자녀들의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는 것일 거라고 주장합니다. “너에게 죄가 없다면 너의 자녀들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이유 없이 이런 징벌을 하실 리가 없다. 그러니 네가 전능자에게 부지런히 빌고 청결하고 정직하면 그가 너를 돌아보고 복 주실 것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라. 네 시작은 미약하겠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옛말 틀린 거 없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는 붙들어주지 아니하신다.” (흔히 크리스천들의 업소에 이 말씀이 걸려 있는데, 사실 빌닷의 말 가운데 앞 뒤를 자르고 좋은 말씀만 쓴 것이지요.)
그러나 욥은 대답합니다. “그건 나도 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누가 하나님과 쟁변하며 누가 하나님과 맞서겠느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주(主)이시다. 하늘을 펴신 전능자, 그 행하시는 일이 기이하여 헤아릴 수 없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이 다 굴복하는 그 분이 하시면 누가 막으며 누가 왜 그러시냐고 감히 물을 수 있느냐? 그러나 나는 죄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이러신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말합니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홀연히 재앙이 내릴 때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재판관의 얼굴이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욥기에는 직설화법과 함께 은유적인 표현이 많이 나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합니다만 욥의 말뜻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全的主權)입니다. 내가 내 자신이 만든 작품이 마음에 안 들어 부숴버린다거나 애꿎은 내 소유의 물건을 밟아버릴 수 있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피조세계가 아무 잘못 없고 애처롭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그 피조세계를, 그 피조물을 사랑하실 수도 있고 내다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이 순전하고 착하면 하나님이 책임지고 돌보아 주어야 하느냐? 하나님께 그럴 의무가 있느냐? 하나님께 그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패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간섭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주만유가 하나님의 지으신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이 장난감을 만들었다가 부숴버린다고 칩시다. 그 장난감이 항의할 수 있습니까? 나는 예쁘니까, 착하니까 잘못이 없으니까 나를 버리면 당신은 나쁜 하나님이다, 하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토기가 토기장이를 욕할 수 있습니까? 나는 착하니까, 순전하니까 하나님이 내게 이러시면 안 되지,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곧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이 당연히 우리를 돌봐주시고 도와주시고 복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악한 세상과 대적 가운데서 고통 하는 우리를 구원해 내시고 보호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다면 당대의 의인인 욥이 이렇게 고통 받도록 사단의 손에 맡기실 수도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됩니까?
또 그렇습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인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 한 점의 흠도 없는 의인은 아닙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전7:20, 롬3:10). 예수님의 대속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의롭고 순전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행하였다 할지라도 욥 역시 아담의 후손이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욥의 죄성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고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행하였을 뿐이지 그 태생은 여전히 죄인의 자손이요 그 본질은 여전히 죄인인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받을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만 우리를, 또 욥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욥인들, 누구인들 버리고 짓이기고 갈아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께 항의하거나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그것을 침해하는 어떤 시도나 행동도 죄이고 말이나 생각조차도 죄입니다. 그것은 내가 심판자가 되어 하나님을 땅으로 끌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하나님께서 홀로 의로우십니다,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즐거운 모양을 하면(9장 27절) 그것도 죄입니다. 속으로는 두렵고 고통스러운데 겉으로 안 그런 체 하면(28절) 이것은 위선이 되는 것이고 헛수고 하는 것입니다(29절). 아니, 위선적인 순종, 위선적인 하나님 경외는 더 가증한 것입니다.(30, 31절)
아, 이래도 죄이고 저래도 죄라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항의해도 안 되고, 순종하는 체 해도 안 되고.....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입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행하시는 것이고 버리시면 버려질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갓 미물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옳고 그름도, 우리의 존재가치조차도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10장에 들어가면 욥은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제게 어찌하여 이러시는 것입니까? 저는 당신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직 당신의 자비와 긍휼만 바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미물 같은 자를, 이 부족하고 죄 많은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할 말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지식의 출발이고 신앙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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