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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인종 차별은 구원의 원칙을 훼손하는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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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20-07-1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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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으로 말하면, 죄는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모자란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죄는 하나님의 율법과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다(요1 3:4; 롬 3:23). 그렇다. 인종 차별은 죄다.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기에 죄라는 사실을 최소한 네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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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ax Bender on Unsplash 

 

1.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에(창 1:26-28), 인종 차별은 누구나 다 평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가진다는 신성한 진리를, 생각과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거스르는 죄다. 진리가 훼손되는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가 야고보서 3장 9절에 나온다. 그것은 사람을 향해 욕을 하는 것, 그러니까 누군가를 존경심 없이 마구 지칭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살인하지 말라”(마 5:21)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누군가를 향해 혐오감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라가” 또는 “바보”라고 부를 때, 당신은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사실상 어기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마 5:22) 위험에 처하게 된다. 지금 기준에 비추어서 볼 때 이건 좀 심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살인하지 말라는 이 여섯 번째 계명 뒤에 숨은 진짜 의미는 사실상 야고보서 3장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기본 교리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집단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것, 즉 당연히 받아야 하는 존경과 사랑 그리고 보호로부터 그들을 소외시키는 것은 분명한 죄다.

 

단지 인종에 근거해서 누군가를 불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아무리 널리 퍼진 관행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일 뿐이다. 어떤 특정 인종이나 국적이 내재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간주하고, 그 결과 다른 인종이나 국적을 (1) 불공정하고 불의하게 대하거나, (2) 기만하거나(‘라가’의 의미 중 하나는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nobody]이다), 또는 (3) 적극적인 경멸감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죄며, 그런 사람은 “지옥불에 들어가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그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다. 주님은 말 그대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는”(신 10:17) 분이다. 이 구절이 나오는 문맥은 다름 아닌 인종과 계급에 관한 내용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7-18). 사도행전 10장 34절을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라나 인종을 근거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종과 국적을 근거로 편을 들거나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죄가 된다.

 

2.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다음 두 가지 “대계명”(마 22:36-40)으로 정리했다. 두 번째 계명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요청에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예를 들었다. 그 사람은 큰 위험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의 육체적인 필요와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었다(눅10:25-37). “너희도 나가서 이렇게 하라”고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명령은 내가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를 향한 것과 동일한 관심과 존경심으로 인종과 국가 그리고 계급과 소속집단이 다른 모두를 대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대계명과 관련해서 존 칼빈(John Calvin)은 이 계명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교리와 겹친다는 점에 주목했다. 칼빈 시대에 외국인은 얼마든지 멸시받아도 되는 존재였고, 또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은 무시받는 게 당연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까지 굳이 힘들게 도와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다음의 놀라운 글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다 주님을 대하듯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당신은 그에게 아무런 빚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깨달을 수 있도록, 그를 그 위치에 두셨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 사람한테 내가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보다 훨씬 못한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당신 때문에 당한 수모가 어떤 것인지는 생각해 보았는가? [중략] 사람들의 사악한 의도를 보지 말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도록 하라. 하나님의 형상은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지우고 그 대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향해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도리어 그들을 사랑하고 포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기독교강요 II.8.6).

 

이 글은 인종 차별 또는 모든 종류의 편견에 경종을 울린다. 칼빈은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점을 스스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에게 빚진 자이기에 그들을 향해 친절을 베푼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이 허락하는 한, 그 어떤 한계도 정해서는 안 된다”(기독교강요 II.8.7).

 

3. 새 창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말미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할례나 무할례”는 바로 인종 또는 종족의 차이를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바울에게 이런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여기서 어떤 절대적인 가치를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유대 혈통을 향한 사랑과 그에 상응하는 자부심을 표현하기도 했다(예를 들어, 롬 9:1-5).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인종 또는 종족의 차이는 새 창조에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새 창조란 무엇인가?

 

새 창조는 완전히 새롭게 된 물질 세계, 그래서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전쟁과 불의함도 나아가서 죄와 수치까지 깨끗하게 사라진 세상을 의미한다(사25:7-8; 65:17-25). 그런 세상은 이 세상이 끝날 때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세상의 일부가 현재로 앞당겨져서 이미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는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나오는 새 창조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님 왕국의 새로운 현실. 그리스도로 인해 도래하는 새로운 세상은 단지 미래의 종말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계 21:1–5, 3:12; 막 14:25), 이미 현재에도 해당한다. 이런 새 창조는 이미 인간 속에 만들어졌다. 새 창조는 무엇보다 선물이다. 그러나 그 선물은 그에 합당한 과제와 함께 주어진다.”

 

많은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단지 우리의 죗값을 치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했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위대한 증거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메시지가 숨어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롬 4:25). 이런 식의 부족한 생각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도록 만든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내가 이제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충분하고, 굳이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에 있을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23)로서 부활했고, 우리에게는 성령님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따라서 성령님은 어떤 의미로 볼 때, 미래에 만날 새로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일종의 “보증금(downpayment)” 또는 “선지급금(first installment)”인 셈이다(고후 1:22; 5:5; 엡 1:14-16).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영으로 또 생명으로 예수님과 한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같은 예수님을 믿는 다른 이들과도 이미 한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앞으로 만나게 될 미래의 세상과도 한몸이 되었다. 그 세상은 바로 모든 고통과 눈물 그리고 불의와 악, 나아가서 죄가 없는 세상이다.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온 우주를 정화시킬 그 능력은 새로운 탄생(cf. 마 19:28과 딛 3:5에 동일하게 나온palengensia라는 단어)을 통해서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움을 만드는 바로 그 능력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구원받은 개인을 품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세상은 폭력과 갈등 그리고 전쟁과 불의가 사라진 새로운 종류의 인류(a new humanity)가 사는 세상이다. 새 창조의 능력은 부분적이나마 이미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렇기에 리델보스는 이 선물이 “그에 합당한 과제와 함께 주어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죄와 어둠의 옛 세상을 따라 행동하면 안 된다. 앞으로 다가올 빛의 세상(롬 13:11-14)에 어울리게 살아야 한다.

 

새로운 미래 세상이 어떠할지 알 수 있는 하나의 표시가 바로 인종, 종족 그리고 나라 간의 갈등과 모든 반목 및 폭력이 종말을 맞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사 19:25).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때 주님 앞에서는 모든 인종이 다 평등하게 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사야가 새 창조를 표현할 때(사 65:25), 그는 모든 나라들과 이 땅의 모든 왕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사 60:1-7). 모든 나라의 왕들이 다 그들의 영광을 하나님의 도시로 들고 온다고 요한계시록 저자가 썼을 때(계 21:24), 또 하나님의 백성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계 7:9)으로 구성되었다고 썼을 때, 계시록 저자는 바로 이사야서에 있는 이 메시지를 반복한 것이다.

 

마지막 새 창조가 가져다 줄 이런 놀라운 비전은 우리 개개인을 구분하는 ‘민족성(peoplehoods)’과 국적에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 개인적인 특징은 너무도 중요하기에 없어지는 게 아니라 새 창조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특징을 여전히 간직한다고 해도 우리의 부활한 몸은 완전히 정화될 것이고, 옛 몸이 약함과 썩음이 없는 새 몸으로 바뀌는 것처럼 죄성이 가져다주던 모든 해악은 깨끗하게 정화될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이 해야 하는 과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런 미래, 새 창조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최선을 다해서 그 새 창조를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새 창조를 삶에서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인종 간의 평등을 고취시키고, 또한 인종 간에 발생하는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갈 3:26-28)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4. 오직 믿음으로 인한 은혜로만 의롭게 되는 복음 때문이다

 

인종 차별이 죄라는 사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전진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인종 차별이 복음의 핵심이 되는 메시지, 은혜로 인한 구원이라는 그 기본적인 원칙을 훼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리처드 러블레이스(Richard Lovelace)는 ‘영적인 삶의 역동성(Dynamics of Spiritual Life)’에서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자신들의 공로 또는 의로움 때문이 아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진리를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질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면, 사실상 기독교인 대부분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단지 다음과 같은 기독교인에 불과하다.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의롭다함(justification)을 받기 위해서 그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의존한다….. 성실함, 과거의 회심 체험, 최근의 종교적 성과 또는 상대적으로 적은 고의적인 불순종 횟수 등에 근거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인정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끌어낸다.”

 

자신의 가치와 안정감을 확보하는 데 그리스도가 의롭게 하시는 역사함 대신 자신의 업적이나 혈통 또는 행동에 의존하는 사람은 “급진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된다고 러블레이스는 주장한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나 자신이 결코 선하거나 사랑스럽고 또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을 높여주는 감정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하게 되어 있다. 이런 식의 불안함(insecurity)은 여러 형태로 표출되는데, 흔히 오만과 교만, 자기 혐오와 수치심, 또는 타인을 향한 자기 방어적인 비판으로 드러난다. 은혜가 주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당신이 경험하게 되는 가장 쓴 열매가 바로 인종 차별이다. 러블레이스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은 자기들의 안정감을 강화하고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문화가 다른 타인종을 자연스럽게 증오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종만을 같은 편에 속하는 멤버십으로 고정시킨다…. 자신들의 문화만이 가치있는 대상이 된다. 그들의 문화는 마치 자기 의심을 방지하기 위한 갑옷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아니고는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육신까지 쪼개고 들어가는 정신적 속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종과 문화는 일종의 자기 의로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저기 사는 “저 나라 사람들”과 내가 결코 같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 말은 결국 자신에게 더 익숙한 그 문화를 도덕적 절대성과 명예로운 훈장감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여러 방식들, 즉 감정 표현, 찬양, 예배 시간의 길이, 서로가 대화하는 방식 등등은 단지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형태일 뿐이지 결코 성경의 지시 사항이 아니다. 그럼에도 은혜의 깊은 데까지 이르지 못한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예배 방식만이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바른 길”이라고 쉽게 단정하고, 우리 눈에 생소한 다른 문화의 예배 형태를 경멸한다. 우리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우리 스스로의 의로움을 수선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와 다른 인종과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은밀하게(또는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할 말을 다 하고 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본 바울이 근거로 삼은 논지의 핵심은 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느냐는 것도 아니었고, 또 왜 하나님의 형상을 존중하지 않느냐도 아니었다(물론 바울은 얼마든지 이런 논지를 전개할 수도 있었다). 그의 논지는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 우월감이 주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태도는 결코 “복음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태도는 우리 자신에 관한 다른 모든 것을 다 떠나서라도, 우리 모두를 죄인인 동시에 또한 은혜의 수혜자로 동등하게 바라보는 복음을 훼손한다는 것이다(갈 2:14-16).

 

지난 몇 년간 인종 차별에 관한 좋은 신앙 서적이 많이 나왔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결함이 있다. 그것은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뜻에 거스른다는 설명을 하지만, 아쉽게도 왜 신학적으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인종 차별자가 되는지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인종 차별이라는 태도와 행동에만 포커스를 맞추었지, 거기서 단 한 걸음도 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책들은 결국 인종 차별주의자(또는 인종적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 구조가 주는 문제점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는 그렇지 않은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것은 위험하다. 인종 차별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내재적으로 자연스럽게 인종 차별주의자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되고, 그 결과 타락한 인류로서 공통으로 느껴야 하는 죄성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홀로코스트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간에 한 집단이 다른 어떤 집단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며 악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런 판단은 언제라도 소외와 학대에 대한 정당성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비록 끔찍해도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구원과 분리된 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의 의와 정체성을 내세우는 죄성의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타락한 인류의 일부라는, 부인할 수 없는 죄성에 대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저지르는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죄성의 발현이라는 차원으로 인종 차별을 바라볼 때, 그나마 이런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마저 잊을 때, 인종 차별에 연루된 사람을 향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는 커녕 서로 간의 분열만을 더 깊게 만드는 방법, 그들을 향한 비난 뿐이다. 바울이 베드로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고 꾸짖었을 때, 바울은 베드로를 망신주거나 또는 그가 강제로 바울의 뜻을 따르도록 압력을 행사한 게 아니었다. 바울은 단지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는 점을 깨닫도록 도왔을 뿐이다.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겸손과 희망의 방법이다.

 

출처: 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sin of racism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2018년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 TGC코리아(https://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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