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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태 목사의 삼일절 “히브리서 인물처럼 16인의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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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3ㆍ2025-03-03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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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우리교회 조원태 목사는 3월 2일 주일, 삼일절을 맞이하여 한복을 입고 설교를 했다. 뉴욕우리교회는 그동안 삼일절을 맞아 기념예배는 물론 다음세대들과 함께 애국지사 묘소와 위안부 기림비 등을 방문했다.a56c6507a0bb5524ad60fbbbf683f492_1740985888_9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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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태 목사는 히브리서 11:32~40 말씀을 본문으로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전했다. 조 목사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16인의 인물들을 열거한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도 이와 비견될 만한, 신앙과 애국을 하나로 여긴 믿음의 선열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 속에서 독립을 향한 횃불을 들었던 잊혀진 영웅들”이라며 16명의 영웅들을 소개했다.

 

조원태 목사는 3개 그룹으로 나누어 손정도 유관순 길선주 주기철 장준하 이기풍 이승훈 조만식 김교신 김약연 안중근 김구 김마리아 안창호 전덕기 한석진 등 16인의 영웅들을 소개했다.

 

1. 신앙과 애국이 하나였던 믿음의 사람들

 

손정도 목사: 손정도 목사는 자신을 '걸레'라 칭하며,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하는 걸레처럼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충청남도 서산 출신으로,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정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정동교회는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과 애국 청년들이 모이는 중심지였으며, 손정도 목사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구, 안창호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을 통과시키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걸레 정신'은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순국한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화학당 재학 중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 신앙과 애국심을 키웠으며, 고향인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조국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순국한 그녀의 용기와 희생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민족의 누나'로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길선주 목사: 길선주 목사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주도하며 한국 교회 부흥의 초석을 놓은 한국 기독교 초기 지도자 중 한 명이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으로, 젊은 시절 도교와 불교에 심취했으나, 1897년 기독교로 개종한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자신의 과거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며 한국 교회 대부흥의 불길을 지폈다. 3.1 운동 직전에는 평양숭실학교에서 학생들과 비밀 기도회를 이끌며 독립운동과 신앙이 하나임을 강조했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는 믿음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었으며, 한국 교회의 영적 각성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삶을 살았다.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순교한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순교자이다. 경상남도 창원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마산 문창교회, 부산 초량교회,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목회하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설교는 내가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이 할 일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신사참배 강요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네 차례나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결국 1944년 49세의 나이로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했다. 그의 순교는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신앙의 자유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숭고한 희생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장준하 선생: 장준하 선생은 일제강점기 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 중국 중경까지 6천 리 대장정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 광복군 장교로 항일 무장 투쟁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 신앙 속에서 성장했다.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으나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 정진군 국내반 특파 공작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해방 후에는 '사상계'를 창간하여 자유 언론 운동을 주도하고, 유신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저서 '돌베개'는 그의 독립운동 여정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는 젊은 시절 평양에서 깡패 두목으로 악명을 떨쳤으나,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선교사에게 돌을 던진 사건을 계기로 회심하여 한국 최초의 목사 중 한 명이 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 명이며, 제주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되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썼다. 제주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김구 선생과의 연락원 역할을 수행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는 등 비밀스러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는 등 신앙과 애국심을 겸비한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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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우리교회 2020년 삼일절 기념예배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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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앙 교육으로 민족의 인재를 양성한 믿음의 사람들

 

이승훈 장로: 이승훈 장로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기업가이다. 젊은 시절 보부상으로 시작하여 큰 재산을 모았으나, 1907년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민족의 장래를 위해 교육 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전 재산을 털어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주기철, 함석헌, 한경직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면서도 성경 읽기와 기도로 신앙을 지켰으며,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삶을 통해 "믿음으로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라는 히브리서 11장 33절 말씀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조만식 장로: 조만식 장로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이다. '조선의 간디'라고 불릴 정도로 민족의 독립과 자립을 위해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이승훈의 초청으로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 인재 양성에 힘썼다. 오산학교 재직 시절, 학생들이 사용하는 변소가 얼어붙자 새벽에 직접 쇠망치로 깨서 청소하는 등 솔선수범하는 교육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3.1 운동 당시 평양 지역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조선물산장려회 회장을 맡아 국산품 애용 운동을 전개하고, 평양 YMCA 총무, 조선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의 자립과 계몽을 위해 헌신하였다.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었고, 한국전쟁 중 평양에서 순교하였다.

 

김교신 선생: 김교신 선생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교육자이자 종교인,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유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귀국 후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성경과 민족정신을 가르쳤다. 1927년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한국적 기독교 신앙을 제시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와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를 주창하며,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 뿌리내린 기독교 신앙을 강조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광복을 몇 개월 앞두고 옥사하였다. 그의 삶은 신앙과 민족 사랑,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모범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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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믿음의 사람들

 

김약연 목사: 김약연 목사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1899년 가족과 함께 북간도로 이주하여 한인촌을 개척하고, 1901년 명동촌을 건설하여 한인들의 정착과 교육에 힘썼다. 명동촌에 명동서숙(후에 명동학교로 발전)과 명동교회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과 기독교 신앙 전파에 힘썼으며, 윤동주, 문익환, 나운규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전 총 연습을 했던 곳이 그의 집이었고, 명동 교회는 독립운동가들의 피난처이자 활동 거점 역할을 하였다.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한인 사회에서 존경받았으며,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황해도 일대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활동하며 복음 전파와 민족 계몽 운동에 힘썼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며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뤼순 감옥에서 "조롱과 채찍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라는 히브리서 11장 36절 말씀을 몸소 실천한 그는, 1910년 3월 26일 순국하기 직전까지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신앙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김구 선생: 김구 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역임한 정치 지도자이다. '백범일지'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젊은 시절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민족 계몽 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4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등 항일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다. 해방 후에는 남북 협상을 추진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1949년 안두희의 총격으로 서거하였다. "경찰서 열 곳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한 곳을 세우는 것이 민족의 희망이다"라는 그의 말은 신앙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마리아 선생: 김마리아 선생은 황해도 장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여성 운동가이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여자학원에 유학 중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반입하여 3.1 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귀국 후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일제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교와 뉴욕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재미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는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라는 히브리서 11장 35절 말씀을 실천한 믿음의 증인으로 평가받는다.

 

안창호 선생: 안창호 선생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사상가이다. '도산'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민족 계몽 운동을 시작하였고, 1907년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흥사단을 조직하여 재미 한인 사회의 단결과 민족 교육에 힘썼다. 멕시코, 쿠바 등지의 한인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독립 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해외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라는 히브리서 11장 33절 말씀처럼, 그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전덕기 목사: 전덕기 목사는 서울 출신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7세 때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턴을 만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상동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며 민족 계몽 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4년 상동교회 안에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교육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 운동을 주도하였고, 1907년 안창호, 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창립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는 일제에 맞서는 첫 번째 비밀결사 조직으로, 독일의 본회퍼 목사가 나치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비밀 결사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조직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도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1914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석진 목사: 한석진 목사는 평안북도 용천 출신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한국 초기 기독교 지도자로,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이자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 명이다. 평양 장대현 교회를 담임하며 안창호, 이승훈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했고, 그의 설교는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했다.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 평양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장대현 교회 부임 후 목회와 민족 교육에 힘썼으며, 그의 설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개종과 남강 이승훈 장로의 오산학교 설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 동경에서 한인교회를 설립, 독립운동 거점으로 삼는 등 해외 민족 운동도 지원했다. 히브리서 11장 33절처럼, 독립운동가들을 키워낸 한국 기독교의 뿌리 같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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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원태 목사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16명의 신앙인들은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조들과 못지 않는 삶을 살았다.한 세대를 25년~30년라고 한다면, 한국 기독교 역사는 세계 기독교 역사의 67~80세대에 비해 고작 5~6세대에 불과하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믿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신앙을 통해 예수를 바라보며 예수를 따르다가 신앙과 애국이 하나라고 하는 삶을 보여준 인물들입니다 

 

이들의 첫 번째 특징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믿었다는 점이다. 1938년 신사참배에 95%의 한국 교회가 참여했지만 단 5%만이 반대했고, 반대 설교를 한 목사는 1%도 되지 않았다. 이는 히틀러를 지지했던 독일 교회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보이지 않는 조국의 독립을 신앙으로 살았던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두 번째 특징은 서로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히브리서의 인물들이 혈육으로 연결된 반면, 한국의 16명은 사역으로 연결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손정도 목사의 제자였고, 조만식 장로는 이승훈 장로가 세운 오산학교 교사였으며, 이승훈 장로와 안창호는 한석진 목사가 양성했다. 믿음의 사람들은 홀로 영웅이 되지 않고 함께 네트워크를 이루었다.

 

세 번째 특징은 신앙과 세상이 하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세상 한복판에서 살았던 신앙으로 결국 세상을 이겼다. 3.1운동 당시 조선 인구의 1.3%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의 진리의 빛을 비추었고, 그로 인해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이들 16인과 이름 없는 의병들까지, 이들은 나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타자와 나라, 세상을 향해 나아간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의 믿음의 선열들은 신앙과 애국을 분리하지 않고,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교훈을 준다. 이들의 삶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증거이며, 우리는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참된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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