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갈등, 과연 해결이 가능할까? > 뉴스

본문 바로가기


페이스 상패 제이미 제이미혜택


뉴스

교회 갈등, 과연 해결이 가능할까?

페이지 정보

정보ㆍ2021-11-11 04:44

본문

92acb85c5ec2796ab834ab7bed4ecb00_1636623814_93.jpg
Photo by Sreehari Devadas on Unsplash 

 

이십 대의 기독교 여성으로 이루어진 어느 작은 그룹의 예는 지금 내가 냉소주의와 관련해서 느끼는 많은 유혹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미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어마어마한 양의 정치적이고, 이념적이며, 문화적인 신랄한 비판, 리더십의 실패, 교회의 분열, 민족적 긴장, 그리고 관계의 붕괴를 보면서 크게 낙담했다. 그게 다 그냥 미디어 알고리즘과 무책임한 기독교인의 클릭 유도로 생긴 거라고, 그렇기에 다 과장된 거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그런 분열의 현장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사람이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서 기독교적 분열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내가 사랑하는 세 교회는 모두 지난 몇 년 동안 하나같이 파괴적인 내부 갈등을 겪었다. 신학적으로는 아무런 이견이 없을 뿐 더러 여러 해 동안 함께 예배해 온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서로에 대해 인내하지 않는다. 수년에 걸쳐 만들어진 관계가 순식간에 깨진다.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는 결코 예전처럼 관계를 회복할 수 없게 만드는, 불신의 흉터 자국을 남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엄청 많은 일이 벌어지는 건 분명하다. 아주 복잡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문제 꺼리에다 리더십과 영적 전쟁과 관련한 각종 이슈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분열이라는 전염병에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결코 이런 현상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실제 발생하는 현실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분석과 토론을 하는 중에 아이러니하게도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거나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저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기독교의 하나됨(harmony)을 키우거나 또는 반대로 파괴적인 기독교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큰 인과 요인은, 신약 성경이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언급하는, 바로 사랑이다. 

 

극단적일 정도로 단순한, 주님의 해결책

 

사랑이라는, 내 말을 웃어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복잡한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있을 때 항상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다 해결됩니다!” 그리고 그런 외침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종류의 진술은 너무 순진하고 단순한 이상주의로 들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문제를 서로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을 때, 간단한 해결책이 없을 때, 그래서 깊어진 갈등과 긴장 가운데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서로를 참고 견디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느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고, 그게 어떤 모습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약의 사랑은 결코 환원주의처럼 단순하지 않다. 물론 근본적이라는 면에서는 단순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내 몸 같은 이웃

 

비틀즈의 노래 제목인 “All you need is love”는 순진하고 단순한 이상주의이다. 누구나 다 사랑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진술은 개념적으로 공허하고 또 일관성도 없다.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천할 때 어떤 모습인지, 비용이 얼마인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 결과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둘러싼 갈등 해소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문장이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틀즈의 이 가사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라는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과 한번 비교해보라. 차이가 보이는가? 예수님의 명령은 근본적으로 단순하지만, 사실 전혀 단순하지 않다. 이 명령을 접한 모든 사람이 기본 원칙을 즉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단순하다. 사랑은 우리의 가장 핵심 가치여야 하며, 다른 사람과 관련하여 우리의 모든 동기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우리가 갖는 모든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방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기서 파생하는 적용은 끝이 없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기능적으로 강력하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도 사랑의 모습과 그 대가에 대해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관계와 상황 그리고 문제의 복잡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진지하게 추구할 수만 있다면, 지금 미국 복음주의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아예 들불로 번지게 만드는 죄의 불꽃을 끄는 데에 효과적일 수 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그리고 신약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례와 설명)이 가진 능력은 지난 이 천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에 의해 실현되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자, 내가 처음에 언급한 이십 대 여성의 작은 그룹 이야기로 돌아가자. 내게 그들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사랑을 거리로 들고나가기

 

나는 이 젊은 여성들 대부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통해서 그들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거리 어린이가 겪고 있는 곤경에 대해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몇 년 전, 약간의 경험을 쌓고 검소하게 생활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재정적 지원만 받은 그들은 남미의 도시로 이사하여 거리에서 만나는 어린이와 청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학대, 유기, 심각한 빈곤, 중독 또는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부양해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움막과 다리 아래에서 그리고 건물 출입구에서 잠을 자는 그들은 음식을 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아이들이었다. 거리는 그렇게 취약한 아이들에게 잔인하고 무자비한 곳이다. 그들 중 많은 이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부드러운 마음은 굳어지고 불신감으로 차게 된다. 위험과 절망은 타락을 더 악화시킨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그런 아이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물론 그 사랑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가 이 점을 강조하길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의사에게 데려가고, 화학 물질 중독을 앓는 많은 이들을 치료 센터로 데리고 왔다. 또한 출산과 그 너머의 두려운 여정을 앞에 둔 임신한 어린 소녀들과 함께 길을 걸었다. 공원에서 아이들과 우노를 연주하고 케이크와 파티로 생일을 축하했다. 이런 경험은 아이들 중 상당수가 접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경우에, 예수님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좋은 교회를 연결시켜 주었다. 그 결과,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기에’

 

끈질기고, 확고하며, 또한 신실하고, 희생적인 예수님의 사랑으로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거리의 아이들을 사랑한 여성들은 이제 그들의 신뢰를 얻었고, 이제 이 수백 명의 거리 아이들이 이들에게 사랑을 되돌려주고 있다.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 여성들을 돌보고 있다. 그리고 물론 거리에서 이런 소문이 빠르게 퍼지면서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이 여성들을 찾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박한 사역 센터를 제공하셨다. 

 

정부 관리들 또한 그들의 사역을 그토록 효과적으로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들을 찾고 있다. 정부 센터에도 다양한 자원과 프로그램이 있는데, 왜 거리 아이들이 굳이 이 여성들에게 가는지 정부 관리들은 알고 싶어한다. 아이들의 대답은 이것이다. “이 아줌마들은 우리를 사랑하거든요.”

 

이 여성들은 결코 인정받는 전문가가 아니며 오랜 경험이나 풍부한 자원 또는 박사 과정 프로그램을 이수하지도 않았다. 공식적인 신학 훈련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아이들을 더 희망적이고 생산적인 미래로 전환하는 데 매우 효과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왕국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변화된 삶에서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많은 제자를 삼고 있다. 게다가 매우 소홀하게 취급받고 역사적으로도 접근하기 어려운 그룹에서 말이다. 왜냐고?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이유를 알려줄 것이다. “아줌마들은 우리를 사랑한다니까요.”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들에게는 소중한 영혼이다. 

 

사랑의 희생을 살아내기 

 

그렇다면 지금 이 여성들은 오늘날 미국에서 유행하는 기독교 분열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답은 이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적 사랑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한 예이다. 그러나 그들을 지금 우리가 겪는 상황과 비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게 아닌가? 상황적으로는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여성들의 이야기에 대한 나의 보고서는 간결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더 이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물론 현실은 어렵다. 때로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살아야 하고, 말 그대로 피땀 흘리며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저분하다. 등을 돌리거나 사라지는 아이들이 왜 없겠는가? 아이들은 여전히 중독에 빠지고 강간당한다. 그리고 죽는 아이들도 생긴다. 게다가 이 여성들도 실수를 저지른다. 그래서 오해를 받고 때로는 욕을 먹으며 종종 신체적인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또 외로움과 혼란 그리고 슬픔과 향수병에 시달린다. 행여 지금 제대로 사역하는 게 아니라는 불확실성에 고통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런 모든 상황에 관계없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진지하고 의도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힘들 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우리도 이 여성들과 똑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 제사”(롬 12:1)가 된다는 의미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에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혁적(transformational)이다. 분열과 갈등이 차고 넘치는, 이 복잡한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은 과연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우리가 진지하게 순종하고 있는지 여부이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원한과 분열 그리고 관계의 붕괴는 로마서 12-15장, 고린도전서 13장, 에베소서 4장 또는 요한일서 3장처럼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서 거리에서 만나는 부상당한 이웃에 대한 문맥상 동등함에도 우리가 지금 의미 있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에 따르는 댓가는 결코 적지 않다. 사랑의 결핍은 관계의 파국을 만들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까지 왜곡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그리고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이웃 사랑”의 기준을 세우셨다. 

 

때때로 쓰레기가 날아가고 불화의 소리가 요란할 때, 어려운 상황에서조차 예수님처럼 단순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들을 통해 나 자신에 관한 새로운 관점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냉소주의에 대한 축복받은 해독제가 될 수 있다. 그 해독제가 지금 내게는 바로 이 놀라운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고통받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 나는 그들로부터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원제: Can Anything Mend Our Conflict?: How Cynicism Dies in a Divided Church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작가: 존 블룸은 Desiring God의 공동 설립자로 이사장과 작가로 섬기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믿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와 'Not by Sight' 가 있다.

 

---------------------------------------------------------------------------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2018년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 TGC코리아(https://tgckorea.org)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쓰기 위해서는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뉴스 목록

Total 967건 1 페이지
뉴스 목록
기사제목 기사작성일
KWMF 서밋 컨퍼런스 "With 코로나 시대 목회와 선교적 위기 극복" 댓글(2) 2022-04-24
송민호 목사 “선교적교회로 가는 길” 목회자 세미나 2022-04-03
이용걸 목사 "목회자의 영성과 성령충만" 2022-03-25
이윤석 목사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성경적인 믿음 실행 아냐” 2022-03-22
정성욱 교수 “밝고 행복한 종말론” 세미나 2022-03-19
김성찬 감리사 "성령, 치유, 축사" 강의 with 목사들의 현장 간증 2022-02-28
이성철 목사 “성령과 치유 사역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3가지” 2022-02-24
카리스마 리바이벌 “광야 같은 목회현실 속에서 은사로 목회하라” 2022-02-22
바울목회연구원 첫 세미나 “후기 기독교 사회 속의 목회방향” 2021-12-01
그리스도인들이 메타버스 시대를 준비하는 법 댓글(1) 2021-11-30
교회 갈등, 과연 해결이 가능할까? 2021-11-11
김남수 목사, 킴넷 포럼에서 “지난 12년동안 4/14 운동을 돌아보다” 2021-11-04
조진모 목사 “복음 전달자가 하기 쉬운 오류는 무엇인가?” 2021-10-21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뉴욕일원 5개 노회 연합 성경세미나 2021-10-12
뉴욕센트럴교회, 김남철 목사 성경 고고학 특강 “에덴을 발견하다” 댓글(1) 2021-10-09
KAPC 목회와 신학 포럼, 박영선 목사 "자유와 책임, 순종과 성화" 2021-10-07
제5차 KAPC 목회와 신학 포럼 - 박영선 목사의 열정 강의 2021-10-05
은사주의자와 칼빈주의자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 2021-09-24
황상하 목사 “목사는 영적 역량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2021-09-22
정성욱 교수 “만인 선교사론과 만인 신학자론” 주장의 이유 2021-09-18
류응렬 목사 "루터와 칼빈에게 배우는 설교" 2021-09-10
류응렬 목사 “청중을 깨우는 10가지 설교 전달법” 2021-09-09
코비드19가 일깨워준 가정과 소그룹의 중요성 2021-08-22
성 윤리를 무력화시키는 다섯 가지 기초 2021-08-13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바울 사도 닮아가기 2021-08-03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연락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