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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모 목사 “400주년을 맞아 기억해야 할 청교도 정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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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20-10-19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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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실버선교회 산하 실버선교사훈련원의 주최하는 34기 실버미션스쿨이 8월 24일부터 11월 9일 수료식까지 12주 동안 줌(Zoom) 화상으로 열렸다. 팬데믹으로 인해 봄학기를 열지 못했지만 가을학기는 포기하지 않고 화상으로 열린 것. 

 

10월 19일(월) 저녁에는 9번째 강의가 열렸는데 조진모 교수가 청교도 미국도착 400주년을 맞아 “청교도 4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정신들”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김종국 목사(훈련원장)는 “역사신학을 전공하고 합동신학원 역사 교수를 역임하고 지금 필라델피아에 있다”라며 강사를 소개하고 “강의를 통해 뜻 깊은 해를 기념하며, 무엇보다 실버회원들이 청교도 정신을 되새기며 남은 생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조진모 교수는 “2007년에는 평양대부흥 100주년, 2017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라는 식으로 해수를 정해서 기념을 한다. 그런데 청교도들에게 400년 전인 1620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강의를 시작했다.

 

조진모 교수는 “한국 분들 대부분은 청교도에 대해 관심이 많다. 청교도들에게 긍정적인 부분도 많다. 하지만 오해도 많다”라며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한국교회에서 목사였던 아버지에게 들었던 청교도에 대한 기억을 들추기도 했다. 조진모 교수는 밤을 새워도 남을 많은 지식으로 청교도에 대한 강의를 했으며, 목회를 한 목사답게 강의도중 “아멘하라”고 할 정도로 은혜를 놓지 않는 균형을 맞춘 강의를 했다.

 

먼저 전체 흐름을 알 수 있는 강의 교재를 소개하며, 기회가 되면 맛갈있는 강의 내용도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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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4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정신들>

 

청교도 400주년

 

2020년은 ‘청교도 400주년’을 맞는 해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1620년에 교회 역사에 기록될 만한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16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Mayflower)가 미국 식민지에 도착했다. 이 배는 1620년 9월 6일에 영국 남서부 플리머스(Plymouth)항을 출발하여, 현재 뉴잉글랜드 지방의 메사추세츠주 동부 케이프 코드(Cape Cod)의 가장 끝머리에 위치한 프로비덴스타운(Providencetown)항에 닻을 내렸다. 원래 목적지는 현재 뉴욕 허드슨(Hudson)강 하구였으나, 거친 물살로 인해 파선의 위험이 생기자 북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메이플라워호는 유럽에서 화물을 운반하던 화물선이었으며, 다음해 4월 15일에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렇다면 400년 전에 배 한 척이 미국에 도착한 사건을 중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배에 탑승하였던 총 102명의 승객(남자 50명, 여자 19명, 미성년 33명) 가운데, 청교도 정신을 지닌 41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영국을 떠나야 온전한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한 뒤, 정처 없는 ‘순례의 길’을 선택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으로 향하기 전인 1608년에 같은 동기로 인해 화란으로 이주했던 자들이다. 이것이 그들을 ‘필그림의 조상(Pilgrim Fathers)’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청교도 운동은 16세기와 17세기 영국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자신의 평범한 삶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을 중시하였기에, 청교도 사상이 개인의 경건은 물론, 가정, 국가,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다. 400년 전에 미국을 찾은 필그림들 역시 청교도들이었지만, 이들은 다른 청교도들과 구분되는 매우 독특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필그림들이 미국에 첫 발을 디딘 영국인들은 아니었다. 이미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개척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도 영국인들이 뉴잉글랜드 지방을 다녀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를 서술할 때 반드시 필그림들의 행적이 반드시 언급되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지녔던 청교도 사상이 미국 건국과 정신형성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 사실 이들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언급 없이는 미국 역사는 물론, 유럽으로부터 한국교회로 이어진 보수적 신앙의 흐름을 서술할 수 없다. 

 

오늘 강의를 크게 두 부분으로 진행하려 한다. 먼저 청교도 운동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위하여, 청교도들이 영국 국교회 (Church of England)를 중심으로 외부와 내부에서 경험한 역사적 현장을 간단히 방문할 것이다. 그 후에, 1620년 미국 땅을 밟은 필그림들이 남겨준 소중한 청교도 정신을 살펴볼 것이다. 앞부분을 숙지해야 하는 이유는 뒷부분의 역사적 배경이 될 뿐 아니라, 불가분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이다. 

 

1. 영국 교회와 청교도

 

1630년, 1000명의 넘는 청교도들이 17척의 배에 몸을 싣고 메사추세츠만 식민지로 대거 이주하였다. 이들은 10년 전 도착한 필그림들과 같이 칼빈주의신학을 지녔던 자들이었으나, 충분한 돈과 자원을 지닌 부유한 자들이었고, 무엇보다 영국 국교회를 인정하고 그 안에 남아 개혁을 시도했던 청교도들이었다. 영국의 정치 상황의 변화하자, 신세계에서 참된 교회를 세운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미국행을 결정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목사는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라는 귀한 책에서, ‘영국 국교도’와 ‘청교도’의 차이는 청교도주의 이해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밝혔다. 청교도는 신앙 운동이었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정치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진행되었다. 이것이 영국에서 벌어진 정부와 교회 사이의 갈등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청교도들은 성경에 근거한 교회 개혁을 추구하였던 자들로서, 그들의 활동을 16세기 초부터 대륙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종교개혁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1.1. 헨리 8세(1591-1547) - 영국 국교회 형성, 청교도 운동의 시작  

 

영국의 종교개혁은 매우 정치적인 동기로 시작되었다. 헨리 8세는 아내와의 이혼 문제로 인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끊기로 작정하고 선언했다. 또한 1534년에 영국 교회의 모든 권한을 왕에게 귀속시키는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발표하였다. 외형적으로는 영국 교회도 개신교를 선택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교황을 대신하여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된 뒤에도 가톨릭 교리와 의식을 그대로 보전하기를 원했다.  

 

대륙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영국 교회의 개혁을 꿈꾸던 자들은, 헨리 8세가 구교와 단절한 것에 대하여는 환영하였다. 그러나 구교의 잔재를 수용하려는 그의 모습에 불만을 품고, 더욱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청교도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교도 운동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그룹은 영국 국교회에 남아서 개혁을 추진하려는 자들이었고, 다른 그룹은 영국을 떠나 대륙으로 건너가 개혁자들과 교제하면서 더욱 단호한 개혁 사상을 갖추려 했던 자들이다.  

 

1.2. 에드워드 6세(1547-1553) - 청교도의 영향력 확대, 청교도 사이의 갈등 표출 

 

에드워드 6세는 헨리 8세의 아들로서 9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청교도들에 의해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기에, 자연히 개혁사상을 지지하였고 청교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건강이 악화되어 6년 뒤 사망하게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청교도 사상을 지닌 자들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국 국교도의 입장은, 영국 국교회의 틀 안에서 성경적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점을 강조하면서, 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남아 구교의 잔재는 점진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더욱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던 자들은, 영국 국교회의 권위가 아닌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신앙의 기준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상반되는 그룹은 무엇보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사항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느냐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갖지 못하고 강하게 대립하였다. 영국 국교회가 억압적으로 복종을 강요하자, 이런 문제는 각 개인의 신앙 양심에 맡겨야 한다고 맞서 주장한 것이다. 두 그룹에 속한 자들의 미묘한 차이점이 있었다. 영국 국교도들은 주로 영국 내에만 거주하였던 자들이었으며, 대륙에서 진행되던 종교 개혁을 직접 경험하였던 자들이 주로 더욱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1,3. 메리 1세(1553-1558) - 로마가톨릭교회로 복귀, 개신교 개혁자들의 정체성 확립

 

메리 1세는 에드워드 6세의 이복누이로서 ‘피의 여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생모는 헨리 8세가 이혼한 아내로서, 부친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로 인해 천추의 한을 품고 살다가 여왕의 자리에 오른 뒤 많은 개신교 신앙인들을 죽이며 분풀이를 했다. 그녀는 생모의 신앙을 따라 신실한 로마가톨릭교회 교도였으며, 왕의 권한으로 영국 국교회를 무효화하고 가톨릭교회로 복귀하였다. 

 

그녀에 의해 약 290명의 개신교도들이 순교를 당했으며, 나머지는 핍박을 피해 대륙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 상황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영국 국교회를 신봉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모임이 이루었는가하면, 종교개혁자 칼빈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장로교회적 청교도 사상이 기초된 영어 회중이 회집되었다. 이들 모두 구교를 거부하고 개신교 사상에 입각한 교회 개혁에 지대한 관심을 지닌 자들이었지만, 영국 영토 밖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교회 정치 체제에 관한 이견을 좁히기는커녕 더욱 확고히 하였다.  

 

1.4.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 영국 국교회로 환원, 청교도 내의 분열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1세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녀는 1559년에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반포하고, 부친 헨리 8세처럼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우두머리임을 천명하였다. 그녀는 매우 정치적인 인물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구축하기 위하여, 개신교도들과 가톨릭교도를 함께 수용하는 증도 노선을 선택하였다. 

 

그녀가 왕위에 오르자, 메리 1세를 피해 대륙으로 망명을 떠났던 신도들이 소망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국교회로 환원시키고 중도적 노선을 선택하자, 과거 헨리 8세 시절 개혁자들 사이에 발생하였던 문제가 반복되었다. 한 그룹은 영국 국교회에 남아 로마가톨릭의 영향력을 막아내고 인내하며 여왕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고, 다른 그룹은 가톨릭적인 요소를 수용한 채 더욱 철저하게 개혁되지 않는 영국 국교회를 받아드릴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 사이에 노골적인 분열이 이뤄졌다. 국교회에 소속되어 남아있기로 한 자들은 향후 영국 국교회가 온전한 장로교회의 체제로 변화될 것을 믿었다. 이에 반하여 영국 국교회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판단을 내린 결과, 스스로 분리하여 독립된 교회를 세우는 소수의 ‘분리주의자’들이 생겨났다. 1620년 필그림들은 이 부류에 속한 자들이다.  

    

1.5. 제임스 1세(1603-1625) - 영국 국교회의 정착, 장로교적 청교도와 분리주의자의 결별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으로 영국 왕의 혈통이 끊어졌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를 잉글랜드의 국왕의 자리에 앉히게 되었다. 제임스 1세는 1603년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나라를 합친 대영제국의 첫 국왕의 신분으로 통치를 시작하였다.  

  

청교도들은 장로교회가 번창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1세를 크게 환영하였다. 당연히 그에게 영국 국교회를 온전한 장로교 체제로 교회를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제임스 1세는 로마가톨릭과 청교도를 동시에 견제하면서, 영국 국교회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 인해 신학의 정체성은 개신교 칼빈주의를 수용하면서도, 교회의 조직과 예식은 구교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영국 국교회 또는 성공회의 모습을 완성하게 되었다. 

   

제임스 1세의 역사적 공헌은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신앙인들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영국 국교회를 거부하는 ‘분리주의자’들이 더 이상 영국 내에서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필그림들은 1620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1609년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먼저 화란으로 건너갔다.  

 

1.6. 찰스 1세(1625-1649) -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교수형을 당함, 청교도 혁명으로 이어짐

 

찰스 1세는 그의 부친 제임스 1세와 마찬가지로 왕권신수설을 근거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단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의 위치에서 교회를 장악함에 있어. 그는 노골적으로 가톨릭의 편을 들었다. 주위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도를 아내로 맞아드렸다. 가톨릭을 옹호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동시에, 스코틀랜드 장로 정치를 폐지할 것을 명령하였고, 무엇보다 자신이 임명한 켄터베리 대주교를 통하여 강력한 반칼빈주의적 개혁을 진행하도록 했다.  

 

그의 통치 기간이 5년 지난 1630년,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대거 이주한 청교도들은 이전에 영국 국교회에 속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한 ‘분리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더 이상 찰스 1세가 수장으로 있는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영국 내에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1642년, 오래전부터 대립하던 왕당파과 의회파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보통 전쟁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찰스 1세를 대적하는 의회파에 속한 대부분이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왕당파가 패배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찰스 1세는 사형을 선고받고 단두대에 오르게 되었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왕이 처형된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충격적인 적인 사건이었다. 

  

1649년 이후 영국에서 왕정이 사라졌다. 의회파의 지도자였던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호국경(Lord Protector) 자격으로 군사 독재를 실시하는 기간 동안 청교도들은 종교적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청교도 혁명이 진행되던 기간이었던 1643년부터 5년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되어, 대표적 개신교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요리문답’, 그리고 ‘소 요리문답’이 작성되었다. 1648년 영국 의회에서 공인되었는데, 작성자의 대다수가 장로교 청교도였다. 

 

참고로, 1649년부터 1653년까지 ‘영국 연방 공화국 (Commonwealth of England)’이였으며, 1653년부터 1660년까지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연방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이었다.  

      

1.7. 찰스 2세(1660-1685) - 영국 국교회가 더욱 확고해짐, 국교도 청교도가 사라짐 

 

찰스 2세는, 부친 아버지 찰스 1세가 의회파에 잡혀 사형을 당한 뒤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크롬웰이 사망한 뒤 호국경의 자리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1626-1712)을 반대하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결과, 1660년에 왕정복고(The Restoration)가 이뤄졌다. 찰스 2세는 왕위에 오른 뒤 부친을 죽인 자들을 줄줄이 사형시켰다. 그럼에도 그는 영국 국교회에 충성스런 자들로 구성된 의회와 협조하면서 서서히 실권을 장악해 갔다. 공식적으로는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었지만, 실상 그도 가톨릭 신앙을 지닌 자였다. 

 

1662년, 영국 청교도 역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추방(The Great Ejection)’으로 인해 약 2천5백 명의 목회자들이 영국 국교회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그 후로 청교도 사상을 지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개신교도들은 극심한 핍박과 고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많은 이들이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다. ‘대 추방’ 이후로 영국 국교회 내에 머물면서 개혁을 시도하는 청교도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8. 제임스 2세(1685-1688) - 로마교회로의 환원 시도, 명예혁명으로 영국 국교회를 지킴 

 

제임스 2세는 그의 형 찰스 2세와 달리 엄격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영국 국교회를 중단시키고 로마가톨릭교회로 돌아가기를 소망했다. 단지 국왕의 위치에서 강압적인 방법을 피하고 합법적인 복원을 이루려 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큰 관용을 베풀어 관료와 장교직을 허락하였고,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과 친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2세는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영국 국교회에 속한 신하들이 그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의회는 영국 교회가 가톨릭교회의 수하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모두 개신교 신앙인들이었다. 그런데 그가 늦둥이 아들을 얻게 되자, 의회는 가톨릭 왕조가 이어질 것으로 판단하여 그를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방법은 그의 딸 메리 2세를 옹립하여, 그녀의 남편 윌리엄이 화란 군대를 잉글랜드에 보내도록 한 것이다. 1688년에 제임스 2세가 도주함으로 명예혁명, 즉 피를 흘리지 않은 혁명을 이루게 되었다.  

  

1.9. 윌리엄과 메리(1689-1702) - 종교의 자유가 허락됨 

 

명예혁명의 결과, 메리 2세와 그의 남편 윌리엄 3세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시 영국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1689년에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승인됨으로, 인권을 존중하고 중세의 군주적 독재를 종식시킴으로 근대화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는 국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법의 효력 또는 집행을 정지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의회가 1689년에 공포한 ‘종교 자유령(The Tolerant Act)’은 오랜 시간 지속되었던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영국 국교회가 확고히 존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비국교도들에게 교파를 초월하여 예배의 자유를 허락하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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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교도 4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정신들 

 

지금까지 영국을 배경으로 진행되었던 청교도 운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는 우리가 1620년에 미국 땅을 찾은 필그림들로부터 배우고 간직해야 할 것들을 살펴보자. 크게 2부분으로 나눠진다. 미국으로 향하기 전과 도착한 후에 드러난 필그림들의 청교도 정신을 요점적으로 정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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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미국으로 향하기 전에 드러난 청교도 정신 

 

 

2.1.1. 성경의 진리를 모든 기준의 기초로 받아드리는 정신

 

영국 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된 것은 헨리 8세에 의해 정치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대륙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성도들은 항상 성경적으로 철저한 개혁을 염두에 두었다. 그들은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 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라는 말은 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자들에 의해 먼저 사용되었다. 사사건건 지나칠 정도로 트집을 잡아 까다롭게 구는 유별난 자들이란 뜻을 담고 있었다. 그들에게 영국 국교회는 항상 개혁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필그림들 역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매사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영국 국교회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기로 작정한 이유는, 기존 교회에 대해 배타적이었거나 핍박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유일의 권위로 인정하는 칼빈주의 신앙을 지닌 자들이었다. 신앙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양심의 자유를 빼앗기는 상황이 지속되자, 성경의 가르침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난 것이다.   

   

2.1.2. 신앙인답게 생각하고 계획한 일은 반드시 실천에 옮기는 정신

 

필그림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지녔음에도 국교회에 남아 개혁을 시도했던 청교도들과 전혀 다른 교회의 체제를 선택했다. 그것은 감독 제도를 인정하는 영국 국교회나 대의정치를 수용하는 장로교회와 다른 것이었다. 바로 지역 교회가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갖는 것을 골자로 하는 ‘회중교회주의’였다. 

 

1580년 로버트 브라운(1550-1633)에 의해 노리치에 영국 회중교회가 처음 세워졌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였지만, 영국 국교회는 ‘분리주의자’들의 행태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브라운목사의 경우, 1582년 망명의 길에 오르기 전까지 무려 32번이나 옥고를 치러야 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의회를 통해 성공회 예배를 거부하는 자들을 추방시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분리주의자’들의 회중교회 모임이 조용하게 확산되었다. 1606년, 크루비 지역의 우체국장이자 집행관인 윌리엄 브루스터(1568-1644)의 집에서 회중교회식 예배가 드려졌다. 영국 국교회를 떠나 회중교회 목사가 된 존 로빈슨(1576-1625)이 모임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모임이 외부로 알려지자 영국 국교회가 즉각 반응을 보여, 많은 성도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장소를 제공했던 브루스터도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신앙인답게 생각하고 계획된 일은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믿었다. 어려운 상황 속과 타협하여 국교회를 인정하면 고난 없이 신앙생활이 가능하였겠지만, 자신들의 확신을 포기하지 않고 회중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렸고, 국교회가 방해하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외국 땅을 찾아 정처 없이 떠난 것이다.   

 

 2.1.3. 환경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영향력 있는 소수로 남으려는 정신

 

필그림들은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고 1608년에 네덜란드로 떠나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앞서 추방을 받아 머물고 있던 분리주의자들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화란 재세례파의 영향을 받은 지도자로 인해 공동체 안에 분쟁이 생기자, 로빈슨목사는 교인들을 이끌고 레이든으로 이주하였다. 필그림들은 부족한 수입으로 가난하게 살아야 했지만, 영적으로 나름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약 300명까지 성장하였다. 그 당시 레이든 대학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에 신학 논쟁이 진행되었을 때, 로빈슨목사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의 입장을 잘 대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그림들은 대부분 초기 이민자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바로 자녀 양육의 문제였다. 화란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지만, 이와 버금가게 도덕적 기준조차 매우 자유로운 곳이었다. 필그림들은 자신들과 자녀들이 성경적인 삶을 위해 화란 땅을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녀들이 영어보다 화란어를 더욱 많이 사용할 뿐 아니라, 화란의 세속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것에 발견하고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곧 시험을 받아 방탕해 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인해, 그들은 화란을 등지고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 당시 그들이 알고 있던 미국은 결코 ‘꿈의 나라’가 아니었다. 미국까지 가는 항로가 노록하지 않으며, 포악한 원주민과 무서운 풍토병 그리고 열악한 삶의 환경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앞서 식민지를 개척한 자들이 실패하고 돌아와야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에 가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될 뿐 아니라, 영어로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먹고 사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화란에 이주했던 모든 자들이 미국행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경험한 자들이, 새롭게 황무지에서 개척자로 살아가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필그림들은 가치 있는 삶을 선택했다. 어떤 환경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소수, 신앙적인 영향력을 지닌 소수로 남아있기를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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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미국 도착 후에 드러난 청교도 정신

 

2.2.1. 하나님과 사람과 맺은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려는 정신

   

그 당시 필그림들이 임의대로 미국으로 건너올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정착하는 권한을 부여받기 위해 다 방면으로 노력해야 했다. 그 결과, 1616년 6월 토지권리증서를 얻게 되었고, ‘머천트 어드벤쳐스’라는 실업 집단을 통해 재정 후원자와 식민지 개척을 위한 기술자를 다수 얻게 되었다. 화란에서 필그림을 태웠던 작은 배 스피드웰호에 소수를, 화물선인 메이플라워호에 다수를 각각 태우고 출발하였다가, 스피드웰에 누수가 생김으로 102명 모두 메이플라워호로 옮겨 타고 9월 6일에 최종적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두 달이 넘는 힘든 항해 후, 원래 목적지였던 허드슨 하구가 아닌 프로빈스타운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인근에서 정착지를 물색하기로 결정하자, 탑승한 자들 사이에서 특허장에 명시된 목적지가 아닌 곳에 왔으니 더 이상 회사에 대한 법적 의무가 없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 배안에는 청교도 신앙을 가진 필그림들 외에도, 필그림들이 ‘이방인’이라고 불렀던 자들이 함께 타고 있었기에 그들을 결속시킬 행동지침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므로 1620년 11월 11일, 선상에서 ‘메이플라워 서약’를 작성하여, 신분과 상관없이 성인 남자에게 서명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41명의 서명자 중에 노예 두 명도 있었다는 것이다. 서명을 마친 뒤, 필그림 지도자 존 카버(1576-1621)를 식민지 최초의 지사로 선출하였다. 

 

‘메이플라워 서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황무지를 개척에 참여할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법을 잘 지킬 것을 약속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 및 국왕과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하나님과 서로 앞에 엄숙하게 언약을 체결하였다. 민간 정치체제를 결성하고 법을 제정하여 시행할 때에, 모든 이들이 이에 철저히 순종을 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이미 필그림들이 영국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뒤에 하나님과 서로를 향한 언약에 서명한 적이 있는데, ‘메이플라워 서약’에 잘 반영되어 있었다.   

 

한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문서가 지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무엇보다 그 안에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세운 언약을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정신이 담겨져 있다. 또한 서구 역사상 최조로 군주가 아닌 개인 간의 합의에 의해 형성된 정부의 문서였다. 이 문서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천명함으로서, 향후 독립선언서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2.2.2.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정신

 

긴 항해를 마치고 미국에 도착했다는 감격을 잠시 경험한 뒤, 곧 그들은 정착지 선정을 위한 탐사를 시작해야 했다. 바닥이 얕은 작은 배를 조립하였다. 11월 15일에, 16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탐사를 한 결과, 인디언 무덤을 발견하여 파헤쳐보았고 인디언 옥수수 매장소도 찾아냈다. 11월 27일에 2차 탐사에 나섰고, 12월 6일에 실시한 3번째 탐사에서는 인디언과 맞부딪치는 일도 있었다. 결론은, 프로빈스타운 주위는 거주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플리머스 항구에 닻을 내리고 정착지를 찾아야 했다. 그들은 인디언들이 이미 땅을 개척하여 농사가 비교적 쉬운 곳을 선택하였다. 12월 중순이 지난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먼저 그들이 거할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공유 건물을 지었는데 버들가지와 진흙을 재로로 만들었다. 겨울이 지나기 전까지 7개의 주택 건물과 3개의 공동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 

 

개척자의 삶이 생각보다 힘에 겨웠다. 그들은 첫 겨울을 힘겹게 지내야 했다.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여성과 어린이들은 메이프라워호 안에 남아 있어야 했다. 육지에서 일을 마친 뒤 일부는 해안에 남아 지켜야 했고 나머지는 다시 배로 돌아가서 밤을 보냈다. 건강한 남자 대부분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추위를 이겨내며 노동을 한 결과 매우 쇠약해졌다. 또한 질병이 정착지를 강타하였다. 그 겨울에 이주자의 반 이상이 사망하는 비극을 경험해야 했다. 

 

1621년 4월, 첫 지사였던 카버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윌리엄 브래드퍼드(1590-1657)가 31세의 나이로 지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1608년에 분리주의자들과 함께 화란으로 탈출하여, 암스테르담과 레이던으로 옮겨가며 필그림과 함께 생활하던 자였다. 23살에 결혼을 하여 아들 존을 두고 있었으나, 아내의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부부가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 배에 올라탔다. 정착지를 탐험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메이플라워호에서 미끄러져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철저한 청교도 신앙으로 무장되었던 그는,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철저하게 믿었던 칼빈주의자였다. 그는 ‘플리머스 설립에 관하여’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1620년부터 1647년까지 필그림들이 경험했던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미국 역사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은 귀한 자료이다. 또한 그는 매사를 하나님의 섭리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봄으로, 어려움 속에서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근거를 신앙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2.2.3.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정신   

 

겨울을 지나면서 많은 자들이 죽었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추위가 가시면서 그들이 가져온 밀과 완두콩을 심었으나, 인디언들이 와서 농사를 망쳐놓고 도구를 훔쳐가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이런 절박한 환경에서도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1621년 3월 16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원주민 인디언이 필그림을 찾아 온 것이다. 사모셋이라는 포카노켓부족 추장이 친근감을 가지고 자신을 대추장 마사소이트의 사신으로 소개하며 접근하였다. 3월 22일, 대추장 마사소이트가 영어 구사가 가능하였던 인디언 스콴토를 동반하여 방문했다. 스콴토는 존 스미스라는 탐험가에 의해 노예로 노획 당하였지만,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본토로 돌아온 적이 있는 자였다.  

 

필그림과 마사소이트는 상호협력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공공의 적에 함께 대항하기로 약속하였다. 이것이 미국 최초의 대외조약이었다. 또한 필그림들은 그들로부터 효과적으로 농사짓는 방법과 물고기와 동물을 사냥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들을 적절한 시간에 보내주신 것이다. 

 

가을 추수가 풍년을 이뤘다. 필그림들은 넓은 땅에 풍성한 곡식을 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다. 또한 윌리엄 브레드포드는 인디언을 초청하여 함께 하나님께 추수에 대한 감사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당시 영국 백인들은 53명이, 인디언은 90명 한 자리에 모였다. 인디언들이 사슴을 잡아왔고 필그림들도 많은 음식을 준비했는데, 현재 우리가 추수감사절에 먹는 음식과는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무엇을 먹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자세로 첫 감사절을 지켰냐는 것이다. 그 모임은 진정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리는 자리였다. 그들은 지난 1년 동안 생명을 지켜주시고 풍성한 곡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억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격의 감사 기도를 올렸다.

 

미국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은 1621년 10월에 거행되었다. 그 후에도 감사절 전통이 지속되었는데, 축제보다 교회에서 감사절 예배로 지키는 것이 많았다. 17세기 후반에는,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정기적 행사로 감사절을 지냈다. 1789년에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헌법 제정을 기념하여, 11월 26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하였다. 1863년에 남북전쟁 중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 공휴일로 선포하였고, 1939년에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11월 셋째 주 목요일로 갱신하여 선포하였다. 이와 같이 필그림들은 후대 미국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에 대해 감사하는 커다란 유산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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