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석 목사 “개혁신앙으로서의 성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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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3ㆍ2025-03-15 12:0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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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뉴욕노회 제96회 정기노회가 3월 11일 열렸다. 개회예배 성찬예식에서 전노회장 이윤석 목사(부르클린제일교회)는 고린도전서 11:24-26 말씀을 본문으로 “개혁신앙으로서의 성찬”이라는 주제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했다. 여기에서는 노회원 목사와 장로를 대상으로 메시지를 전했지만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가능한 내용들이다.
1. 성찬의 중요성
조직신학 벌코프 책의 교회론은 115 페이지 중에 47 페이지가 성례에 대한 비중 1/3 이상이 되고 있다. 그만큼 교회론에서 중요한 부분과 핵심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4권중 가장 두꺼운 것이 제 4권이며 그 안에 교회론의 분량이 20장인데, 그 중에 14장부터 19장까지 성례에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론의 약 1/3이 성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성찬의 의미나 중요성만 해도 18장이 50항으로 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것 역시 우리 개혁신앙의 선조인 칼빈이 교회에서 무엇에 집중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 개혁교회 임직자들의 이중성
칼빈주의 교회의 개혁 신앙의 3가지 일치 형식(Three forms of Unity)은 벨직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돌트신경(Canons of Dort), 하이델베르그 문답(Heidelberg Catechism)이라고 한다. 이것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수용하여, 성경의 총괄이라고 믿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이다.
장로라면, 목사, 장로, 집사가 안수받을 때나 권사가 취임할 때나 한결같이 오른손을 들고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은 신.구약 성경이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믿음으로 순종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예’라고 서약한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교회와 지도자들과 임직자들이 이것을 따라 그들을 교육시키며 이를 사모하고 알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가? 임직했을 때의 결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지 않았는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말씀과 성례를 말하지만, 말씀과 성찬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교회 주요 리더들의 모습이다.
3.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강조하는 성찬
성찬은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성찬의 말씀이야말로 갑절로 은혜 받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하는 분들이 듣는 말을 이제는 눈으로 보고 실제로 먹는 말씀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간이야말로 귀로 듣는 말씀이 눈과 우리 입을 통해 영혼으로 새겨지는 가장 복된 은혜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찬이라는 선물을 주신 것이다. 이 시간에 우리 개혁주의 성찬의 전통, 특히 영적으로 이 자리에 임재해 계신 그리스도의 영과 더불어(영적 임재설) 성찬에 임하자!
하이델베르그 문답 해설에 의하면 목사들은 두 가지 사명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것은 입의 섬김과 손의 섬김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감당해야 하지만, 손으로는 성찬의 사명을 동일하게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은혜의 수단은 말씀의 신실한 선포와 또한 그에 의지한 성례를 통해, 또한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반드시 표지가 있어야 한다. 그 표지는 말씀의 신실한 선포, 성례의 신실한 시행이 있어야 교회다운 교회이다. 권징의 시행은 나중에 포함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말씀과 성례이다. 개혁교회에서 이토록 성례가 중요하다면 우리가 지금 시행하는 성찬에 대한 깊은 재고가 필요하다.
4. 칼빈이 강조하는 성찬을 통한 확신과 기쁨과 은혜
첫째, 기쁨이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연합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며, 그분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성찬은 우울한 분위기이거나 장례식과 같은 분위기로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 신부가 신랑이 다시 오기까지를 준비하며 그 기쁨으로 살아내는 것처럼 성찬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둘째, 확신이다. 그 성찬의 결과 우리가 얻게 되는 세 가지 확신이 있다. 그것은 첫째 예수께서 가지신 영생이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이요, 둘째는 예수께서 이미 들어가신 하나님 나라에 우리도 들어간다는 것이요, 셋째는 우리 죄를 지심으로 우리가 죄사면을 받고 정죄받지 않는다는데 있다.
셋째, 점검이다. 그러나 이런 확신을 가진 자는 본문 28절에서 말하듯이‘자기를 살피는’ 자이다. 성찬에 임하여서도 자기를 살피지 않고 묵상하지도 않고 그 은혜의 깊이에 대해 깊은 생각도 없이 참여하는 자는 무감각한 자요, 그분의 은혜를 소홀히 생각하는 자이다. 우리 중에는 결코 이런 성도가 있어서는 안된다.
넷째, 주님이 주시는 성찬은 우리에게 놀라운 교환이 이루어졌음을 확신하는 시간이다. 어떤 교환인가? 첫째,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둘째, 예수께서 지상에 내려오시므로 우리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확실히 마련하셨다. 셋째, 우리의 죽을 운명을 취해가시고, 멸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다. 넷째, 우리 연약함은 수용하시고,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하셨다. 다섯째, 우리 연약함과 가난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영적으로 부요하게 하셨다. 여섯째, 우리 죄악을 담당하고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입혀 주셨다.
그러므로 성찬으로 얻은 이 세 가지 확신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온전히 전가된 의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그분은 우리를 결코 버리거나 떠나시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로 공로로 인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온전히 용서하셨다. 그러므로 성찬의 의미는 놀라운 구속의 사역을 요약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찬에서 일어남을 알고 의미가 실제와 유익이 되기를 사모하자.
5. 이윤석 목사가 강조하는 5가지 성찬의 의의
이런 성경을 총괄하는 개혁신앙의 스승 칼빈과 세 가지 일치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에서 말하고자 하는 성찬의 의의를 다섯 가지로 말하고자 한다.
첫째, 성찬은 감사의 의의를 가진다.
성찬을 Eucharist라고 말한다. 곧 감사의 예식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실 때, 잔을 들어 사례(thanksgiving) 하셨다. 예수께서는 늘 잔을 가지사(taking), 축복하시고(blessing), 떼어(breaking), 그들에게 주셨다(giving). 이것은 성찬의 공식(formula)와 같은 신약 성경의 모습이다. 축복은 감사를 포함한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하자!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고, 예수께서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있으며, 예수께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전한 생명이 있게 되었다. 십자가에 고통과 고난 속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는 ‘늘 울어도 못 갚을 줄 알아’감사하자! 구원의 감격과 감사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사자가 될 때, 성찬의 의의를 성취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모일 때마다 뜨거운 감사가 하나님과 서로에 대해 넘치게 하자!
둘째, 성찬은 거룩한 교제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된 우리들은 성찬을 통하여 서로 영적으로 깊은 사귐과 교통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가운데, 우리는 한 가족임을 확인한다. 사실 결코 가까울 수 없고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하나가 되어, 서로 서로 주님 안에서 연결된 하나의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신기한 기적과 같은 이야기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제정해주신 성찬이 오늘도 우리에게 하고 있는 일이다.
저는 과거 펜실베니아에서 10여년을 개척 목회를 하며, 성찬식을 할 때면 큰 떡 덩어리를 두고 큰 잔을 준비하여 애찬과 함께 성찬을 시행했었다. 둥글게 앉아서 애찬을 나누며 성찬의 의미와 함께 기도하며 교제하는 시간을 나누었다. 사도행전 2장의 모습을 적용해보고자, 또한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 애쓸 때 참여한 성도들의 마음에 은혜가 넘쳤던 모습이 아직도 그립다.
대부분 초대교회는 애찬을 나누는 중에 성찬을 한 것으로 안다. 애찬식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의 만찬(예배, 성찬식) 후에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 가졌던 공동식사였지만, 이런 것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A.D 220년 카르타고 공의회(The councils of Carthage)에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현대교회에서는 이런 애찬식이 다시 필요하다. 큰 한 빵을 쪼개어 그 조각 하나하나를 나누어 먹으며 모두 모여 한 떡을 이루는 것은 본문 고린도전서 10장 17절 말씀처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떡에 참여함이라”라고 하신 말씀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고 성격과 배경도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확인하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거룩한 교제를 낳는 성찬이 되자. 우리는 지도자로서 이것을 확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자!
셋째, 성찬은 증인이 되는 것이다
본문 26절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한다. 로마 가톨릭은 성찬을 미사(Missa)라 부르는데 이는 라틴어 Missio에서 왔지만 그들은 미사의 의미를 왜곡시켰다. 이 단어는 선교를 위해 우리를 파송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피 흘려 죽으심에 대해 그 복음의 내용에 감격을 가지고 열정을 다하여 증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고 선포하며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다시 오심에 대한 주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자. 주께서 우리에게 성찬이란 특권을 주시는 것은 이런 사명을 주시면서 행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때나 성찬식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증인됨을 확실히 확인하고 드러내자.
넷째, 성찬은 언약이다.
주님은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 하셨다. 우리는 은혜언약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예레미야는 새 언약의 말씀을 받았다.“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렘 31:33-34)” 이 언약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에 이 성찬을 새겨주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라고 하셨다. 지도자들은 성찬의 설교가 마음 깊은 속으로부터 솟아나와야 한다.
성례를 새크라멘트(Sacrament)라고 표현한다. 세크라멘트는 로마 군인들이 황제의 군사가 될 때 충성을 서약하는 순서를 말하는 ‘서약’ 혹은 ‘보증’을 말한다. 먼저 우리 주님은 떡과 잔이라는 외적이고 물질적인 상징을 통해, 그의 자녀들에게 내적이고 영적인 복을 주셨다! 그래서 자녀들인 우리들은 우리의 사랑과 순종과 헌신을 하나님께 서약하는 것이다. 주의 몸된 교회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명을 감당하기로 서약하며 헌신하는 것이다. 이 성찬을 통하여 이것을 다시 확인하자!
다섯째, 성찬은 나눔이다.
고린도전서의 10장과 11장은 성찬을 위한 성경이다.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 간음, 우상숭배, 세상법정에 고소, 분열, 은사 남용 등 성경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성찬을 하면서도 분열되었고, 성찬을 하면서 범죄하였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질문을 통해 그들을 책망하면서 다시 성찬의 의의를 새겨준다. 고린도 교회는 70%의 노예들과 귀족들이 나뉘어져 있다. 그래서 안채와 바깥채에서 먹는 사람들 중에 안채에 있는 사람들이 일찍 먹고 많이 먹고 하면서 서로를 배려하지 않았다.
성찬은 예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그런 나눠주심에 우리가 참여함으로, 우리는 형제자매와 한 몸이 되어 참여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형제자매와 더불어 나눔의 삶을 결단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에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첨예함이라” 바울 사도는 지금 “어떻게 너희가 그럴 수 있느냐?‘ 어떻게 성찬을 대하면서 그렇게 배려하지 못하느냐? 라고 책망의 질문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를 배려하시되, 하나님이신 분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자기 살을 주실 정도로 한없이 배려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배려하는가? 작은 것에 대한 배려가 있는가? 고린도교회는 그것을 못해서 교회에 분란을 만들고 분열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성찬식하며 시험들고 분열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성찬을 다시 설명한다. 심지어 11장 20절에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라고 개탄하면서도 답을 주고 있다.
왜 그런가? 21절에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그래서 다시 강조해서 말씀하고 적용해보자. 성찬식 마치고도 다투고, 성찬식 하고도 노회가 마음이 상하거나 갈리지 않도록 노회원들이 서로 배려하자!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가? 10장 23-24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라고 한다. 노회가 성노회가 된다는 것은 성찬의 의미가 살아 있어야만 성노회가 되는 것이다. 서로의 유익으로 덕을 세우고 먹든 마시든 무슨 말을 하든 깊은 배려와 사랑의 심장으로 성찬의 의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자!
6. 마치는 글
이제 우리는 이 주님의 생명을 주시는 식탁에 참여해 그 의미를 가장 깊은 마음에 담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예수 생명이 우리 심령과 생활에 가득 차 넘치는 성 노회가 되며, 노회 후에도 성찬의 모든 영향이 우리를 통해 확산되고 각 교회마다 넘쳐나는 열매를 맺는 복된 사역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영적으로 이 자리에 임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은혜를 누리며 사모하며 느끼며 보고 듣고 마시는 최상의 복된 시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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